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입니다.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하는 가곡 <4월의 노래>가 떠오르네요. “아아 멀리 떠나온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이 노래 다들 아시나요?
지난 주말에 저는 통영에 다녀왔죠. 친구 동료들과 함께 가서 통영국제음악제 공연들을 봤어요. 공연 사이에는 이름 없는 항구를 걸으면서 책 만드는 일에 답이 없고 출구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러고 다시 공연에 들어가서 감동하구요. 별수 있나요. 돌아와서는 공연 감상을 나누면서 밤새 얘기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본 공연은 김일구 명창의 <적벽가>. 삼국지는 잘 모르는데 그동안 내가 『유비 평전』『한서 열전』 등의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책 속에 들어 있던 유 황숙과 미 부인(감 부인과 함께 유일한 여성 등장인물)과 아두와 조운의 이야기 같은 게 기억났네요.
일찍일어나는새 티켓팅으로 1열 정중앙에 앉아서 명창과 호흡하면서 가장 와닿았던 대목은 적벽 싸움을 앞둔 위나라 군사들의 <군사 설움 타령>이었어요. 이 타령은 소설에는 없는 판소리 오리지널 콘텐츠인데, 판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이입할 구석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기획 편지로 돌입) <군사 설움 타령>은 부모가 있는 군사, 부모가 없는 군사, 늘그막에 얻은 애를 두고 온 군사, 예쁜 아내를 두고 온 군사 등등이 자기 설움을 털어놓는 내용인데요. “네 설움은 가소롭다” “네 설움은 울 만하다” 하는 식이에요. “니 내 설움 들어봐라” “이놈 저놈 말 듣거라” 하면서 이야기 시작하는 것도 웃기구요. 책을 편집할 때 저자가 언제까지 독백을 하고 언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지를 파악하는 데 혈안인 저로서는 상대 이야기에 ‘가소롭다’ ‘울 만하다’고 말해 버리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금 만드는 새로운 시리즈에 참조하고 싶어요.
<중중머리>
“여봐라 군사들아 니 내 설움을 들어라
너희 내 설움을 들어봐라
나는 남에 오대 독신으로 열일곱에 장가들어
근 오십 장근(將近)토록 슬하일점 혈육이 없어
매일 부부 한탄했다.
우리집 마누래가 왼갖 공을 다 드릴제
명산대찰 영신당(靈神堂) 고묘총상(古廟叢祀)
석왕사(釋王寺) 석불보살 미륵님 노구마지 집짓기와
칠성불공 나한불공(羅漢佛供) 백일산제 신중마지(神衆摩旨)
가사시주(袈裟施主) 인등시주(引燈施主) 다리 권선(勸善) 길닦기,
집에 들어있는 날은 성주조왕(成主竈王) 당산천룡(堂山天龍)
중천군웅(衆天群雄)의 지신제(地神祭)를 지극 정성 드리니
공든 탑 무너지며 심든 남기가 꺾어지랴
그 달부터 태기있어 석부정부좌(席不正不坐)허고 할부정불식(割不正不食)허고
이불청음성(耳不聽淫聲) 목불시악색(目不視惡色)하야
십삭(十朔)이 점점 차드니 하루난 해복기미(解腹幾微)가 있든가 보더라
아이고 배야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
혼미(昏迷) 중에 탄생허니 딸이라도 반가울디 아들을 낳었구나
열손에다 떠받들어 땅에 뉘일 날이 전혀 없이
삼칠일이 다 지내고 오륙삭 넘어가니
방바닥에 살이 올라 터덕터덕 노는 양 빵긋 웃는 양
엄마 아빠 어루며 주야 사랑 애정(愛情)헌게 자식밖에 또 있느냐
뜻밖에 급한 난리 위국(魏國)땅 백성들아 적벽으로 싸움가자
나오너라 외난소리 아니 올 수가 없든구나
사당문 열어놓고 통곡재배(痛哭再拜) 하직헌 후
간간헌 어린 자식 유정헌 가솔(家率) 얼굴 안고
누워 등 치며 부디 이 자식을 잘 길러 나의 후사를 전해주오
생이별 하직허고 전장에를 나왔으나 언제나 내가 다시 돌아가
그립든 자식을 품안에 안고 아가 응아 어루어 볼거나
아이고 아이고 내 일이야”
<아니리>
이렇듯이 울음 우니 여러 군사 허는 말이
“자식두고 우는 정은 졸장부의 말이로다
전장에 네 죽어도 후사(後嗣)는 전켔으니
네 설움은 가소롭다”
― 판소리 <적벽가> 중에서
그래서 요즘 참고 도서는 일기들인데요. 편집자들이 다 느끼고 있는 일기 출판의 유행 속에서 말이에요. 왜 일기를 읽고 싶고 출판하고 싶고 일기들을 엮고 싶은 것인가. 일기는 물론 독백인데, 그걸 보여 주는 이유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서윤후 『쓰기 일기』에서는 일기 쓰기를 ‘밖으로 열리면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이 중얼거림 사이에는 내 삶의 풍경과 쓰기에 혼신을 다한 뒤의 심심한 독백이 담겨 있다. 어디에도 맺히지 못하고 떠도는 물방울 같기도 하고, 만져지지 않는 입김으로 내 뜨거움을 꺼내는 일이기도 하다. 쓰는 내가 어떤 순간에 완성되지 못했는지, 어떤 시간에 영원히 열리게 되었으며, 또 어떤 장면에서 혼자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는지, 그 과정의 증명이 필요했다. 불꽃들이 지펴진 자리 뒤로 남아 있는 잔불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8쪽)
일기… 일기… 출판의 유행에 힘입어 저도 3n년 인생 처음으로 3개월 일기 쓰기에 성공했어요. 그런데 일기 쓰기를 막상 실천하고 보니 저의 일기는 매일이 비슷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더라고요. 할 말이 별로 없는 날도 많고요. 그래서 이럴 거면 일기는 왜 쓰나라는 생각을 막 하던 차에 한편의 책갈피를 쓰게 됐네요.
‘내 일상 속 생각이나 감정의 패턴들이 이렇게나 단조로운 상태구나.’ 라고 인지한 것만으로도 발전인 걸까? 나는 지금 ‘일기’를 통해서도 어떤 성과를 내고 싶은 걸까? 그렇다면 일기는 나에게 쉼인가 테스크인가? 등등의 생각으로 오히려 혼란스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답니다. 일기… 일기란 뭘까요.
“일기는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가장 치열하게 듣는 행위인데, 내가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엄청난 청력이 필요하다. 고요한 공간에서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문보영, 『일기 시대』 중에서)
1년의 4분의 1이 지나 어느덧 4월. 날씨도 따뜻해졌으니 다시 몸을 일으켜야겠다 다짐하는 중이에요. 이 와중에 눈 돌릴 수 없는 이슈가 있으니 바로 다음 주 일이 된 총선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이번 선거는 정말이지…’ 팔짱 낀 채 있던 저인데요. 지난 달 《전국투표전도》 시리즈의 최신판을 선물받고 한번은 직면하자는 마음을 겨우 먹게 되었어요.
이 시리즈는 2018년 6월 지선 전 ‘이전의 선거 데이터를 돌아 보고 투표에 참여하자’는 투표 캠페인의 일환으로 기획되어 지금까지 3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부터 만 6년이 지나 나온 이번 권은 “과거의 데이터를 더이상 정리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어요. “선거 때의 이슈와 공약을 정리하는 것이 소용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가 빠르게 ‘망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라면서요.
2020년 총선 이후를 요목조목 정리한 내용을 보니 말 그대로 어쩜 이 짧은 시간에 이런 많은 일들이 벌어졌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행동 지침을 참고하자면… “그래서, 뭘 보고 투표하냐?” 부에서 저자가 제안한 질문 리스트 일부를 옮겨 봅니다. 각자의 선택을 응원해요!
“A. 정당에 투표할 때 (비례대표 국회의원)
A1. 당 구성원들이 한국 사회에 품은 문제의식을 살펴보세요.
A2. 당 공약의 세부사항보다는 공약이 품은 가치관을 살펴보세요.
A3. 당내 정치인 한두 명은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A4. 이 당이 유권자의 생각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을 떠올려보세요.
A5. 이 당이 “국회로 들어모면/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A6. 이 당은 ‘결정적인 순간’에 국회 안팎에서 어떻게 행동했나요?
A7. 아니 그런데, 이 당이 주체적으로 정치를 하긴 할 건가요?”(82쪽)
– ‘정치와 혁명의 3월’에 고개를 내민 새싹이 장하고 귀엽습니다. “일상화된 패턴을 바꿔 나가는” 방법이 무엇인지가 요즘 제 화두인데요. 한편의 편지에서 힌트를 얻은 느낌입니다. 연결과 그물망. 내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려면 나만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새기고 갑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의 전체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궁극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주권자들의 세력화 !
– 오늘도 역시나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저로서는 함께해 준 역자, 동료 편집자, 저자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은 게 중요했어요. 나와의 관계 속에서는 다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낯선 사람들 앞에서, 책을 매개로 털어놓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이 부분이 특히 공감이 돼요! 저도 친한 친구와 꾸준히 책모임을 하는데 일상적인 만남에서라면 들을 수 없고 물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답니다. 책은… 너무나.. 멋진 것.. 한편 팀 파이팅!
– 오늘 보면서 생각한건데 책 표지에 제목이 ㄱ 자 형태로 적히게된건 어디서부터 유행? 이 시작된건지
궁
금
합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