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위기 앞에서 우리

 

 

페스트의 밤에 맺게 될 약속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비평론을 담은 지난 레터는 어떻게 보셨나요? 뉴스레터 구독자분들의 피드백 창이 잠잠한 가운데…… 저는 시끌시끌한 뉴스들 중 지난 주 일어난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소식만은 외면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파트 몸체가 마치 종이 조각처럼 찢어져 흩뿌려진 충격적인 이미지, 잔해 속에 겨우 생존한 사람과 동물들의 구조 소식이 앞다투어 전해옵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 있는 현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고요.
특히 며칠 전 읽은 튀르키예 작가 오르한 파묵의 《뉴욕 타임즈》 기고문이 내내 떠올라요. “무너진 콘크리트 아래 갇힌 소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남자”라는 제목의 글에서 휴대폰을 든 남자는 건물 잔해에 깔린 소녀를 발견하지만 소녀에게 말을 걸고 그 충격적인 현장을 영상으로 남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진도 7.8 규모의 첫 번째 지진이 있은 지 아홉 시간 후 그와 비슷한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건물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 역시 파괴의 순간을 목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겠지요.
2년 전 발표된 파묵의 소설 『페스트의 밤』은 이런 예기치 못한 재난을 배경으로 하는데요. 1901년 오스만 제국하의 ‘민게르’라는 가상의 섬에 전염병이 퍼진 상황을 쓴 이 작품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대처해야 할 위기 앞에 우리라는 공동체가 갖가지 이유로 분열하는 장면들을 그립니다. 아래는 “지난 이십오년 간 심각한 전염병이 없었기 때문에 단지 종이 위에만 존재했던 위원회가 정식 회의를 위해 소집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로 시작하는 한 대목입니다.
의사 일리아스와 의사 누리를 제외한 모든 대표단은 섬에서의 삶을 통해 서로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처녀 문제로 섬에 있는 공동체들 사이에 싸움이 나면 총독은 양쪽의 말을 듣고 몇 마디 꾸짖은 뒤 누구도 감옥에 가지 않고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 이 사람들을 이 방에 모이도록 했다. 혹은 섬 내륙 마을에 새 전신선을 연결하기 위해 목재 조달 예산 확보에 섬 주민 전체의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할 경우 이 사람들을 오래된 나무 테이블 주위에 불러 앉히고는 파디샤를 향한 충성심에 대하여 눈물을 머금게 하는 연설을 했다.
모든 공동체의 수장, 약사, 영사, 수비대 군인, 총독 파샤, 그리고 다른 대표들은 모두 병이 항구의 서쪽에서 위쪽 언덕에 있는 무슬림 마을로 상당히 퍼졌으며, 더 빠르게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게르메, 치테, 카디를레르 마을에 방역선이 필요하다 믿고서 이를 터놓고 이야기했다. 이 마을들에서 지금 매일 네다섯 명이 사망하고 있지만 감염된 사람들이 여전히 도시 주변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방역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서로 속닥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 또 다른 주제는 본코프스키 파샤의 암살이 얼마나 정치적이었느냐 하는 문제였다. 대부분 이러한 암시를 주고받았지만 아무도 누군가를 지목하며 비난하지 않았다. 프랑스 영사인 무슈 안돈만이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다른 영사, 사무관,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학문, 의학, 서구에 반대하는 눈이 돌아간 광신도의 공격이라고 말했다. 확신에 찬 프랑스 영사는 만약 총독 파샤가 암살 사건의 범인과 배후에 있는 사람들을 신속히 색출하지 못하면 이는 유럽 국가들을 향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해석될 거라고 덧붙였다.
이스탄불의 오스만 제국 보건부는 하룻밤 사이 민게르주 방역 위원회에서 결정해야 할 사항들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전보를 보냈다. 이스탄불은 국제 방역 기구로부터 새로운 조치들이 추가되는 변화무쌍한 목록들을 매일 전보로 받고 있었다. 민게르 방역 위원회의 임무는 이 지시들을 섬 상황에 맞추어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이행하는 것이었다.
모든 학교는 휴교하기로 합의했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논쟁조차 없었다. 대부분 가정이 어차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있었다. 교정에는 불행하고 무관심한 가정의 문제 있는 아이들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관공서가 근무를 계속하고 어떤 곳이 단축 근무를 할지는 각 부처의 장이 결정하도록 맡겼다. 방역 회의 이틀 후 아침을 시작으로 알렉산드리아, 북아프리카 해안, 수에즈 운하, 근교의 섬들, 그리고 동양에서 오는 모든 배에 대한 방역이 결정되었다. ‘완전 전염’으로 간주되는 이 배들의 모든 승객은 섬에 발을 내딛기 전에 닷새 동안 격리될 것이다. 섬을 떠나는 배들도 닷새간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섬 유입과 상점 비치를 금지할 재료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투표하는 데(마치 콜레라 금지 목록처럼) 많은 시간이 걸렸다. “파샤, 제재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별로 말이 없던 독일 영사 프랑굴리가 말했다. “제재 조치가 많으면 전염병이 그만큼 빨리 사라질 것처럼 말이지요.”
총독 파샤는 그가 아는 많은 관료와 정치인처럼 위원회 위원들도 금지 조치를 즐긴다고 생각했기 떄문에 순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랑굴리 에펜디! 금지 항목들을 공고 형태로 도시 전역에 게시하면 모두들 겁을 먹을 테고, 그것들을 준수하는 데 군인이나 경찰은 필요치 않을 겁니다.”
― 오르한 파묵, 『페스트의 밤』,
166~168쪽 중에서
‘민게르 방역 위원회’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를 오랫동안 봐 온 공동체의 일원이자 일종의 대표이지만 싸움보다 큰 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수도에서 파견한 유능한 방역 전문가 본코프스키 파샤는 제대로 된 방역 정책을 시행하기도 전에 아마도 종교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마는데요. 이런 상황에도 위원회는 누구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채 국제 기구가 검증한 금지 조치들을 공지하는 데 몰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로 기능하지 않는 상황은 먼 나라의 일만도, 소설 속 가상 도시의 장면만도 아닌 듯해요. 작년 가을의 포항 수해나 10.29 참사에 많은 애도와 도움의 손길이 모였음에도 우리의 이름으로 중요한 문제들 해결할 수 없었던 것처럼요.
감염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 인간은 모일 수 없고 함께 대화할 수 없다. 집회는커녕 장례도 치를 수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전선은 무리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들 사이에 그어진다. 정부의 구호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집 밖으로 나설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고독한 인간이야말로 홉스의 이론적 출발점이라고 할 만하다. 이처럼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고독한 상황에서 자연상태는 도래한다.
감염병 시대는 사회의 정치적 기초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자연상태는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마주치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한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 기존의 익숙한 정치적 전선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린다. 결국 자연상태를 상상한다는 것은 내전의 영겁회귀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연다는 의미다. 홉스가 기획한 도상 속 마을은 국가 질서 아래에 놓인 사회가 아니라 고독한 개인들의 자연상태를 나타낸다. 더 정확히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없는 자연상태가 무엇인지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 조무원, 6장 「고독과 공포에서 탈출하기」,
지난 금요일 광주에서 북토크를 진행한 『우리를 바꾸는 우리』의 서술처럼, 우리가 홀로 자신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순간에 지난 시간 우리가 공동체로서 쓴 약속의 목록들은 더없이 중요해집니다. 그 약속은 ‘종교와 정치에 관계없이 인명 구조를 최우선시한다.’ ‘시민의 이동을 통제할 때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불쾌감과 공포심을 주는 이미지는 게시에 주의한다.’ 같은 소박하고도 당연한 것들이겠지요.
꺼져가는 생명 앞에 이러한 약속이 얼마나 힘이 있을까 싶지만, 파묵의 글과 소설 그리고 조무원의 탐구는 이처럼 당연한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을 되짚고 있는 듯합니다.
함께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쓴 약속의 목록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 와닿아요. 하지만 해결은 역시 쉽지 않죠. 문제는 산적해 있는데 의미 없는 갈등만 반복될 때는 정치 뉴스는 보고 싶지도 않은 무력한 상태에 빠지고요.
북토크 후기와 함께 덧붙여 보자면, 지난 금요일 북토크를 찾은 독자분들이 들려주신 이야기 중 ‘정치적 무력감에서 벗어날 정치 공부’가 궁금해서 참석하셨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책에서 답을 한번 찾아봤는데요. 『우리를 바꾸는 우리』는 “다시 개인으로 돌아와 아슬아슬한 약속을 맺는 일이야말로 반복되는 적대가 불러온 무기력에서 탈출하는 길이다.”(215쪽)라고 말하고 있어요.
거대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결은 개인이 아닌 우리가 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사실이 한켠에 있지만, 너무 다른 이들이 만나서 어떻게 우리가 될지 막막하기도 해요. 어쩌면 『페스트의 밤』의 민게르 방역 위원회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우리를 바꿔 나가기보다는 정해진 규칙들을 따르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거예요.
이 쉽지 않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해 봤지요. 이를테면 기후위기는 거짓이라는 사람과 기후위기가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 만나 우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어려운 질문에 조무원 선생님은 ‘매개로 대화하는 방법‘을 제안해 주셨어요. 이를테면 백신을 부정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대화가 파국으로 치달을 때, 다른 이야기를 매개로 대화를 시작해 보는 거예요. ‘백신’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는 뉴스를 결정하고 백신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는 ‘알고리즘’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던 경험을 들려주셨지요.
매개는 여럿이 될 수 있을 텐데요. 어떤 정당, 어느 정치인을 지지하느냐를 묻기보다는 특정한 이슈를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겠고, 『우리를 바꾸는 우리』를 함께 읽으면서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어요. 어두운 상황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북토크 자리도 하나의 매개였다는 희망적인 말로 레터를 마무리해 보고 싶어요.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