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작별을 위한 준비

 

 

한편을 떠나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짧은 가을 방학을 보내고 오랜만에 편지를 띄웁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날씨로 계절의 구분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지난 주 엄청난 뉴스가 있었지요.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 말이에요. ?????
세계문학팀 동료들이 노벨상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을 때 저는 다른 일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어요. 교정지를 앞에 두고 문학팀 쪽으로 한눈팔지 않으려 애썼지만 발표의 순간은 역시 기다려졌습니다. 7시 57분, 58분, 59분…… 59분 48초, 53초…… 까지 모두가 숨죽이다…… 한 박자 늦은 깨달음 뒤, 모두의 입에서 놀라움과 기쁨과 감격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답니다.
이런 경사에 보통 결심으로 일할 수 없죠. 완전히 붕 떠 버린 마음을 편히 놓아주고자 편집부 책장 한 켠에 꽂혀 있던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어 들고(작가님 서명본☺️) 곧장 집을 향했습니다. 출판계와 문화계, 아니 우리 사회 전체에 퍼진 조용한 흥분감과 달리, 밤늦게 펼친 소설 첫 장은 새하얀 벽지에 수백 개의 가시를 짓누르는 듯한 서늘함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폭염의 밤, 아스팔트의 열풍을 맞으며 텅 빈 집으로 걸어 돌아와 찬물 샤워를 하는 내가 있다. 밤마다 위아래 집과 옆집에서 에어컨을 켜기 때문에, 실외기들이 토해내는 뜨거운 바람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으려면 베란다 문과 창문들을 모두 닫아야 한다. 밀폐된 습식 사우나 같은 거실에서, 방금 끼얹은 냉수의 서늘함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책상 앞에 않는다. 거기 올려놓은, 여전히 수신인이 정해지지 않은 유서를 봉투째 찢어버린다.
처음부터 다시 써.
그건 언제나 옳은 주문(呪文)이다.
처음부터 나는 다시 쓴다.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비 오듯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다시 찬물 샤워를 하고 책상으로 돌아온다. 조금 전에 쓴 형편없는 것을 다시 찢어버린다.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물잔에 빠뜨린 각설탕처럼 내 사적인 삶이 막 부스러지기 시작하던 지난해의 여름, 이후의 진짜 작별들이 아직 전조에 불과했던 시기에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진눈깨비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눈-여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며칠 사이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해서일까요. 주인공을 조용히 따라가기에 앞서 단어 하나하나에 긴장하게 됩니다. 미리 써 둔 유서, 아직 보내지 않은 작별인사를 제대로 고쳐 쓰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내 인생에 그토록 치열하게 보낼 것이 있을까?’
‘끝끝내 다 파헤치고서 보내야 할 것이 있을까?’
이렇게 전 세계가 한강의 세계에 다가가는 현실에서 한편 편집부에서는……
정말 작별 인사를 드릴 일이 있어요.
이 편지는 제가 한편 편집자로서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쉼’ 호를 내고 정말 쉼을 하러 가게 되었거든요.?
어쩜 사람은 변하지 않는가?
116번째 편지에 ‘덕질로 삶을 충전하는 편집자’?로 첫 코멘트를 싣고서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편집부에 있는 동안 몇 권의 책을 만들고, 직접 만든 책으로 여러 독자분과 만나 웃고 떠들고 감동 받고, 한편의 편지도 모양을 바꿔 보는 등 여러 재미난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었어요. 
오늘 237번째 편지에서는 민음사에서 《한편》과 탐구를 편집한 미선으로 인사드리려 합니다. 구독자 한 분 한 분을 뵙지는 못했지만 매주 편지로 안부를 묻다 보니 오래 알던 누군가와 작별하는 기분이 드네요…! 다른 한편 우리는 책을 통해 연결된 사이이기도 하니, 어딘가에서 뵐 날또 있겠지요? 그때 한편의 편지 구독자로서 그간의 편지에 화답해 주신다면 너무나 기쁘겠습니다.?
사무실을 떠나는 전날까지(real로……) 작업한, 그리고 마감한! 새로운 탐구 시리즈 출간 예고 소식도 덧붙입니다. 지난여름 뉴스레터로 사전 연재한 이민주 활동가의 『페미사냥』이 11월 초 발매될 예정이어요. 최근 몇 년간 계속된 집게손 논란,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조차 ‘페미’ 여부를 묻는 이 혼란한 현실에 갈피를 잡고 싶다면 단연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입니다!!
겪은 이들을 결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하는 사건이 있다. 2016년 게임 「클로저스」의 배급사 넥슨이, ‘메갈’을 자르라는 남성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여성 성우를 해고한 일이 내게는 그랬다.
사건이 일어난 때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이를 둘러싼 문화에 흠뻑 빠진 ‘서브컬처 오타쿠’다. 동시에 소셜미디어 트위(현재 X)에 거주하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나는 자주 농담조로 “나를 사회화시킨 건 팔 할이 남성향 미소녀이니 늘 머리에 힘을 주고 살아야 해.”라고 되뇐다. 어려서부터 서브컬처 오타쿠로서 나는 오타쿠 남성의 심리적·성적 만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가상 세계의 여성에 심취해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페미니스트로서 그 세계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늘 의식하며 지냈다.
세계를 구하는 미소녀를 반평생 사랑하며 살아온 내가 게임 「클로저스」를 시작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클로저스」는 캐릭터와 배경을 실사 같은 형태가 아닌 투디 만화 캐릭터처럼 구현한 카툰 렌더링 효과, 일본 라이트노벨과 소년만화 풍의 
서사·캐릭터가 특징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서브컬처 장르의 전형이었다. 나는 내게 익숙한 문화를 근미래 서울을 배경으로 한국화한 이 게임이 좋았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화에 어린 여성의 성적 노출과 포르노적 연출, 남성이 여성을 성희롱
하는 장면 등 장르 특유의 끔찍한 여성혐오가 그대로 구현된 점과 수시로 부대꼈다.
당시 트위터에서는 소위 ‘빻은’ 것을 소비하여 존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널리 공감을 샀다. 동시대 많은 페미니스트가 소비에 있어 욕망과 신념을 조율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들이 자신이 오랫동안 즐겨 온 (2010년대 유행한 남성 중심의 범죄 느와르, 스릴러, 액션 영화 내 여성혐오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나 ‘남돌’(남자아이돌), BL(Boy’s Love의 약칭, 남성 간 동성애를 다루는 서브컬처 장르)불매함으로써 남성 일색의 문화시장을 바꾸겠다고 선언할 때 내 마음은 복잡했다. 사실 「클로저스」 팬덤은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에선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는데, 아는 사람들에겐 개선할 가치도 없이 빻아서였고 대부분은 존재조차 몰라서였다. 과연 그렇게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클로저스」를 하면서 페미니스트로서 개입과 자정
이 가능할까?
그러나 서브컬처 문화 안에도 여성 창작자와 여성 소비자는 어김없이 있다. 나는 그들의 가능성을 믿고 사랑했다. 의구심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매와 구매, 소비자 건의를 통해 기업에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시장에서의 역량이 우리의 뒷배고 힘이리라 믿었다. 이 문화를 소비하는 우리가 조금씩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 낙관은 성우 교체를 알리는 게임사의 공지를 읽었을 때 사라졌다. 이후로 나는 이 상실을 오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이민주, 「페미사냥을 고발한다」,
『페미사냥』(근간) 중에서
“겪은 이들을 결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하는 사건이 있다. …… 이후로 나는 이 상실을 오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작별하지 않는다’와 ‘상실’이라니. 미선 편집자의 작별 편지가 의미심장하군요. 마감으로 덩달아 바빴던 며칠. 차분하게 작별을 준비하기 위해(아직 작별하지 못한다) 오늘 책갈피에는 ‘이별의 곡’을 폴리니 연주로 띄워요. 쇼팽을 오래 연주했던 폴리니를 지금 콘서트장에서 만날 수는 없지만, 그의 녹음은 이렇게 늘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거죠.
마지막 편지…… 역시 아직 실감이 나지 않네요. 이별, 상실, 달라질 것과 그대로일 것…… 대비할 수도 없고 그저 오래도록 알아 가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작별을 앞두고 『유한함에 관하여―유머가 가득한 이별』을 다시 살펴봤어요. 고백하자면 1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 책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요. 다시 살펴보니 간간이 웃기고, 늙어감과 죽음과 상실에 대한 유머가 대단하고(‘남은 이[齒]들과의 이별’이라니!),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아직 어렴풋하기도 하네요. 그간 어떤 종류의 작별들을 겪었고…… 그걸 여전히 받아들이는 중이라 그런가 싶어요. 이번에도 그렇겠지요.  
남은 것 
사람은 얼마나 단순해져야 하는가, 가을이 내던져 버린 모든 것을, 
열매가 맺힌 후 잎의 다양함을 알아보려면. 
수북이 쌓인 낙엽. 단 하나의 잎. 메말라 가면서 그것은 환희에 찬 모습으로
한껏 팔을 벌리고 몸을 말며 법열(法悅) 속에서 굳어 간다. 온갖 갈라진 균열, 
부챗살 모양을 만들며. 희미한 그림자를 던지는 날카로운 모서리들. 
녹색은 잊혀 불그레해지고, 썩어 가는 사과, 배, 벌레 먹은 자두 들과 하나가 된다. 
잎들이 계속 떨어진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그것들은 갈지자를 그리며 떨어진다.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 멈칫거리다
동료들에 합류하거나 홀로 떨어진다. 그리하여 나무와 가지는 벌거벗은 채 첫서리를 기다린다. 이제는 오로지 정물(靜物)들만이 남았다. 
나는 몸을 숙여 읽기를 배운다. 아무 글도 적혀 있지 않은 잎은 없는 법.
학생 시절 나는 부채꼴 마로니에 잎에 아이헨도르프가 남긴 시 한 편을 
외울 수 있었지. 
하트 모양 잎들엔 트라클의 발자국이 남아 있고, 
그 발자국은 한 글자 한 글자 엄숙한 정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지, 
낯선 자, 그가 꿈속에서 제바스티안을 만나는 그곳으로.
  비밀들은 이제 헐값에 주고받는 것. 더 이상 고통스러운 질문도 없다. 
단풍나무가 옷을 벗었을 때, 더듬거리는 사랑의 소린 요란했었지. 
은유는 염가 대매출. 소설의 서두, 마지막 줄, 
하나의 선언이 소리 높여 외치네. 헛되고! 헛되도다! 
아이처럼 옹알거리는 기도. 간명하고 결정적인 것. 
문장 중간에 중단되는 것. 끝나지 않은 편지들. 
저주와 증오의 노래, 오랫동안 찾던 각운을 책갈피 속에 새겨 넣었지. 
줄거리 하나가 떠오르고 있어. 포플러 낙엽으로부터 전개되는
범죄 이야기인데, 그 결말은 아직 허공 속을 떠다니고 있어.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가을의 입 냄새가 감돌지.
― 귄터 그라스, 장희창 옮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라지만, 작별은 언제나 섭섭하군요. 최근 개인적으로 겪은 작별과 만남의 경험은 이런 것인데요. 며칠 전에 아기를 낳아 이제 막 집에 데려왔어요. 몇 달을 기다려 왔던 새로운 사람을 만나 행복하고 즐거운 와중에 문득 쓸쓸한 느낌이 들었어요. 내 배 속에 데리고 있던, 계속 함께했던 그 존재가 이제는 없다는 게 허전하기도 해서요. 이렇게 쓸쓸하고 기쁜 작별이자 만남의 순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쓰다 보니 같이 일하던 동료가 떠날 때도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더는 일터에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새로이 만날 수 있으니까요.
미선 편집자가 마지막까지 열심히 만든 책 『페미사냥』은 또한 제가 적으나마 동료 편집자로서 함께한 부분이 있어 더욱 자랑스럽고 뿌듯한 책인데요. 이 책의 출간 소식을 기다리셨을 많은 분들, 그리고 앞으로 이 책을 만나게 되실 많은 독자 분들께 자신 있게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통해 몇 년에 걸쳐 지긋지긋하게 되풀이되고 있는 페미니즘 낙인찍기 놀이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대항할 언어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함께 궁리하면 좋겠습니다.
매년 10월이면 어려워도 ‘노벨 문학상 받은 작품이니까.’라며 낯선 문체, 낯선 전개 그리고 낯선 나라의 이야기와 이름들을 두고 씨름하곤 했어요. 그런데 올해는 다른 나라의 독자들이 각자의 언어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받을 충격을,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먼 타국에서 일어난 역사의 반복에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면서도 한국의 지명과 이름 번역된 사투리들을 어렵게 발음하며 더듬더듬 읽어갈 모습을 떠올리니 어쩐지 짜릿한 기분이 드네요.

저는 작별을 잘 하는 사람은 아닌데요, 작별을 너무 슬퍼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작별을 잘 실감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아요. 결국 눈에서 멀어지면서 멀어진 인연들이 많기는 하지만 계속될 인연이라면 작별 후에도 새롭게 만날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미선과의 작별도 어쩐지 ‘끝’이 아닐 것 같은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다시 새로운 모양으로 함께 할 어느날을 기대하며. 미선의 ‘쉼’과 ‘시작’을 응원해요!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거야? 

(…)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앞문 너머로 보이는 숲의 아래쪽이 거의 검어졌다. 눈에 덮여 둥글고 부슬부슬한 윤곽선을 새로 얻은 나무 밑동들이 박명 속에 희미하게 빛났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흑백요리사로 점철되었던 3주간의 도파민이 10월 10일을 기점으로 사라졌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보다 더한 도파민이 있을까요…? 아직도 발표 당일 저녁을 생각하면 온몸이 찌릿하고 벅찬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다들 같은 마음을 느끼셨겠죠?
촬영할 때는 오디오에 방해되지 않게 현장 모니터링을 하면서도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요. 작가님의 이름을 인지한 순간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이브 영상을 다시 돌려 보니 정말 시끄럽더라고요.? (이 자릴 빌려 구독자 선생님들께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도 역사에 길이 남을 발표 순간을 여러분과 실시간으로 나눌 수 있어 기뻤어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독서 붐은 온다! 노벨 문학상의 기세(?)가 영원하기를!
선유도서관과 함께하는 한편 읽기는 계속됩니다.
오늘 오전 9시 30분부터 ‘대학’ 호 모임 여기서 신청 받아요.??
10월 24일 목요일! 네 명의 저자가 둘러앉아 ‘나’에 관해 대화하는 북콘서트에 초대합니다.
?‍♀️ 저번 세영 편집자의 발간사부터 미선 편집자의 레터까지 독립에 대한 생각이 팝콘처럼 팡팡 터지는 나날입니다. 쾌락 독립이란 화두가 엄청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예전에 타인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자족적으로 외로움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다스리는 기술을 연마(?)해 보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때 가장 효과적이었던 수련법은 사찰에 머무르는 거였어요. 매일 규칙적인 루틴으로 생활하면서 명상과 사찰 음식으로 마음과 몸을 건강하게 했더니 성난 외로움이 좀 유순해졌던 경험을 했어요. 연대, 연립, 함께하기의 기술들 못지 않게 다양한 독립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