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나만의 소파에서 책 읽기

 

 

책에 파묻혀 여름 나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여러분은 주로 어디서 책을 읽으시나요? 저는 최근 길에서 발을 삐끗해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지난 연말파티 1등 경품으로 받은 일인 소파에 폭 파묻혀 밀린 책을 보고 있어요. 사무실 책상이나 출퇴근길, 길바닥(…)이 아니면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강제 소파 독서 덕에 활자 보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네요. ?
제가 요즘 보는 책은 다음 달 출간될 《한편》 15호 ‘독립’ 참고 도서들이에요. 독립이라는 키워드로 어떤 글을 청탁할까 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제 안의 ‘독립 전쟁’이라는 개념을 업데이트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세계대전 직후의 독립 운동로부터 약 한 세기 동안 수많은 운동과 분쟁과 전쟁이 벌어졌죠.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고요. 오늘날 같은 세계화 시대에 한 국가, 한 민족의 독립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독립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관한 신간들을 보며 한없이 우울해졌다가, 시민단체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에게 추천받은 아래 책을 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작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에라리온, 기니와 인접한 서남아프리카 국가 라이베리아. 다른 부족에 대한 학살로 이어진 내전으로 인해 밖에서는 죽음의 위협에, 안에서는 가정 폭력의 고통에 노출되었으나 ‘평화건설자’로서 자신을 바로세운 활동가 레이마 그보위의 이야기입니다.
THRP(Trauma Healing and Reconciliation Program)의 프로그램은 심리 치료와 비슷했다. 내전을 겪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집단 토론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얘기를 털어놓게 함으로써 지금의 상태와 당면 문제들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그 후엔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갈등해소법을 가르쳐 주었다.
“당신들은 지금 어떤 갈등을 겪고 있나요?”
“평화란 무엇일까요?”
“당신들의 방언이나 문화에선 평화를 어떻게 정의하죠?”
“당신들 마을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 문제는 뭔가요?”
“라이베리아의 갈등 원인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당신들 문화에서는 갈등을 풀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나요?”
그런데 이것은 보스니아 같은 유럽 지역에서나 활용하던 방식이다. 라이베리아의 상황에 맞게 바꾸는 것이 필요했다. 전국 각지의 지도자들과 단체를 가려내어 그들에게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요령을 알려 주기도 했다. 사람들과 지역사회가 스스로 치유하도록 도움으로써 분열과 고통에 시달리는 라이베리아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나에게 있어서 THRP 자원 신청은 평화건설자의 길로 가는 입문 과정이었다. 사실 평화 건설이란 평화를 위해 협상하고 조정하고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다. 내 관점에서 평화 건설이란 두 대립 세력의 중간에 개입하여 싸움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쟁 피해자들을 치유하고 기운을 되찾아 주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전쟁 피해자들이 인간애를 되찾아 다시금 사회의 생산적인 일원이 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총을 들지 않고도 갈등의 해소가 가능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평화 건설이다. 요컨대 한때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던 사회를 치유하여 그들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이다.
― 레이마 그보위, 정미나 옮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처참한 폭격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그래서 종전 협정은 언제 하는 거야?’라는 결론 아닌 결론을 원하게 되는데요. “1995년 여름, 찰스 테일러의 라이베리아 민족애국전선을 비롯한 교전 파벌들이 또 한차례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전쟁이 터지고 벌써 열세 번째 평화 협정이었다.”(103쪽)이라는 문장을 보고 이것이 얼마나 성급한 바람인지를 알게 되었어요.
개인을 넘어 민족과 국가의 역사가 얽힌 전쟁에서 나의 생사를 대리인에게 맡긴 채 어떻게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지. “수많은 자원과 연결망이 독립한 개체를 지탱하고 있을 때, 독립을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라는 15호의 기획 취지에 비추어 여러 수준에서 독립의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 동료 편집자, 필자 선생님에게 기대어 가면서요……
“전쟁이 터지고 벌써 열세 번째 평화 협정이었다.” 아아…… ‘평화 협정’과 ‘평화 건설’은 다른 거네요. 전쟁 피해자에게 기운을 되찾아 주려면 얼마나 많이 마음을 써야 할까요? 미선 편집자님의 기획 노트에서 알게 된 정문태 전선기자는 아체 쓰나미로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아이들을 10년 만에 찾아 나섰던데요. 아이들의 평안을 바라며 이분이 무슨 일을 하기로 다짐했는지는 기사 끝에서 읽어 주세요. ?
강자와 약자의 싸움 속에서 나 자신을 어떻게 되찾는가? 우리의 주제 ‘독립’으로 들어가는 이 질문을 생각하며 백제부흥운동을 들여다봤죠. 최시한 소설 『별빛 사윌 때』는 이미 망한 백제 사람인 ‘물참’의 이야기를 그리는데요. 백제부흥운동은 참담하게 실패했고, 신라와 당나라의 꿍꿍이를 알 수 없는 가운데 물참이는 아주 헤매요. 그때는 신문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어서 자신이 7년이나 계속될 나당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고…… 
“백제 사람이 고구려 사람과 손잡기를 바란 까닭은, 둘의 적이 당과 신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 부흥군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신라와 먼저 손을 잡고 말았다. 당을 물리치기 위해 적과 연합한 것이다. 나당 간의 전쟁은 지금 신라 혼자서만 싸우지도 않는 데다 백강 남쪽에 아울러 요동에서까지 벌어지고 있다. 도독부한테 도독성을 빼앗은 고구려 부흥군도 내일 신라군과 만난다고 한다. 이번 싸움은 어쩐지 나당 간에 땅을 뺏는 국경 분쟁에 그치지 않으며 두 나라만의 이해관계도 넘어서는, 이제껏 일어난 싸움들과는 다른 전쟁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렇다면 백제는, 당나라의 도독부 허울을 강제로 뒤집어쓰고 있는 백제 사람은, 지금 어찌해야 마땅한가?” 최시한,  『별빛 사윌 때』 중에서
물참이가 친구, 스승님, 어머니, 형님, 종, 백제 귀족, 고구려 성주, 신라 장군까지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또 자신에게 침잠한 끝에 하나의 뜻을 세우는 건 익숙한 성장 소설의 구조인데요. 이 소설을 읽고 생각하는 건, 강자에 저항하는 약자가 반드시 얻게 되는 고통이에요. 이 고통으로 망가진 사람을 만약 평화건설자가 돕는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 어떤 마음을 먹어야 그에 발맞출 수 있을까요? 물참이는 이 부분에서 넘나 주인공답게 의지가 굳세었기에 보통 사람이 따라 하기가 참…….
새벽이 옛 사람의 전쟁을 다룬 소설을 읽고 강자와의 싸움에서 약자가 반드시 얻게 되는 고통을 생각했다고 했는데요. 저는 저번 편지에 한 독자 님이 남긴 코멘트에도 마침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어요. 또한 같은 분이 함께 남긴 여자와 어머니, 아이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고민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건 제가 너무 추측한 것일까요? 
무엇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하긴 어렵겠지만, 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목소리, 얼굴 하나하나를 대면할 때 또한 생각의 한 면이 트일 수도 있겠지요. 임신 중절을 결정하고 경험한 뒤, 또 여러 아이를 낳아 키우기도 했던 여성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는 것이 함께 고민해 보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아래 글을 소개해 드려요. SF와 환상 문학 등 장르 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어슐러 르 귄이 자신의 임신 중절 경험을 고백하고 왜 이 결정을 왜 후회하지 않는지 이야기한 1980년대에 발표한 연설문의 일부입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부잣집 아들딸인 철부지 왕자와 공주가 만나 사랑을 나누었지만 피임에 대한 무지로 아기가 생기고, 왕자는 책임을 회피하는데요……. 르 귄은 공주가 ‘어떤’ 책임을 지게 되는지 이야기합니다.

 

“넌 나와 같은 종교가 아니잖아. 게다가 어쨌든 그건 네 아기야.” 왕자는 그렇게 말하고 브루클린 하이츠로 돌아갔어요. 공주는 집으로 돌아가서, 결국 부모님도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게 될 정도로 심하게 울었죠. 부모님은 알고 나서 말했어요. 

“괜찮아, 괜찮아, 아가야. 그 남자가 너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너도 아기를 낳을 필요가 없어.”

자, 여러분도 암흑시대에는 낙태가 합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겠죠. 당시에 낙태는 범죄였고, 심지어 중범죄였어요. (……) 그렇지만 이제 그 분들은 주저없이 법을 어기고, 중죄를 저지르기로 결심했죠. 그것도 이게 옳고, 이렇게 하는 게 우리의 책임이라는 조리 있고 깊이 있는 믿음 속에서요.

정작 공주는 그 결정에 대해 고민했어요. 물론 법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윤리적으로요. 공주는 좀 더 울고 나서 말했죠. “난 비겁하게 굴고 있어. 내가 한 행동의 결과를 피하고 있어.” 

그러자 공주의 아버지가 말했어요. “맞다. 그래. 하지만 그 비겁함, 그 부정직함, 그 회피가 아무도 원치 않는 아이를 낳기 위해 네 훈련과 네 재능, 그리고 네가 나중에 원할 아이들을 희생하는 어리석은 무책임보다는 낫다.”

(……)

공주는 A. B. 를 받고 몇 달 후에 B. A.(학사 학위)를 받은 후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 후에는 결혼을 했고, 작가로 살았으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네 번 임신했어요. 한 번은 석 달 만에 유산했고, 세 번은 정상적으로 출산했지요. 그래서 원하고 사랑하는 아이를 셋 두었어요. 첫 번째 임신을 끝내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세 아이를요. 

생명의 권리를 외치는 낙태 반대자들이 주장하듯이 어떤 탄생이라도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낫고, 더 많은 탄생이 적은 탄생보다 낫다면, 그 사람들도 하나가 아니라 셋을 낳은 내 낙태 결정에 찬성해야 마땅해요. 그 사람들의 목적을 이루는 기발하고 논리적인 방법이잖아요! 하지만 생명 보존이란 임신 중단 반대 세력의 진짜 목적이 아니라 슬로건에 불과해 보이는군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통제예요. 행동에 대한 통제.

(……)

제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 제 옛날 이야기를 왜 했을까요? 이야기 속에서 저 자신을 공주라고 부른 건 반쯤은 농담이고, 실제로 제 부모님의 영혼은 왕족이나 다름없어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자신에게, 또 여러분에게 저는 특권층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저는 ˝뉴욕 시 최고의 낙태˝를 받았습니다. 낙태가 범죄였던 암흑시대에, 저희 아버지처럼 현금을 빌릴 방법이 없는 아버지를 둔 젊은 여성은 어땠을까요? 아니, 아버지가 수치심과 분노에 미쳐 버릴 게 뻔해서 말조차 꺼낼 수없던 여성에게는 어땠을까요?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여성은요? 지저분한 방에 혼자 가서, 직업 범죄자의 손에 몸과 영혼을 맡겨야 했던 이들은요? 착취자였든, 이상가였든 간에 당시에 낙태를 하는 의사는 모두 직업 범죄자였으니 말이죠! 여러분은 그 여성이 어땠을지 알아요.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알죠.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겁니다. 우리는 그 암흑시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우리는 이 나라의 누구도, 어떤 여성에게도 그런 힘을 행사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 어슐러 K. 르 귄, 이수현 옮김, 「어느 공주 이야기」, 

『세상 끝에서 춤추다』 중에서

지난 봄 서울 선유도서관과 진행한 《한편》 읽기 프로그램 시즌2가 곧 열린답니다.
바로 오늘 오전 9시 이곳에서 신청 받아요! ?‍♀️
?‍?️ 저한테는 페미니즘이 어렵습니다. 왜 물고기는 물살이라고 하면서… 낙태법은 긍정을 하는 걸까요? 저는 여성이고 아직 미혼인데, 제가 생각하기에 페미니즘은 여성 자신에 대한 자립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립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아슬아슬하게 하는 것 같아요. 그 흔하게 돌아다니는 말 중에, 여자는 어머니이기 전에 여자이다인가요? 그 말에서 아니, 그럼, 어머니로서 갖추어야할 덕목을 빼고 아이를 대하게 되면 그 아이는 어떻게 해야하지? 그 아이는 다정다감한 엄마와 아빠를 갖고 싶어하지 말아야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페미니즘을 어떻게 알고,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번 글에 연결이라는 단어를 쓰셨는데요. 그 연결이 사회적인 강자와 약자 사이에도 가능한 건지 묻고 싶습니다. 같은 위치에서-물론 개성이 다르지만요-서로 연결이 되고 말고는 이해와 경청에서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 정말 날씨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나날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일상에서 나누는 날씨 이야기와 공론장에서 다뤄지는 기후 이야기 사이 거리가 꽤 멀어 보이기도 합니다. 이 간극을 좁히는 데 ‘연결된 삶’의 구체적 경험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해양 포유류 수습생’이라니… 은연중에 ‘연결된 삶’을 논하는 책이 익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비수처럼 꽂히는 표현이었어요. 바다 수온이 엄청나게 상승했다고 하던데… 바닷속 이웃들은 어떤 여름을 보내고 있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여름 별미 우뭇가사리 콩물. 저는 소금파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