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글쓰기는 일종의 여행이에요.”

 

 

한국어 수업 두 번째 이야기
아직 쌀쌀한 3월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저는 지난 주말 공원에 갔다가 나뭇가지 끝에 새잎이 돋아나는 걸 보았어요. 매년 보면서도 신기해하는 장면입니다. 《한편》 3주년 기념 웹세미나를 한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는데요. 지난 주 보내 드린 후기 레터를 읽고 세미나 당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는 감상을 여러 분이 보내 주셨어요. 그리고 솔직한 대화에 이어진 솔직한 피드백…… “솔직한 신 연구자님 속사정을 들으며 정보라 작가님 생각도 나고…… 저는 ‘개고’를 개고생쯤으로 들은 것 같기도 하네요. 좋아하는 북저널리즘 에디터님과 함께한 2, 3부 역시 반갑고 학사의 고충에 공감가기도 하고……”
연구와 출판, 대학 안과 밖을 오갔던 세미나 이후 이번 레터에서 소개해 드릴 소설 역시 대학과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려 2021년 77번째 레터 「안녕하세요? Are you in peace?」에 소개해 드렸던 『초급 한국어』를 잇는 『중급 한국어』예요.
뉴욕의 한 대학에서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한국에 돌아온 지혁은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시작합니다. 커리큘럼은 ‘자서전’으로 시작해 ‘글쓰기의 과정과 기술’, ‘유년’, ‘사랑’, ‘대화’, ‘환상’으로 이어지는데요. 그중 글쓰기의 과정을 다루는 두 번째 장의 일부를 함께 읽어 봐요.
글쓰기는 일종의 여행이에요. 갔다가 오는 것, 이것이 서사의 기본 구조죠. 여기 칠판을 볼까요?
주인공 A는 오른쪽의 일상에서 왼쪽의 비일상으로 갔다가 이렇게 반원을 그리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다가, 처음 떠났던 원래의 자리로 귀환하는 거예요. 여행처럼요. 하지만 정확하게 떠났던 그 자리로 돌아오는 건 아니죠. 그림에도 보면 이 반원의 지름만큼 다른 위치로 돌아오게 되잖아요? 도착 지점에 미세한 변화가 생기는 겁니다. 마치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온 우리가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처럼요. 그러면 돌아온 A는 뭐가 될까요? B? C? 아니면 그대로 A?
만약 A가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왔다면 아마 A는 A’가 되어 있을 거예요.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게 되는 거죠. 진짜 여행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이야기는 결말에 변화가 들어 있어야만 해요. 작품의 주제, 작가의 최종 메시지가 거기 들어 있으니까요. 왜 직접 말하지 않냐고요?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습니다. 그래선 안 돼요. 그저 주인공의 마지막 변화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독자와 관객에게 ‘보여 주는’ 거죠. 돈 텔, 벗 쇼. 앞으로 지겹게 듣게 될 말일 거예요. 말하지 말고 보여 줘라. 직접 들이밀지 말고 간접적으로 넌지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소설이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거예요. 다른 좋은 예술도 마찬가지고요. 설명하거나 가르치려 들면 끝나는 거죠.
……네? 그러면 패키지 여행은 뭐냐고요?
(정적)
음, 패키지 여행은 A가 A로 남는 여행이죠. 먹여 주고 태워 주고 재워 주고.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패키지 여행에는 비일상의 공간에 응당 있어야 할 고통과 갈등, 혼란과 시행착오, 문제와 어려움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여행은 일종의 유사 여행, 쉽게 말해 가짜 여행이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나쁜 이야기인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없는 이야기. 영혼 없이 상대가 듣고 싶은 말만 들려주는 이야기. 끝내 주인공이 달라지지 않는 이야기.
혹시 패키지 여행을 다녀와서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한 사람 있나요?
……제발 없다고 말해 주세요.
— 문지혁, 『중급 한국어』,
37~39쪽에서
패키지 여행을 다녀와서 인생에 큰 변화 한 번 있어 봤습니다!라고 반박하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여행 중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자유 여행(일정이 없는 날)이었네요.
다른 일정은 잘 기억 나지 않고 오로지 그날만 선명히 떠올라요. 가족끼리 떠난 첫 일본 여행에서 유일하게 마음대로 여행하는 날이었어요. 조용한 열차에 몸을 싣고 여행지로 이동하며 조근조근 나누던 이야기, 도착해서도 열차 안에 멀뚱히 앉아 있으니 어떤 일본인이 다가와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알려 준 덕분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 하루 종일 걷느라 부은 다리를 주무르던 순간, 배고프던 차에 타꼬야끼를 파는 트럭을 발견하고 온가족이 맛있게 나눠 먹던 순간.
4박 5일의 여행에서 기억나는 건 그런 순간들뿐이에요. 비일상으로 떠나 고통과 갈등, 혼란과 시행착오, 문제와 어려움들을 잔뜩 겪고 조금은 달라진 나를 마주했던 날. 언어를 배워야겠다, 더 넓은 세상을 둘러봐야겠다 등등의 마음을 갖게 된 날이니, 소설 속 지혁이 말하는 ‘좋은 이야기’를 경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패키지 여행 안에 자유 여행이 숨어 있었군요. 소설 속 지혁의 말을 반박해 보고 싶지만, 저 역시 여행에서 기억 나는 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순간, ‘사고’뿐이네요. 얼마전 오랜만에 해외여행을 갔다가 체력의 한계를 실감한 저는 글쓰기가 정말로 여행이라면, 독서가 그런 멋진 여행을 따라가는 일이라면 집 안에서만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에요.
그렇지만 우리를 변화시키는 글쓰기란 괴롭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 고난의 길임이 분명해요. 나를 변화시키는 독서 역시 쉬운 일이 아니고요.  소설 속에서 학생들은 강의 끝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야만 하는데요. 저마다 어떤 여행이 일어날지 궁금해집니다.
합평이란 말 다들 들어 봤나요?
합평이 뭐죠? 아는 사람 있으면 말해 볼까요?
네, 저기 뒤에 앉은 학생. 말씀하세요.
맞습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의견을 말하는 것.’ 또 있나요?
‘글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 네, 그것도 맞아요. 또 다른 의견?
아, ‘우리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글쓰기 수업의 최종 목표는 글을 쓰고, 그 글을 더 좋은 글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말하자면 합평은 우리 수업의 하이라이트이자 절정, 클라이맥스, 기승전결의 전과 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좋은 의견입니다. 다음 주부터 바로 이 합평을 시작할 거예요.
여러분이 정답을 이야기해 주었으니, 저도 제 생각을 말해 볼까요.
합평이란……
상대방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시간입니다
— 문지혁, 『중급 한국어』,
229~230쪽에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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