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아마추어로 연결되기

 

 

 지난 레터에 대해 오랜만에 독자 의견이 들어와서 기뻤어요. “매개로 대화하는 해결책도 어려운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연습과 시행착오 없이는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 저도 동의해요. 매개로 대화한다는 건 에둘러서 말한다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결국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전하지 못할 수도 있고, 우리의 대화가 더 헤매게 될 수도 있고요. 그래도 자연상태에 이르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어 가고 싶은 저는 더 다양한 매개를 상상해 보려고 해요!
오늘은 《한편》의 짝꿍 잡지 《릿터》의 한 대목을 가져와 봤어요. 이번 달 초에 출간된 《릿터》 40호의 주제는 ‘취미와 특기’인데요. 여기에 실린 비평가 이여로의 「아마추어의 기원, 아마추어로서 우리」는 ‘예술이나 스포츠, 기술 따위를 취미로 즐겨하는 사람’이라는 아마추어 개념의 기원을 탐색하며, 지금 우리의 상태를 ‘아마추어’로 규정하고 아마추어로서 연결되자고 주장하고 있어요.
“일류 대학 서사가 지배하는 사회는 각자의 고유성보다 사회적으로 용인된 자격을 먼저 따진다. 하지만 우리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권리를 원한다.”라는 ‘대학’의 들어가는 말과도 이어 읽고 싶은 글이에요.
아마추어들은 손 가는 대로 조개 껍데기를 수집하고, 다른 회화를 따라 그리고, 정원을 손질했다. 그것은 촉각과 시각적 놀라움에 입각한 독특한 지식 생산이자
전유의 형식이었다. 사물을 분류하고 조작하면서 정원의 기본 단위가 구상되었고,
과학 서적의 삽화와 같이 미술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아마추어 드로잉은 “과학분야에서의 전문성과 다를 바 없다”고 자칭할 만큼 상세한 관찰을 통해 사물에 대한 독자적인 분류법을 낳았다. 아마추어들은 기존의 이론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이론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
나는 반전문가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며, 지금의 모든 지식 체계를 전복하자는 것도 아니다. 요지는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명사로서 구분하기보다 전문성과 아마추어성이 공존하는 우리들의 사회적 상태를 이해하고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수의 분야에서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기에, 이 관계는 아마추어를 중심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이러한 탐구와 실천은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다. 과학 공교육의 단순한 확대를 넘어 과학기술에서 시민 참여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 정신질환 당사자들의 연구 활동, 평신도 신학, 장애와 질병의 현존과 경험 자체를 사회의 중요한 일부로 인식하는 장애학, 돌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개인적 능력이자 상호의존성의 역량이라는 선언, 무지한 스승이라는 지적 평등의 모험, 아방가르드보다 급진적인 예술 실천으로서 아마추어리즘……. 이 모든 이론과 실천은 아마추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기꺼이 아마추어의 자리에 서는 일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무언가를 하려면 먼저 무언가가 되라는 요구 앞에서 좌절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자율성의 경험을 유예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학위나 등단을 비롯한 자격 제도를 지망하지 않은 채 온라인상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소규모 출판, 비평, 연구를 이어 갔고 이 과정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만남과 가능성을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로 추구해 왔다. 우리는 아마추어가 명사가 아님을 거듭 이야기했고, 순수한 열정이나 사랑만을 강조하는 선입견과 달리 아마추어야말로 자기언어, 자기이론이 체계화할 수 있는 상태라고 역설해 왔다.
하지만 나의 작업이 아마추어리즘을 대표하지도 않고, 아마추어리즘이 이 모든 논의와 경쟁하지도 않는다. 다만 지속적인 경험적 증명과 사회 전반의 개념적 연대가 요구될 때, 나 역시 나의 자리에서 그 일부를 함께할 뿐이다. 아마추어리즘은 한 개인의 해방이면서 동시에 한 사회의 연결을 마중할 것이다.
―이여로, 「아마추어의 기원, 아마추어로서 우리」,
자기 방식대로 조개 껍데기를 분류하고, 전문가 못지 않은 드로잉을 남긴 귀족 아마추어 서술을 보면서 별다방 음료에 장식으로 올린 로즈마리를 가져와 꽃피운 어떤 인플루언서의 글이 떠올랐어요. 로즈마리를 공산품으로만 접한 저는 위로 잘 퍼져 자라는 종(커먼 로즈마리)과 옆으로 기어가듯 자라 폭포처럼 늘어지는 종(크리핑 로즈마리)으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지 뭐예요.
장식용 로즈마리를 키워 꽃을 피우고, 향신료 통 속 페페론치노의 씨를 틔워 한 그루 나무로 키우고, 수조에 심은 미역귀를 관상용 해초처럼 돌보고… 사람들은 이 블로거의 ‘드루이드(동식물과 소통할 수 있다는 고대 종교의 사제)’적 면모에 경탄합니다. 그리고 저처럼 생각하겠죠. ‘이 사람… 프로다.’
“기존의 이론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이론을 만들어” 내는 모습 앞에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는 무색해집니다. 화려한 자기 증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이 ‘취미로 오래 한’ ‘잘 못해도 좋아하는’ ‘제도권 교육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내 방식대로 쌓아온’ 활동과 지식을 하나쯤 갖고 있을 거예요. 이런 소박한 취미를 누구 앞에 내보인다고 생각하면 금방 무서워지지만, 나의 일부인 아마추어적 지식과 경험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전문가의 지식을 뾰족하게 세우는 한편 저마다의 경험을 더 거리낌 없이 드러낼 때 지금보다 더 재미난 일들이 벌어질 것 같아요. ‘드루이드’ 블로거처럼 과감한 도전은 어렵겠지만, 그 분의 실천 덕에 유리잔에 담긴 로즈마리를 전처럼 죽은 듯 보지는 않을 듯해요.
얼마전 화분 하나를 또 정리해야 했던 저는 꽃 핀 로즈마리를 보고 원숭이 상태가 되고야 말았어요. 소박한 취미를 내보인다는 생각만으로 무서워진다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돼요. ‘취미가 뭐야?’라는 가벼운 물음에도 ‘내가 그것을 충분히 좋아하나? 충분히 잘 하나?’ 한없이 작아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거든요. 재미난 일을 위해 순간순간 작은 용기를 내 보자는 다짐을 해 봅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연결에 대해 생각하면서 ‘아마추어리즘과 비평’에 대한 대담도 떠올렸어요. “유효하게 쓰이는 비평적 개념이나 꼭 들어맞아 보이는 작업이라도 내부에는 세부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1%의 다름을 붙잡고 파고들어 가면, 주관성이 노출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주관성을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그 객관화는 나의 직관을 어떻게 언어화하느냐의 문제인데요. 그때의 주체는 아마추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