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그렇게 축축하던 여름은 어디 가고, 거짓말처럼 건조해진 아침저녁 공기에 당황하고 있는 9월 첫 주입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은 역시 좋지만요. 여러분은 새로운 달 어떻게 맞이하고 계세요?
저는 지난 주 기다리고 기다리던 벽돌책을 받아 한결 기분이 좋아요. 사르트르 선생을 여름 동반자로 꼽았던 꼭 두 달 반 전의 편지, 기억하실까요? 과거의 저는 “마감 후 도서전에서 무사히 뵙”자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했었군요. 일주일은커녕 몇 주에 몇 주가 더 걸렸지만 기어이 끝을 본 『존재와 무』와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드디어 실물로 찾아왔어요.
교정 노동이 힘에 부칠 때마다 표지만 보면서 버? 민음사의 나른좌황일선 디자이너님께서 멋지게 디자인해 주셨답니다. ?
벽돌책 실물과 만난 유상훈 편집자님께서 멋진 옆태 샷을 남겨 주셨어요. 책등 디자인도 멋있죠? 다만 두께는 정말 폭력적이군요…?
『존재와 무』가 사르트르를 실존주의 사상가로 우뚝 세운 대표작이라면,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그보다 인지도는 살짝 떨어지나 『존재와 무』 이후 사르트르의 사상을 집약한 묵직한 작업물이에요. 저번 편지에서도 밝힌바 이 책에는 세계대전에 참전한 사르트르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온몸으로 느낀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성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요.
사르트르에게 또한 따라 붙는 수식어는 ‘실천하는 지식인’, ‘마르크스주의자’ 등인데요. 독일의 프랑스 점령 시기에 레지스탕트 운동을 전개하거나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끊임없이 의견을 개진한 것, 자국의 알제리 침략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점 등도 대단하지만, 이러한 정치 활동에서 겪은 처절한 패배와 깨달음을 자신의 사상에 다시 적용해 인간이라는 고독한 존재의 위치를 재설정할 시도를 한 점이 특히 놀라워요.
‘사르트르는 정말 실천하는 학자였구나. 21세기에 이런 실천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반세기도 더 된 사르트르의 성찰을 지금 우리가 다시 볼 이유는 무엇일까?’ 808쪽 짜리 벽돌책을 편집한 이후 난생 처음 본(심지어 만들어버린) 도합 2212쪽 짜리 벽돌책… 사르트르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 이제는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여러분과도 만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거꾸로 『존재와 무』를 향하면서…
인간실재가 자신을 고립시키는 무를 분비하는 가능성에 대해 데카르트는 스토아학파를 따라 이름을 하나 붙여 주었다. 그것이 바로 자유(liberté)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자유는 그저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이 문제에 깊이 파고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런 대답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만일 무가 인간실재에 의해 세계 속에 도래해야 한다면, 과연 인간의 자유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자유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기란 아직 불가능하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에서 자유는 우리가 따로 떼 내어 고찰하고 서술할 수 있는 인간 영혼이 지닌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우리가 규정하려 하는 것은 무의 출현을 조건 짓는 인간의 존재이다. 그리고 이 존재는 우리에게 자유로서 나타났다. 이렇듯 무의 무화작용에 요구되는 조건으로서의 자유는 다른 여러 속성 중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에 속하는 하나의 속성(propriété)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에게 있어 실존과 본질의 관계는 세계 속의 사물에 있어서의 그 관계와 유사하지 않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선행하며, 인간의 본질을 가능케 한다. 인간 존재의 본질은 인간의 자유 속에서 정지 상태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을 인간실재의 존재(l’être de la réalité-humaine)와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자유로움(être libre)”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인간 존재를 엄밀하게 해명한 뒤에라야 남김없이 다룰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무의 문제와 연결해서 다루어야 하고, 자유가 철저하게 무의 나타남을 조건짓는 한에서 자유를 다루어야 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두께의 책 세 권 실물을 보고 놀라고 말았어요. 이런 책을 쓰고 옮기고 엮고 가다듬은, 여기 연루된 모든 이들에게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듭니다. 마침 배본하는 날 회사에 갔다가 “책, 가져갈래?” 물어보던 미선과 새벽 편집자에게 다음 일정이 있어서 무거워 못 들고 가겠다고 거절했던 일도 떠올라 또다시 미안하군요…… ?
날씨가 아침저녁으로 무척 선선해져서 그럴까요? 일주일 새에 이런 벽돌책도 한번 읽어 볼까 싶은 가벼운 마음도 드는데요. 두께와 명성에 압도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 그냥 책일 뿐이니, 우선 곁에 두면서 한 장 떠들어 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올가을에는 사르트르와 함께, 어떠세요?
여러분은 그런데 보통 언제 책을 읽으세요? 저는 요즘 통 낮에는 시간이 나지 않아, 아이를 재우고 집안일을 정리하고 나서 밤에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을 시간이 나는데요. 제목부터 밤에 어울리는 에세이를 읽고 있어요. 번역을 하고 낭독을 사랑하는 저자가 쓴 첫 책입니다. 편지에 대한 아래 부분을 읽으며 최근 누구에게 편지를 썼더라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여러분께 썼던 편지, 이 뉴스레터였던 것이에요!
편지의 본질은 시차다. 대면하지 않기에 상상의 여지와 오해의 여지가 동시에 발생하는 일탈적 매체. 편지는 결코 개별적 주체 간의 대화가 아니며, 리얼리티가 아닌 해석의 산물이다.
사랑이 언어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면, 편지는 사랑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다면, 편지의 담론 또한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다. 편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러나 부재하는 이를 향해, 부재를 인식하며 표명되는 사랑의 담론이다.
당신이 이 편지를 열어볼 때쯤이면 나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계절이 변할 수도 있을까요? 어떤 마음은 닿는 데 너무 오래 걸립니다. 당신은 멀리 있고, 나와 당신은 만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요. ‘대면’이라니, 당신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지 너무나 오래되었네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편지는 바로 이런 순간에 쓰입니다. 거리-감이 없다면, 편지는 쓰일 수 없을 테지요.
― 최리외,
『밤이 아닌데도 밤이 되는』 30~31쪽에서
폭력적인 두께의 책을 쓰다듬으며…… 발췌해 주신 부분을 계속해서 읽고 있어요. 무의 출현을 조건 짓는 인간의 존재…… 자유…… 저는 주말 동안 또 하나의 회고록을 읽었는데요. 제목이 무려 ‘자유’입니다. 부제는 ‘가장 고립된 나라에서 내가 배운 것’이에요. 저자 레아 이피는 ‘유럽의 북한’이라 불릴 만큼 고립되었던 알바니아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교육받으며 자라는데요. 『자유』는 저자가 1990년대 공산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겪으며 느낀 혼란과 ‘자유’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담은 책이에요.
어린 시절 너무나 자유롭게 느껴져서 종종 자유를 버겁다고 생각했던 저자는 자신을 둘러싼 이데올로기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1990년에 이르러서야 아빠, 엄마, 할머니가 생각한 자유의 의미와 갈망하는 자유로운 상태가 서로 달랐음을 알게 돼요. 그리고 마침내 ‘자유’를 맞은 가족들은 이상과 현실의 커다란 차이에 직면합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랬던 것처럼요. 당의 선의와 자비에 의지해야 했던 상황에서는 벗어났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또 다른 형태의 강압을 맞닥뜨린 거예요.
“아빠는 상황을 바꾸고 싶었지만, 자신이 할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군가 그 생김새를 채 이해하기도 전에, 세계는 이미 확실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도덕적 명령과 개인의 신념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에게 이런 말을 하라고, 또 어디로 가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익을 고려하고 비용을 저울질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무언가를 말해야 하고 어딘가에 가 있어야 했다.”
더 이상 ‘잘못된 사회’를 탓할 수도, ‘옳은 사회’의 이름을 댈 수도 없게 된 가족들은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저마다 자유롭고자 합니다. 그러는 동안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홀로 투쟁하며 외로움에 빠지기도 하고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유’와 ‘실천’을 결코 떼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부모님이 탈출하려던 세계와 지금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의 투쟁과 실패를 이해하기 위해 마르크스 철학을 공부하기로 한 레아 이피의 결심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고요. 이렇게 다시 사르트르와 연결되며…… 저자가 헌사에서 이름을 밝히고 있는 그의 할머니 레만 리피는 자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할머니는 내가 당신의 궤적을 기억하기를 원했고, 당신이 당신 삶의 저자임을 이해해 주기를 원했다. 도중에 맞닥뜨렸던 그 모든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당신의 운명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할머니는 책임지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자유란, 필연을 의식하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