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나의 이동일지

 

 

매번 새로운 단 한 번의 사건
지난 주말 11인승 승합차를 타고 인천 석모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중형 택시 외에 승용차 탈 일이 잘 없다보니 오랜만에 큰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경험이 제법 낯설고 재밌었습니다. 3단으로 배치된 좌석들을 이리저리 옮겨 여유 공간을 최대한 확보해야 했고, 맨 뒷자리에서는 조수석 쪽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중간 자리 사람에게 전달을 부탁해야 했죠. 동행자의 플레이리스트에 따라 나오는 새로운 음악과 함께 이동하자니 차가 막히지 않을까,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처음 걱정도 누그러졌어요. 차를 타고 가는 이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답니다.
마침 안은별 작가가 도쿄에서 쓴 일기 한 꼭지를 보니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 ‘이동을 위한 시간’의 의미를 의식하게 되어요. 
“여기에서 저기로 간다는 것,
혹은 갔다가 돌아온다는 것은
반복되는 루틴이라고 해도
매번 새로운 단 한 번의 사건이다.”
‘내리기 싫다.’는 내가 일본에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들 중 하나일 것이다. 탈것에서 내리는 일 말이다. 그렇지만 이게 꼭 일본이라 많이 하는 생각은 아니다.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일은 아빠나 엄마, 주로 아빠가 운전하는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턱을 얹을 수 있을 정도로 차창을 내리고 차가 달리는 동안 바람을 쐬는 일이었다. 움직임이 멈추고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귀찮고 또 슬퍼졌다.
물론 간절히 내리고 싶을 때도 있다. 만원 전철, 화장실이 급할 때,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그렇지만 그런 일은 드문데, 어쩌면 내가 일상에서 그런 걸 자주 느끼지 않도록 그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을지도 모른다. 전철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이동할 수 있도록 대학원생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집을 구할 때도 집과 학교 사이에 있는 교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했다. 보통은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곳부터 고려한다. 그러나 나는 집을 나서 학교에 도착하기까지 전차라는 전환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지루해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도록 간단한 환승도 두어 번 있길 바랐다. 그렇지만 또 환승이 너무 복잡해서는 안 됐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모든 게 결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정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해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태어나기는 했지만」에는 이런 대사가(자막이) 나온다. “학교에 가는 것도 재밌고 돌아오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 사이는 도무지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 쓰고 보니 학교와 집은 재미있지만 오가는 길이 재미가 없다는 얘기인 것도 같지만, 처음 봤을 때 이해한 바에 의하자면 ‘나도 그래.’라고 생각했다. 가는 길도 돌아오는 길도 재미있지만 그 사이, 나를 가게 만드는 그 용건에 해당하는 일은 싫은 것이다. 얼마 전 금정연 씨가 트위터에 운전하는 건 뭔가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라서 좋다고 썼다. 이것이 내가 탈것에 운반되는 시간에 대해 가지는 생각과 비슷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정말 안 하면 안 되는 걸 하는 중이라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한 번의 승차가 완료될 때마다 두 가지 후회에 사로잡힌다. 보다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혹은 좀 더 ‘생산적’이었어도 좋았을 텐데. 예컨대 독서라든가 말이다.
그렇지만 이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읽지 못하는 것을 읽지 못하는 채로 오히려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오늘은 후쿠토신선에서 내려 마루노우치선으로 갈아타러 걷는 도중 환승 통로에서 갖고 있던 책을 펼쳤다. 지리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팀 크레스웰이 쓴 『온 더 무브』였다. 맨 앞쪽에 이런 문장이 있다. “시간과 공간은 이동의 맥락(이동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 환경)이자 이동의 산물이다. 움직이는 사람과 사물은 시간과 공간의 생산에서 행위주체이다.”[1] 브루노 라투르는 같은 얘기를 좀 더 멋있게 쓴 적 있다. “신·천사·천체·비둘기·식물·증기 엔진은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 속에서 나이 들어가지 않는다. 역으로 공간과 시간은 많은 유형의 이동자들의 역전 가능하거나 또는 역전 불가능한 전위(displacement)로 추적할 수 있다. 이들은 이동자들이 이동함으로써 생성되지만, 이러한 이동을 틀 지우지는 않는다.”[2] 미셸 드 세르토는 철도 여행을 감금이자 항해라고 썼다. 그는 차창과 레일에 의해 틀 지어지는, 여행자와 세계 사이의 관조적 거리가 무언가를 ‘생산’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서 상상적인 영역을 항해한다.
여기에서 저기로 간다는 것, 혹은 갔다가 돌아온다는 것은 반복되는 루틴이라고 해도 매번 새로운 단 한 번의 사건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갈 길을 가는 다른 사람들이나, 거대한 인프라와 치밀한 약속들의 체계와 사람들이 합을 맞춰 춤을 추는 탈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서로가 전혀 그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장소와 사건들을 이으며 시간과 공간을, 사회라는 픽션을 만들어 낸다. 매일 거의 똑같이,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게 덧붙이면서.
― 안은별, 「시간과 공간을 생산하는 중」,
박솔뫼·안은별·이상우,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14~17쪽에서
[1] 팀 크레스웰 저, 최영석 옮김, 『온 더 무브』(앨피, 2021), 22쪽.
[2] 닉 빙엄·나이절 스리프트 저, 마이크 크램·나이절 스리프트 엮음, 최병두 옮김, 「여행자를 위한 몇 가지 새로운 지침: 브뤼노 라투르와 미셀 세르의 지리학」, 『공간적 사유』(에코리브르, 2013), 482쪽.
보통 출퇴근길에 책을 보거나 메일을 확인하는 등 ‘해야할 일’을 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머리를 식히려 지하철 창밖을 내다볼 때가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정말 안 하면 안 되는 걸 하는 중이라 마음이 편해”지는 순간인 거죠. 이 조차 탈것에서 내린 다음을 위한 의도적인 휴식인 셈이만요. 그런데 학자들의 관점을 참고하면 이동하는 행위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지금 일상과 다른 곳을 상상하기. 이를테면 사막에 가고 싶다는 상상처럼요.
아아, 이동하는 시간에 대한 다채로운 묘사 중에서 “감금이자 항해”라는 세르토의 말에 정박하게 되네요. 완전히 혼자 있을 수가 없어서 곤두서면서도, 반드시 무슨 변화를 맞고야 마는 여행길의 마력을 생각하고 있어요.
주말 여행길에는 내가 고른 플레이리스트를 들어주는 동행들에게 고마워하면서, 뚜벅이가 드물게 차를 타서 쾌적하고 멋쩍어하면서 달리다가 바다를 본 순간 알게 되었어요. 이 여행을 왜 ‘워크숍’이 아니라 ‘엠티’라고 불러야 했는가를…… 워크숍이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떠나는 거라면 엠티는 함께하기 자체가 목적인 것을……(사전 찾아본) 이건 마치 ‘석모도 그래 좋겠지’에서 ‘석모도 진짜 좋더라’로의 변화네요.
‘그래 좋겠지’에서 ‘진짜 좋더라’로의 변화! 매일 똑같은 일상 루틴이 사실 매번 새로운 한 번의 사건이라는 박솔뫼 작가의 말처럼 목적지 전에 있는 무의미한 이동 시간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특수한 사건들로 “서로가 전혀 그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장소와 사건들을 이으며” 만들어진 사회라는 픽션은 겉보기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해 보여요.
물론 상상이 항상 즐겁고 유쾌하지만은 않겠습니다. 이번 《한편》에 실린 강미량 선생님의 글은 완전마비 장애인용 엑소스켈레톤 로봇을 타는 장애인 파일럿의 움직임을 관찰한 경험을 담은 한 편이에요. 이 글을 읽고서 저는 상상에서조차 늘 내게 익숙한 몸짓을 한 존재만을 상상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다음 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제도서전 첫날에는 강미량 선생님 직접 ‘전혀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이동 경험’의 이야기를 여쭈어보려 해요. 도서전 방문 계획이 있으시다면 더 많은 사람과 이동하기 위한 고민의 자리에 함께해 주세요!
(…) 내가 만난 독특한 몸짓들은 여전히 연구실이나 병원 같은 한정된 공간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과 휠체어와 로봇이 잘 움직일 수 있도록 단을 낮추고 틈을 메꾸고 적절한 인력을 배치한 공간들. 그러나 이 공간을 나서는 순간, 걷기와 타기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사라지고 로봇과 휠체어가 멈춘다. 우리가 목도한 지하철 시위는 이렇게 멈추게 된 수많은 휠체어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만약 플랫폼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손쉽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 사회의 플랫폼은 타는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데 꾸준히 실패하고 있다. 걷는 몸에게 열린 플랫폼이 타는 몸에게는 닫혀 있다. 과연 이 플랫폼이 로봇을 탄 몸을 환영할 수 있을까? 같은 시간에 같은 역에서 내리는 승객들처럼, 타는 몸과 걷는 몸이 동시에 오르고 함께 내리는 플랫폼을 상상한다. 이 공동의 몸짓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남은 숙제다.
― 강미량, 「걷는 로봇과 타는 사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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