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질투는 왜 사람을 미치게 할까

 

 

『오셀로』를 정치적으로 읽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환상과 현실 사이’를 주제로 편지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소개해드린 우울의 고전에 이어서, 광기에 좀더 접근해보려고 해요. 보통 사람과 광인 사이의 경계가 생각보다 흐릿하다는 것이 인문잡지 《한편》 3호 ‘환상’의 출발점인데요. 오늘은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 광기의 단초가 어떻게 숨어 있는지를 분석하는 골치 아픈 비평을 가져왔습니다. 바로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셰익스피어론이에요.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무(nothing)’라는 말이 여성의 생식기도 의미했다는 증거가 없지도 않다. 남성 생식기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의 두 다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러한 사실이 남성들을 안심시키는 만큼 또 불안하게도 한다. 한편으로 여성의 이러한 분명한 결핍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힘의 우위를 확인해 준다. 다른 한편으로 남성 자신이 거세당할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 사고를 일깨워서, 자신의 존재가 상상했던 만큼 완벽하게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남성은 여성의 외형적 결핍을 보면 내면의 공허감을 스스로 자극해서 그곳을 물신처럼 이상화된 여성으로 채우게 된다. 만약 여성의 다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면 여성은 거세된 성모 마리아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순수성은 여성적 무에서 도래할 혼돈으로부터 토템 신앙처럼 남성을 보호할 수도 있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에게 두 가지의 불가능한 역할을 부여하면서 갈팡질팡한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런데 그 마음이 사라지면 또다시 혼란에 사로잡히고 말아.”(3막 2장 92~93행) 여성적 무가 단순한 결핍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단순한 결핍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결핍은 존재함을 감지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력한 암시력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공허함으로, 그것은 하찮음(rien)이라기보다는 없음(néant)을 의미하는 무이다. 여성의 무는 남성이 그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잃을 수도 있는, 기이하게 소용돌이치면서 크게 입 벌리고 있는 심연과 같은 것이다. 이 온건한 무는 숭고하고도 두려운 전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상 이것이 바로 여성의 수수께끼이다. 비록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단순한 결핍 또는 부정(negation), 비남성, 결핍된 남성을 의미할지라도, 남성 속에 있는 뒤섞인 욕망의 ‘전부’를 불러일으키는 힘만이 아니라 남성을 파괴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부드러운 무가 사악한 전부로 바뀌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편집증적인 질투에 사로잡힌 오셀로는 단순한 무(사랑하는 여인의 배신하지 않음)가 실제로 심연의 무, 즉 데스데모나의 부드러운 외면 밑에 놓여 있는 불가사의한 심연이라고 믿는다. 오셀로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이아고는 “정체가 없는 것(Nothing)”이라고 대답하는데, 이 대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정확하다. 
 

그러나 이아고는 마음을 사로잡는 그 공허한 텍스트 속에서 오셀로가 즉시 무서운 무언가를 읽어 내리라고 정확하게 예측한다. 사실 이는 전형적인 편집증이다. 오셀로가 잃어버린 손수건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읽어 내듯, 그런 상태에서는 세상을 ‘지나치게 읽음으로써’ 모든 부수적인 세부 사항 속에서 억압적 구조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철학은 편집병에 가장 가깝다고 프로이트는 비꼰다. 프로이트가 일컬은 ‘병적 인식 애호’는 편집증과 철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숨어 있는 지식을 찾아 헤매고 그 지식을 지배하고 소유하기 위해서 신비의 핵심을 뽑아내는 병적 강박 관념이다. 그 신비의 핵심은 실상 없기 때문에(실제로 『오셀로』에서 신비란 없다.) 권력과 지식에 대한 이러한 욕구는 언제나 좌절될 수밖에 없다. 편집광들은 구조적으로 외양을 불신한다. 그러므로 눈앞에 열려 있는 것이 전부이고, 세계는 내밀한 본질을 지니지 않은 현세 그대로이며, 또한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외양이 아니라 놀랄 만큼 진실한 실체라는 것 등을 받아들일 수 없다.
 
프루스트를 읽으면 알 수 있듯, 근본적으로 성적 질투는 해석의 위기이다. 훔쳐보는 성적 취미를 가진 사람처럼 오셀로는 아내의 간통 혐의에 대한 ‘시각적 증거’를 보고, 관찰하고, 확보하기를 고집한다. 그러나 이처럼 맹목적인 사실에 대한 순진한 믿음에서 아이러니는, 인식 그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라는 것이다. 어쨌든 인식이 어떤 의미를 갖기 전에 그 인식에 대한 해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해석은 편파적이고도 무한하기 때문에,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 현안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진실 그 자체는 비록 사물일지라도 일종의 공백이므로, 어떤 것으로 결정되기 전에 의미화할 필요가 있다. 
 

모든 해석은 그 대상을 넘어선다. 그러나 해석이 대상을 지나치게 넘어가면 마치 오셀로처럼 뒤집혀서 무를 선택하게 되고, 삶의 이면에 있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불러내게 된다. 한편으로 오셀로는 지나치게 어구에 충실해서 속기 쉬운 독자처럼 이아고의 거짓말을 무조건 믿는다. 동시에 그는 지나치게 공상적이라 일상의 외양 밑에서 작동하는 완전한 상상적 서브텍스트를 만들어 낸다. ‘지나치게 적음’은 ‘지나치게 많음’으로 바뀌는 법이다. 자신이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 감상적 능력을 무심코 드러내게 마련이다. 만약 오셀로가 겉과 속이 다른 이아고의 텍스트 자구에 포로가 되어 옴짝달싹 못하기보다 그것을 넘어갈 수만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진실을 그대로 보아서 기표와 기의를 적절히 결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창조적인 해석상의 잉여만이 그를 규범으로 복귀시킬 수 있겠지만, 실상 오셀로는 이아고의 공허한 기표에 고분고분하게 따르면서 그 빈 기표를 데스데모나의 간통이라는 상상적 기의로 채우고 있다.
 
지시 대상 없는 기표, 즉 현실에 전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다 먹어 치우는 괴물 같은 해석학적 팽창처럼, 대상을 압도하는 것이 바로 편집병적 질투의 성격이다. 질투는 자신의 목적에 맞게 세상을 조종하는 폭군 같은 언어이자, 증거를 자신의 이익 쪽으로 돌리는 가장 독재적인 법률이다. 따라서 “공기처럼 가벼운 사소한 것도/ 성경 말씀만큼이나/ 질투하는 사람들에게는 틀림없는 확증이 된다.”(3막 3장 326~327행) 애초에 오셀로는 이러한 일련의 공허한 기표들을 확실한 증거를 통해 붙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니야, 이아고
의심하기 전에 봐야 해. 의심한다면 증거가 있어야지.
그래서, 증거가 있다면,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
사랑이고 질투고 모두 끝장이야!
(3막 3장 193~196행)
 
 
그러나 질투 자체를 테스트하기 위한 증거는 바로 그 질투 속에 이미 전제로 깔려 있으므로, 이와 같은 주장은 순전히 순환적인 것이 된다. 오셀로는 이후에 “조금밖에 알지 못하느니/ 차라리 속는 것이 훨씬 더 좋아.”(3막 3장 340~341행)라고 외친다. 조금만 안다는 것은 달리 모르는 게 있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고통인 것이다. 지식은 무한으로 뻗어 나가서 현재의 증거들이 존재하지 않을 또 다른 증거를 각각 암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명백한 것일지라도 역시 모호할 수밖에 없다. 성적 질투는 이러한 일반적 상태를 더욱더 강화해서 단순히 손수건 하나로 많은 분량을 읽어 내게 한다. 
 

『오셀로』에서 중요한 개념인 ‘자유’는 이런 점에서 모호한데, 정신적 관대함과 성적 난잡함이라는 이중적 외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스데모나가 호의와 음란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두지 않고, ‘예의 없게’ 행동한다는 의심을 늘 받지 않으면서 캐시오(새로 임명된 오셀로의 부관. 이아고의 계략으로 데스데모나의 연인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이란 가부장제의 이중 굴레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이 자유롭다는 것은 언제나 지나치게 자유로운 것이 되므로, 캐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애정은 엄격한 사회적 본분에서 벗어날 때 규범을 위반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된다. 여성은 영구히 오독을 면할 수 없는, 항상 곡해되는 텍스트이다. 여성은 음란하지 않으면서 예의 바를 수 없고, 사려 분별이 있으면서 냉정할 수 없고, 격정적이지 않으면서 온화할 수가 없는, 다시 말해 명료한 해석으로 가는 길의 방해물인 것이다. 코델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데스데모나가 그런 경멸을 미리 막을 방법이란 도저히 없다. 데스데모나의 행동은 항상 그러한 경멸을 더욱 굳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담겨 있는 의미는 유쾌하지 못하게도 질투가 성적 욕망의 한 형태가 아니라 성적 욕망이 질투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만약 한 여성이 정숙할 수 있다면 부정하게 될 가능성 역시 언제나 있다고 하겠는데, 이는 마치 진리를 말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단어 하나가 속이는 데에도 항상 이용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오셀로는 “자연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관찰해 보지만, 그 가능성은 자연 속에 내포된 구조적인 것이다. 누군가를 원한다는 것은 그를 자신에게는 없는 ‘다른’ 무언가로 간주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원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개념적으로는 원하는 것을 결코 완전하게 소유할 수 없으므로, 원하는 대상을 전부 잃을 가능성이 격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아고는 “가난하면서도 만족하면 부자, 상당한 부자이지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한한 재산도 겨울처럼 황량한 법입니다,/ 가난해질까 봐 언제나 걱정하는 사람에게는.”(3막 3장 176~178행) 그렇지만 만약 소유함이 상실할 수 있음과 같다면 모든 소유가 불안의 근원이 되고 만다. 이 점은 데스데모나가 부정한 아내라고 의심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오셀로는 아내를 실제로 강렬하게 원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아내에 대한 이전의 ‘사랑’은 순전한 자기도취이다. 그는 군인의 오만함으로 데스데모나를 차지한다. 그리고 학살 전문가의 기술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찬사에 의기양양해진다. 데스데모나가 간통한다고 의심하는 것은 독립된 오셀로 자신의 동일성으로 데스데모나를 판단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자기도취적 회선이 꺾이면서 그 자신의 동일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그의 질투 중에 많은 부분은 당당하게 충만한 이기심이 안으로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에 대한 이기적인 두려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성적 무, 즉 오셀로의 허풍으로 숨이 막힌 그 순진한 소녀가 사악하게도 독립된 존재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욕망에 그러한 결핍과 자율이 필연적이라면, 욕망은 일종의 기괴함 또는 도착과 같은 것이다. 남자가 결코 소유할 수 없고, 남자의 지배를 교묘히 피하면서 남자에게 ‘과대 해석’이라는 열광적 행동을 일으키는 존재가 여자라는 것이다. 과장된 기표, 중상적인 오독, 무한한 텍스트의 망, 비꼬인 논리적 궁지(“내 아내가 정숙하다고 생각하면서, 또 부정하다고도 생각해.”) 등은 아마 육체적 사랑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도를 무시하고 망상을 불러내고 대상을 훔쳐보는 것 등이 그러한 에로스가 지니는 성격이다. 『오셀로』는 성적 비정상에 관한 극이 아니라, 성 그 자체의 비정상성에 관한 극이다.
 

그렇다고 이 점이 이아고 같은 인물의 냉소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셀로가 끝내 망상과 진실을 구별할 수 없다면, 이아고는 처음부터 망상과 진실을 너무 엄격하게 분리한다. “나는 나 자신이 아니오.”라는 대사는 동일성의 위기를 알리는 전조가 아니라 독선적인 자아 확인이다. 이아고는 어떤 모습으로 비치든 그와 정반대의 인물이 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 일관되게 적용해 온 방식이다. 이아고에게 외양이란 실용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공허한 관습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랑이라는 깃발과 표지를 분명히 들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기호에 불과한 것”(1막 1장 157~158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에서 ‘단지 기호에 불과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표는 항상 의미와 관련해 활동하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버릴 수 있는 빈 통 같은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에서 소유욕 강한 개인주의자의 긴 행렬에 드는 인물이 이아고인데, 이들은 육체적 욕망 속에서만 진실을 찾으므로 그들 자신은 신비화에 따르는 결과에 상처받지 않으면서 외부에서 기호와 형식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셀로가 자신의 존재가 과장과 연극성과는 분리될 수 없는 일관된 상상적 자아상으로 살아간다면, 이아고는 오셀로의 그러한 빛나는 담론을 “세상 모르는 재잘거림”이라고 비웃는다. 그러나 오셀로의 연극 같은 ‘호언장담’과 이아고의 활기찬 유물주의는 둘 다 그 한도를 놓치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외양과 실체를 빈틈없는 하나의 전체로 융합해 버리는 오셀로처럼 비극적 광기의 희생물이 되지 않고, 또 냉소적으로 자연주의를 견지하는 이아고와는 다르게, 기호와 환상이 현실의 구조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이다. 모든 경험은 욕망에 끌려다니기 때문에 환상과 신비화라는 피할 수 없는 차원을 갖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상부 구조의’ 신앙심 같은 것이 아니라, 내적 형식의 일부인 담론과 상징 속에서 모든 육체적 욕구가 포착된다는 것을 이아고는 알지 못한다. 오셀로는 이것을 지나치게 인식해서 기호와 실체를 혼동하기에 이른다. 외양을 실체로 잘못 아는 것과 외양의 실체를 인식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구별하는가? 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정신병의 한 조건이 된다는 점을 『오셀로』는 암시한다. 더욱 놀랍게도 이 정신병적 요인은 일상생활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 테리 이글턴, 김창호 옮김, 『셰익스피어 정치적 읽기』 131~143쪽 중에서
 

 

바로 어제 철학책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분석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철학은 편집증에 가깝다”라는 인용을 보니까 반갑네요. 프로이트의 이 말을 언급하는 이글턴 본인이 이미 셰익스피어를 너무나 파고들고 있지만요. 이글턴에 따르면 오셀로도 이아고도 ‘환상의 현실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인데요. 사실 이해와 상관없이 욕망에 한번 사로잡히면 헤어나기 어려운 것 아닐까요! 

저도 철학은 편집증에 가깝다는 대목에서 크게 웃어 버렸어요. 이글턴의 글 역시 얼마간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라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의미를 찾고 이야기하는 마음이란 어쩔 수 없는 걸까요?  오셀로와 이아고 이야기 끝에 섬뜩한 한 마디. “더욱 놀랍게도 이 정신병적 요인은 일상생활에 내재한다.” 《한편》 3호의 발간사 「환상과 함께 살아남기」의 한 대목이 떠오르네요.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을 때 죽음은 친근하게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테리 이글턴.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그 끔찍한(dreadful) 테리 이글턴”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 거침없는 비판과 쏟아지는 유머로 무장한 비평가. 그는 데리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풍자하면서 데리다 이름으로 해체주의적 시를 지어 보내고, 자신의 새 저서가 유럽에서도 영국에서도 각자의 이유로 욕먹기를 소망하는 영문학자다. 『셰익스피어 정치적 읽기』는 영국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초기 대표작이다. 문학에서의 이데올로기 분석으로 잘 알려진 이글턴은 이 책에서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수많은 찬사로부터 살짝 물러나, 왜 셰익스피어가 끝없이 새롭게 읽히는가를 독창적으로 분석한다. 모든 위대한 문학 작품의 경우가 그렇듯, 셰익스피어 역시 이데올로기를 가진 인간이자 글쓰기로 그것을 뛰어넘은 작가였다. 셰익스피어의 이데올로기와 글쓰기. 그 사이에 셰익스피어를 읽는 단서와 쾌감이 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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