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우울과 함께 살아가기

지난 레터에서 소개해 드린 『스토리텔링 애니멀』에는 ‘이야기하는 마음’과 정신병의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 있었죠. 오늘은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을 소개해 드립니다. 20년 전 출간된 이 책은 어느새 ‘우울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는데요. 우울증 환자였던 저자가 우울이라는 감정부터 우울증 치료,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낙인까지 우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 심리 기제다. 우리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자아를 변질시키고, 마침내 애정을 주고받는 능력까지 소멸시킨다. 우울증은 우리의 내면이 홀로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은 타인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까지 파괴한다.
사랑은, 우울증을 예방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의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가 되어 마음을 보호해 준다.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는 우리가 더 쉽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이런 보호 기능을 되살려 줄 수 있으며 그래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정신이 건강한 상태에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며, 이런 열정들은 우울증의 반대인 활기찬 목적의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랑은 이따금 우리를 저버리며 우리도 사랑을 저버린다. 우울증에 빠지면 모든 활동, 모든 감정, 나아가 인생 자체의 무의미함이 자명해진다. 이 사랑 없는 상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감정은 무의미함이다.
 

삶은 슬픔을 내포한다. 우리는 결국 죽게 될 것이며, 각자 자율적인 육체의 고독 속에 갇혀 있으며, 시간은 흘러가고, 지나간 날들은 다시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고통은 무력한 세상의 첫 경험이며 평생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안락한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에 대해 분노하며 그 분노가 사그라지기 무섭게 세상의 고뇌가 그 자리를 메운다. 내세에서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라도 현세에서 고통받는 걸 피할 수 없다. 예수 자신도 비탄에 젖은 자였다. 

우리는 완화제들이 계속 증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느끼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도 더 쉬워졌다. 그런 회피 수단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불가피한 불쾌함도 점점 줄고 있다. 그러나 약학계의 열띤 주장에도 불 구하고, 우울증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의식하는 존재인 이상 완전히 없앨 수 없다. 기껏해야 억제할 수 있으며, 현재 행해지는 우울증 치료의 목적은 억제에 머물러 있다. 
강한 정치색을 띤 웅변술이 우울증과 그 결과, 즉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와 그 결과 어떻게 행동하는가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해 왔다. 우울증은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의학적 현상이지만 감정적 변덕에 따른 언어적 변덕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울증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우리에게 억지로 가해지고 그다음에는 외부적 요인과도 무관해지는 감정적인 고통일지 모른다. 
우울증을 단순히 커다란 고통이라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큰 고통은 우울증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상황에 걸맞은 우울함이지만 우울증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슬픔이다. 우울증은 가을에 밑동에서 부러져 들판을 굴러다니는 회전초처럼 자양분을 주는 대지와 분리되어서도 죽지 않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고뇌다. 그것은 오로지 은유와 우화로만 설명될 수 있다. 성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찾아온 천사들과 화려하게 치장한 악마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냐는 물음에 그들이 떠난 후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천사가 왔다가 떠나면 그의 존재로 인해 힘이 솟고 악마가 왔다 떠나면 공포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슬픔은 우리에게 강하고 분명한 생각들과 자신의 깊이에 대한 이해를 남기는 허름한 옷차림의 천사다. 그리고 우울증은 우리를 겁에 질리도록 만드는 악마다. 
 

우울증은 대략 가벼운 경증과 심각한 중증으로 나뉜다. 경증 우울증은 녹이 쇠를 약화시키듯 사람을 손상시키는, 점진적이고 때로는 영구적인 우울증이다. 이것은 너무도 사소한 이유로 너무도 큰 슬픔을 느끼게 하며 고통이 마음속 다른 감정들을 몰아낸다. 이런 우울증은 신체적으로는 척추를 곧게 세우는 근육들과 눈꺼풀에 작용한다. 이것은 심장과 폐를 손상시켜 불수의근[내장근이나 심근처럼 의지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의 수축을 필요 이상으로 힘겹게 만든다. 만성화된 육체적 통증이 그러하듯, 이것도 고통의 순간을 견딜 수 없어서라기보다 그런 고통의 순간들이 다시 찾아올 것을 알기에 비참하다. 경증 우울증이 진행 중일 때는 낫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상태에 대해 오싹할 정도로 명료하게 묘사해 놓았다. “제이콥은 창가로 가서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서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킬트를 입은 그리스인 셋과, 배의 돛대들과, 한가로이 거닐거나 활기차게 걸어가거나 무리 지어 손짓을 섞어 가며 이야기하는 한가하거나 분주한 하층민들을 보았다. 그의 우울은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보다 심오한 신념, 자신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외롭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제이콥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마치 시간과 영원성이 스커트와 양복 조끼를 통해 나타나듯 그녀의 마음속에 기이한 슬픔이 일었고, 그녀는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광경을 보았다. 하지만 맹세코 줄리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라고도 썼다. 그러고 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기분의 변화는 우리를 지치게 한다.” 그렇다. 경증 우울증을 이루는 것은 삶의 덧없음과 한계에 대한 이러한 예리한 인식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이 그저 묵묵히 견디며 살았던 경증 우울증은 이제 의사들이 그 다양한 특성들을 정의하기 위해 애쓰는 치료 대상이 되고 있다. 
 

중증 우울증은 붕괴의 원인이다. 영혼이라는 쇠가 슬픔으로 풍화되고 경증 우울증으로 녹이 슨다면, 중증 우울증은 전체 구조를 갑작스럽게 무너뜨린다. 우울증에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차원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류적인 것이다. 차원적인 접근에서 보자면 우울증은 슬픔을 지닌 사차원적 연속체로서, 모든 인간들이 느끼고 알고 있는 어떤 것의 극단화된 형태다. 분류적 접근에서 본 우울증은 (위장의 바이러스와 소화불량이 다른 것처럼) 다른 감정들과 완전히 구분되는 질병이다. 

둘 다 옳다. 우리는 점진적인 감정의 길을 (혹은 갑작스러운 자극을) 따라가다 보면 완전히 다른 장소에 이르게 된다. 부식된 철조 건물이 붕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녹은 끊임없이 철근을 공격하여 그것을 부식시키고 껍데기만 남긴다. 붕괴가 아무리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해도 그것은 부식이 누적된 결과다. 결코 매우 극적이거나 부식의 누적과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 비를 맞은 순간부터 녹이 대들보의 철근을 먹어 들어간 시점까지의 긴 시간을 의미한다. 극히 핵심적인 부분에 부식이 생겨 붕괴가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그보다는 부분적인 붕괴가 더 빈번하다. 한 부분이 붕괴하면서 다른 부분에 충격을 주어 극적으로 부식의 균형을 깨는 것이다. 
부식을 체험하는 것, 거의 날마다 내리는 비의 파괴에 노출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 자신이 연약한 존재로 변모하고 있고 자신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강풍에 날려 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아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감정의 녹이 더 많이 슨다. 우울증은 생기를 빼앗고 하루하루를 뿌연 안개로 덮고 일상적인 행동들을 힘겹게 만든다. 우리를 피곤하고 지치고 망상에 시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행복하게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헤쳐 나갈 수는 있다. 
 

중증 우울증은 탄생이자 죽음이다. 우울증을 이루는 탄생과 죽음은 동시에 일어난다. 얼마 전 나는 어릴 적에 놀던 숲을 찾아가 백년 세월의 위용을 자랑하는 떡갈나무를 만났다.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동생과 함께 놀고는 했다. 그런데 20년 사이 거대한 덩굴식물이 이 위풍당당한 나무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어디부터 나무가 끝나고 어디부터 덩굴줄기가 시작되는지 알기 어려웠다. 덩굴식물이 나무 줄기와 가지들을 완전히 감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덩굴식물의 잎들과 나무의 잎들을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가까이 가서 봐야 살아남은 떡갈나무 가지들이 너무도 적다는 것을, 몇몇 필사적인 떡갈나무 싹들이 엄지손가락을 세운 모양으로 거대한 몸통에 붙어 있는 것을, 그 잎들이 기계적인 생물학에서는 생소한 방식으로 광합성 작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증 우울증에서 막 벗어난 참이라 우울증이 강 건너 불 구경일 수 없었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나무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덩굴식물이 떡갈나무를 정복한 것처럼 나의 우울증도 내 안에서 점점 세력을 넓혀 가며 흉측하고 기괴하고 나보다 더 생기에 찬 모습으로 나를 친친 감았었다. 그것은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고 조금씩 나의 생명력을 고갈시켰다. 최악의 단계에서는 떡갈나무의 높은 가지들에 매달린 잎들이 덩굴식물의 것이듯,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우울증의 것인 듯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이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내 정신이 어떤 방향으로도 확장될 수 없는 속박 상태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해가 뜨고 진다는 건 알았지만 그 빛은 거의 내게 이르지 못했다. 나보다 강한 어떤 것에 짓눌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발목을 쓸 수 없었고 그다음에는 무릎을 움직일 수 없었으며, 다음에는 허리가 압력을 이기지 못해 무너지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어깨가 구부러졌고 결국에는 가차 없이 나를 짜부라뜨리는 힘에 굴복하여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가 되었다. 그것의 덩굴손이 나의 정신과 용기와 위장을 박살 내고 나의 뼈를 부러뜨리고 나의 몸에서 생기를 빼앗으려고 덤볐다. 더 이상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은 듯한데도 그것은 계속해서 나를 먹어 치웠다.
 

나는 앞에서 우울증은 탄생이며 죽음이라고 했다. 탄생하는 것은 덩굴식물이다. 죽음은 곧 자신의 붕괴, 가지들의 부러짐이다. 처음 사라지는 건 행복이다. 그 무엇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중증 우울증의 주요 증상이다. 그리고 곧 다른 감정들이 행복의 뒤를 따라 망각에 이른다. 우리가 일찍이 알고 있던 슬픔,(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온 듯한 슬픔) 유머 감각, 사랑에 대한 신념과 사랑하는 능력. 그렇게 모든 것들이 걸러져 나가면 스스로에게도 멍청이로 보인다. 원래 머리숱이 적었다면 더 적어지고 원래 피부가 나빴다면 더 나빠진다. 자신에게조차 역겨운 냄새를 풍기게 된다. 다른 사람을 믿거나 감동하거나 슬퍼하는 능력도 잃는다. 결국 빈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부재하게 된 것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것들의 부재는 다른 것들의 존재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자신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외래의 것의 손아귀에 든다. 우울증 치료는 문제의 절반만 다루는 경우가 너무 많다. 존재하는 것들에만, 혹은 부재하는 것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1000근 무게의 덩굴식물을 잘라 내고 나무의 뿌리 조직과 광합성 기술들에 대해 다시 배우려면 둘 다 필요한데도 말이다. 
약물치료는 덩굴식물을 난도질한다. 우리는 약물이 그 기생식물을 조금씩 말라죽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가지들이 자연적인 형태를 제법 회복하는 게 느껴진다. 덩굴식물을 제거하기 전에는 그동안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덩굴식물이 없어져도 나무에는 얼마 안 되는 잎들과 얕은 뿌리만 남겨지며 재건을 가져다주는 약물은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덩굴식물의 무게가 사라져도 대개의 경우 나무에는 넘어지지 않을 만큼의 뿌리가 남아 있으며 드문드문 남은 잎들이 필수적인 영양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삶도, 강한 삶도 되지 못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뒤 재건하기 위해서는 사랑, 통찰력, 일,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러시아에는 “잠에서 깨었을 때 아무 고통이 없다면 죽은 줄 알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고통뿐인 건 아니지만 격렬한 고통의 체험은 생명력의 가장 확실한 표시다. 다시 쇼펜하우어의 말을 들어 보자. “만물이 저절로 자라고, 구워진 칠면조들이 날아다니고, 연인들이 지체 없이 서로를 발견하고 아무 어려움 없이 서로를 지킬 수 있는 유토피아로 우리 인류가 이주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 곳에서 살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권태로 죽거나 목을 매달고 어떤 사람들은 싸워서 서로 죽이는 식으로 자연이 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 낼 것이다. (……) 고통의 정반대는 권태다.” 나는 고통은 변형되어야 하되 잊혀선 안 되고, 부정되어야 하되 지워져선 안 된다고 믿는다.
 ― 앤드류 솔로몬, 민승남 옮김, 『한낮의 우울』 17~36쪽에서
 
8086_1601344045

『한낮의 우울』은 무려 724쪽에 이르는 벽돌책인데요! 그 안에 저자가 겪은 우울증과 치료, 재발의 지난한 과정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어요. 떡갈나무와 덩굴식물의 비유처럼 생생하게요.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행복하게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헤쳐 나갈 수는 있다.”라는 문장이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았어요. 이때 헤쳐 나간다는 것은 ‘우울을 극복하기’가 아니라 ‘우울과 함께 살아가기’라는 생각도 들고요.   

8086_1598934976사랑으로 시작해서 고통으로 끝나는 이번 편지가, 꼭 삶의 흐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우울증에서 벗어난 뒤 재건하기 위해서는 사랑, 통찰력, 일,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문장에서 떠오른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한 편을 전해 드릴게요.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 에밀리 디킨슨, 정은교 옮김,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에서

자신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저자 앤드류 솔로몬은 1998년 ‘뉴요커’에 “멜랑콜리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한 후 천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저널리스트 솔로몬은 수많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할 말이 많은 주제는 없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저술 동기다. 솔로몬은 인터뷰와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과학, 철학, 역사, 정치, 문화 전 분야에서 “멜랑콜리”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우울함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졌으나 결국 빠진 것은 종합이다. 그 결과 혼돈의 영역이 되었다.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은 공감이며, 두 번째 목적은 질서다.” 단순한 일반화가 아닌 경험론에 기초한 질서. 솔로몬이 이 방대하고도 난해한 작업을 독자에게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려줄 수 있었던 힘은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믿음에서 나온다. 우울증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작업이 무엇보다도 저자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또 다른 가치가 있다.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