#181 남에게 한을 남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미중 데탕트를 이룬 사람
덥습니다. 더워요. 더워도 너무 더운 지구별……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오는 사이에 진짜 이 더위가 가실지 귀추가 주목되는데요. 휴가를 떠난 사람들, 휴가를 떠날 사람들 속에서 남은 연차 같은 것은 없는 저는 오늘도 사무실에 앉아 있습니다.
서울의 한 주방 가구점에서 혼자 살고 있는 ‘고려인’ 나탈리아의 이야기를 소개했던 지난 레터에 이런 반응이 도착했어요.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했기에 스스로 열등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치욕감.’ 이 문장이 나탈리아의 모든 복잡한 감정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탈리아가 고향에서도, 또 고향을 떠나온 한국에서도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는 게 안타깝네요. 언어가 만드는 장벽과 계층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 거니까, 이 격차를 만들고 그걸 직접 느끼게 하는 사람이 참 무섭게도 느껴졌어요.”
독자님……  사람에게 치욕감을 안기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구요. 이 무거운 지적에 어떻게 호응할지 생각하면서 멍하니 건너다본 서가에는 이런 책이 또 꽂혀 있는데요.
저우언라이(周恩来, 1898~1976년)는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으로 꼽히는 정치인입니다. 혁명가, 행정가, 외교가로서 현대 중국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이루는 데 평생을 바쳤는데요. 무엇보다 1970년대 미중 데탕트를 이룬 외교가로 기억되고 있어요.
데탕트(Détente), 그러니까 ‘긴장 완화’를 이루어냈다…… 《한편》 다음 주제가 ‘우정’이고, 우정과 적대, 불화, 갈등, 친구, 적을 맨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문득 역사적 사실이 마음으로 다가드네요. 아, 그런 적이 있었지. 냉전에서 긴장 완화로…… 외교적 고립에서 관계 개선으로…… 아니,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극한 갈등의 2023년에는 ‘화해’를 말하는 사람이 절실하기도, 의심되기도 한단 말이죠.
국내 1세대 중국 연구자이자 초창기 대중 외교를 직접 담당한 ‘중국통’인 저자 정종욱의 『저우언라이 평전』을 한번 볼까요. 저우언라이의 생애를 들여다본 끝에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지막 대목이에요. 외교의 대가 저우를 투쟁의 대가(당연함. 혁명을 해냄) 마오쩌둥과 비교하고 있으니 흥미진진합니다.(만약 이러한 ‘인간적’ 설명이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면 오직 인용자의 탓이니, ‘마치며’를 꼭 펼쳐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우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화두는 저우의 생각과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저우가 살아온 과정을 살피면서 그토록 당당하고 존경받는 저우가 어째서 마오 앞에서는 그렇게 왜소해지고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우의 그런 행동을 권력에 대한 아부나 자기 보전을 위한 계산된 행동으로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근엄 속에 숨겨진 위선이자 개인적 안위와 보신을 최우선 가치로 하는 저우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는 혹평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해석에서 뭔가 빠진 것이 있다고 느꼈다. 적어도 위선이나 아부로 보기에는 저우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럽고 진솔해 보였기에 그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두고 고민했다. 나는 저우의 가정 환경과 집안의 전통에서 그 실마리 하나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
마오의 경우, 마오가 어렸을 때 경험한 부친과의 갈등을 트라우마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아시아 문화 연구의 대가였던 루시안 파이(Lucien Pye) 교수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가장 중요한 도전은 권위와 충돌해서 갈등이 생길 때 이를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집안에서는 ‘아버지’라는 권위가 있고 학교에는 ‘선생’이라는 권위가 있는 것처럼 국가에는 ‘군왕’이라는 권위가 존재하는데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들 권위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정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숙명이다. (……)
마오와 저우는 갈등 해결에서도 이런 차이를 보여 준다. 파이 교수는 어린 마오가 경험했던 ‘우물가의 자살 사건’을 자주 거론한다. 부친과 심하게 다투던 마오가 우물에 빠져 죽겠다고 위협하자 호랑이 같은 부친도 아들에게 양보했다는 일화인데, 이 경험이 마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에는 극단적 대응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교훈을 주었다는 주장이다. 마오가 왜 문화 혁명 같은 극단적인 사건을 일으켰는지를 설명할 때 자주 원용된다.

우물가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오에게 갈등 해소의 방법은 투쟁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었고 철이 들어서는 원하지 않는 중매결혼에 반대해서 사실상의 가출을 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이나 그 후의 시기나 마오는 대부분 외톨이었고 다수의 편에 서기보다는 소수의 편에서는 경우가 많았다. 권위에 굴복하기보다는 권위에 맞서 대항하고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투쟁했다. 그게 마오가 살아간 삶의 족적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저우의 경우는 다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가족 간의 우애도 좋았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20대 후반에 혁명 투사가 된 후에는 상하이 사변이나 난창 봉기, 대장정이나 옌안 정풍 같은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남과 원수를 지거나 가슴에 한을 남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도 극단적인 투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택했다. 권위와 갈등을 겪을 때에도 정면으로 도전하기보다는 우회하거나 절충했다. 돌아가거나 절충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일단 패배를 인정하고 차선을 택했다. 절대적 권위와 갈등이 생기면 특히 그랬다. 마오와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
필자는 저우의 이런 행동이 저우 집안의 가업이었던 스예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예는 지방 관리이지만 양반 계급이었다. 말하자면 지방의 준통치 계급이었다. 화이안에 있는 저우의 고향 집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방에 있는 집 치고는 대단히 큰 규모의 기와집이다. 적어도 사오산에 있는 마오가 태어난 농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화려하다. 스예를 가업으로 삼았던 저우 집안이 지방의 양반 계층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저우를 낳은 모친이나 키워준 양모도 모두 스예 집안이었다. 저우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이른바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감추려했던 적도 없었다. 사오싱이나 화이안 출신을 만나면 몹시 반가워했다. 내세우거나 감추기 전에 저우는 어려서부터 스예 집안의 가풍 속에서 전통적인 가치를 내재화하면서 자랐다. 저우의 사고와 행동의 바탕에는 유교적 가치가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이 든 다음에 습득한 공산주의 사상이 그런 어린 시절의 가치 위에 덧씌워졌지만, 바탕의 가치들이 사라진 게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 속에 잠재해 있었다. 스예 집안의 전통적 가치관이 공산주의의 혁명적 가치와 함께 의식과 무의식의 다른 공간에서 서로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는 저우에게 군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마오를 떠받들고 충성하는 것이 자신의 안위나 영달을 위함이 아닌,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물론 강한 마오의 성격과 그보다는 강하지 않은 저우의 성격에서 오는 차이도 있겠지만 성격보다는 가치관의 차이라는 측면이 더 강했다고 믿는다. 1975년 여름 마오가 백내장 수술을 받았을 때 저우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마오의 병실 문 앞에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을 단순히 권력자에 대한 아첨이나 위선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마오가 사용할 안약의 부작용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자신의 눈에 먼저 약을 넣어 보자고 했던 저우의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저우의 이런 행동을 마오에 대한 계산된 아첨이나 과장된 헌신이라는 해석은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 정종욱, 『저우언라이 평전』,
348~354쪽에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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