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좋아하는 친구 곁을 떠나기

 

 

‘나’를 죽이는 법
여러분이 친구와 싸운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저는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옆자리 친구와 손톱을 드러내고 싸웠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가 떠올라요. 친구의 손에 얼굴이 긁혀 피가 쭉 흘렀고, 싸움의 흔적을 본 엄마는 저를 붙들고 곧장 친구 집을 향했습니다. 어른들의 화가 무색하게도 친구와는 인형을 갖고 놀며 금방 화해해 버렸죠.
인생 첫 물리적 싸움이라는 강렬한 기억을 남긴 친구와의 연은 그후로 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끔 살벌했던 사춘기 때의 갈등도 모두 옛날 일입니다. 이런 싸움들이 직접 피를 보거나 남에게 말 못할 유치한 행동으로 변변찮은 흉터를 남겼다면, 정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은 내가 좋아했던 친구와의 다툼입니다. 좋아하는 만큼 미워하는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친구를 향한 것인지, 나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우정을 주제로 쓰기가 마치 처음 겪는 어려움이라는 듯 순진하게 굴 수는 없다. 오히려 그건 너무 많이 시도해서 질려 버린 일에 가깝다. 나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영등포구 하자센터의 ‘어딘글방’이라는 공동체에서 글쓰기를 훈련했다. 분명 모두에게 열려 있는 데도 지독하게 남자 아닌 애들만 남는 공간이었다. 어딘글방을 처음 찾아갈 무렵의 나는 섹스 아니면 강간 얘기하는 화난 여자애였다.
그곳에서 나와 같고 다른 애들을 만났다. 똑똑한 애도 순진한 애도 잘 꾸민 애도 못 꾸민 애도 예쁜 애도 예쁨 같은 것엔 관심 없는 애도 있었지만 다들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는 점만은 같았다. 그중에는 10년 후 등단 제도의 바깥에서 나타나 걸출한 에세이스트로 출판계와 독자들의 환영을 받게 되는 인물들도 있다. 그때는 그런 미래를 미처 다 알 수 없었음에도 우리는 그저 썼다. 무려 작가 되기를 원하는 사춘기 여자애들. 싱그럽고 징그러운. 그 틈바구니에 있고 싶어서 매주 강원도 봉평과 서울시 영등포구를 오갔다. 그 애들과 함께 쓰고 싶어서. (중략)
어딘글방에서 우리는 작가 되기뿐만 아니라 작가의 친구 되기도 훈련했다. 인용하는 연습뿐만 아니라 인용당하는 연습도 했다. 기꺼이 서로의 글감이 되어 줄 수 있는가? 글방에서 우정은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어떤 경험과 말에 ‘내 것’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치사하고 쩨쩨한 처사였다. 누가 나를 글에 써서 분하다면 나도 그를 글에 쓰면 된다. 공동으로 겪은 하루를 한 사람은 글로 써 오고 한 사람은 만화로 그려 오는 풍요가 글방에는 있었다. 아직 쓰이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아니다. 따라서 ‘내 이야기였어야 할 이야기’라거나 ‘내가 쓰려고 했던 이야기’라는 표현은 틀렸다. 그가 썼다면 그의 이야기인 것이다.

글방에서 좋은 작가란 너와 나라는 진부한 이분법을 탈피해 보려는 작가였다. 굵고 검은 자아의 윤곽선을 부단히 지우며 힘껏 투명해져 보려는 작가. 어설프더라도 주어 자리에 ‘너’나 ‘그’를 적어 보고 이해해 보려는 글들이 따뜻한 응원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나라는 주어, 나에 대한 관심, 나의 감정으로만 가득한 글들은 호되게 혼이 났다. 잊을 만하면 부풀어 오르는 자의식을 바늘로 찔러 터뜨리면서 우리는 자주 울었다. 자다가 울고, 쓰다가 울고, 읽다가 울고, 담배를 피우다가 울었다. 훗날에는 두고두고 긴요할 창피의 경험이었다. 나의 경계를 흐리게 하여 세계의 물이 드는 일. 그런 희석의 감각이 어린 작가들에게는 죽음과도 같이 여겨졌을 것이다. 그 죽음들 끝에 더 크고 깊고 넓어진 ‘내’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작가의 좋은 친구가 되는 원리도 같았다. 친구의 글이 칭찬받을 때 마치 내가 칭찬받기라도 한 듯 기뻐하기. 나의 경험과 언어가 너의 글의 소재가 되었을 때 얼굴 붉히지 않기. 그런 훈련은 누구에게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무던한 사람에게도 남이 받는 사랑을 생각하다가 잠 못 이루는 날은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그런 밤에는 남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모든 문장이 마치 내가 쓴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읽었다. 그처럼 쓸 수 없는 슬픔을 가눌 수 없다면 가장 정확한 해석자의 자리라도 차지하려 했다. 질투하는 만큼 칭찬해 보려고 애쓰고, 분한 만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노력해도 자신의 글이 혹평을 받는 날 학생의 마음에서는 어김없이 오래된 이분법이 들끓는다. 너이고 싶다. 내가 아니라, 너이고 싶다. 나와 너 사이에 도저히 너비를 헤아릴 수 없는 강이 도로 흐른다.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 안담, 「작가-친구-연습」,
《한편》 12호의 첫 꼭지에 실린 작가 안담의 글은 작가 되기를 꿈꾸며 강원도부터 서울까지를 오다녔던 10대 시절을 회고합니다. 글에 등장하는 ‘어딘글방’은 지금 ‘걸출한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인 1990년대생 여성 작가 여럿이 다녔던 글방이지요. ‘다들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마음만은 같은 또래 사이에서 기꺼이 ‘내 이야기’를 나누어 주는 마음은 어땠을까요?
좋아했던 친구들과의 생채기를 똑바로 마주하는 글을 보면서 오랜만에 내가 닮고 싶었던 친구, 내가 다칠 걸 알면서도 계속 옆에 있고 싶었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어요. 친구의 좋은 점을 배우고 싶은 만큼 그의 반짝이는 모습을 질투하고, 그에게서 나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의 영향을 알려 주려 했던 자의식들도 함께요. “질투하는 만큼 칭찬해 보려고 애쓰고, 분한 만큼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우정의 모습은 비단 ‘작가 되기’라는 목표를 공유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작가 되기 훈련이 곧 작가의 친구 되기 훈련과 연결되는 상황이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글이에요.  글이 묘사해 내는 상태와 감정에 접촉하다 보니 편집자 되기와 편집자의 동료 되기(?)라는 과제가 버겁게 느껴지던 때도 떠올랐어요. ‘나도 이 반짝거리는 글을 알고 있었는데’ 하는 마음, 꼭 같이 작업하고 싶던 저자를 빼앗긴 듯한 마음……. 그럴수록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잘할 수 있는 것과는 멀어지고, 동료들이 만든 재미있는 책을 기쁘게 읽기도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시기를 넘길 수 있게 해 준 것도 동료들이었어요. 《한편》을 편집하는 일이 그렇듯이, 함께 책을 만드는 경험을 제대로 해 보고 그런 감각을 갖게 되면서 동료가 내게 주는 자극이 더 깊고 넓게, 긍정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편집자이기 전에 무엇보다 독자이기에, 또 혼자보다는 함께 일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에 괜찮은 동료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발간사의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한 “직장 동료와 친구일 수 있는지, 저자와 우정을 쌓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늦여름인데요. 그 답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번 ‘우정’ 호 열 편의 글을 통해 ‘아무튼 우정, 친구 좋은 거’ 이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이번 《한편》 정기구독자 선물은 무엇일까요? 두근두근…♥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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