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또는 이때를 전후한 무렵이면 일종의 사회적 분화 과정이 유럽 학자들 안에서는 분명해져 있었다. 문필가들은 하나의 반半독립적 집단이었으며, 이 사람들의 자의식은 점점 강해졌으니, 이 자의식은 17세기 프랑스에서처럼 저술가(auteur)나 작가(écrivain) 같은 말들을 점점 많이 쓰던 것에서 드러났다. 작지만 영향력 있는 한 집단이 있었으니, 우리 시대 말로는 ‘정보 중개인’으로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집단이 다른 곳에 있는 학자들이 서로 교제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고, 아니면 ‘지식 관리자’로 부를 수도 있을 텐데, 이 집단은 자료를 수집하는 것뿐만 아니라 조직하려고도 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 가운데 몇몇의 이름은 다시 등장할 텐데, 그중에는 프랜시스 베이컨, 장 바티스트 콜베르, 드니 디드로, 새뮤얼 하틀리브,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마랭 메르센, 가브리엘 노데, 올덴버그, 테오프라스트 르노도가 있다.
대학교수들 또한 구별되는 집단이 돼 가고 있었는데, 특히 독일어 사용권에서였다. 이 권역에는 18세기 말이면 마흔 곳이 넘는 대학이 있었거니와, 다른 고등교육기관들은 계산에 넣지 않은 수치였다. 대학교수들은 보통 비성직자였으며, 다른 교수의 아들이나 사위인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교수들이 갖고 있던 별도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학위 예복이나 학위 칭호에 점점 더 많이 신경을 쓰던 것이나, 웁살라 대학을 비롯한 다른 대학들에서 교수들의 초상화를 걸어놓은 복도가 등장한 일을 들 수 있다. 19세기 옥스퍼드 대학의 벤저민 조윗처럼, 그러니까 1870년부터 1893년까지 베일리얼 학료의 학감이었던(그러면서 이 장의 제사題詞로 쓴 시구에서 풍자 대상이 됐던) 인물처럼, 저 근대 초의 교수 직위는 지적 권위의 구현이었다.
근대 초 학자들은 자기네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7세기 말 잉글랜드에서는, 그러니까 막스 베버가 이 주제를 놓고 저 유명한 생각들을 발표하기 두 세기 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학료 학감 아이작 배로가 논문 「근면함에 관해」에서 학문을 소명 또는 ‘천직’으로 다루는데, 곧 학자들의 ‘일’이란 “진리를 발견하”고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라 설파했던 것이다. ‘지식’이라는 말로 배로가 의미했던 것은 “명백하고 통속적인 일들”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숭고하고 심원하며 난해하고 복잡하며, 일상적 관찰과 상식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울 주제들”이었다. 구체적 분야의 학문적 직업에 속한 사람들도 더러 자기 일을 천직으로 여겼는데, 대표적으로는 독일 역사가 요한 슬라이단이나 프랑스 역사가 앙리 드 라 포플리니에르가 있다.
(…) 18세기에는, 기고자들이 점점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데, 정기간행물들이 늘어나면서였다. 유명한 지식인들에게, 역사가들도 포함되거니와, 주어지는 보상도 높아지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알렉산더 포프가 경제적으로 자립한 최초의 지식인으로 불리게 됐으며, 곧 새뮤얼 존슨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에서는, 철학자들(philosophes), 이를테면 디드로를 비롯한 다른 『백과전서』 기고자들이 벨과 존슨의 선례를 따랐으니, 참고서를 제작하며 글을 써서 생계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거니와, 다만 백과사전을 어떤 정치적 기획을 지원하는 데 썼던 것은 두드러지게 새로운 대목이었다고 하겠다.
글을 써서 성공한 잘 알려진 사례들 때문에 ‘문학의 밑바닥’, 곧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이런 곳을 가리키던 ‘그럽가(Grub Street)’를 잊어서는 안 될 일인데, 그러니까 성공하지 못해 가난한 문필가들의 세계가, 볼테르가 표현한 대로는 문학 천민들(la canaille de la littérature)의 세계가 또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비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두드러지는 것은 유럽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18세기 중반이면 어느 정도는 경제적으로 자립적인 지식인 집단이 출현했다는 것이며, 이 사람들은 나름의 정치적 견해들을 갖고 있었고, 몇몇 대도시에, 대표적으로는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베를린에 집중돼 있었으며, 자기네끼리 수시로 접촉했다.
― 피터 버그, 『지식의 사회사 1』,
「2장: 유럽의 지식인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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