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일로 학문하는 사람들

 

 

여러분이 떠올리는 학자는 누구?
이번 설은 주말과 겹쳐 유독 짧게 느껴졌어요. 북극의 찬 공기가 밀려와 한파와 강풍이 거센 휴일이기도 했는데, 독자분들 모두 무탈히 즐거운 명절 보내셨길 바랍니다.
명절 전 제작에 들어간 ‘대학’ 편은 이번주 정기구독자를 대상으로 선발송될 예정입니다. 지난 주 레터에 띄운 서문을 보고 한 독자분께서는 “나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그렇다고 최상위원은 아니고 치열하지도 않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라는 감상을 보내 주셨어요. 대학에서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을 수 있었지만 막상 졸업 이후의 삶을 고민할 때 대학은 나를 돕기보다 오히려 쫓기게 만드는 공간이었다는 말씀과 함께요.
인문학 교양, 전공수업을 들으며 재미를 느끼다가도 ‘이 재미가 밥벌이로 이어질 수 있을까?’에서 생각을 멈춘 분들이 아마 적지 않을 거예요. 오늘 레터는 대학에 접근하는 첫 키워드로 ‘학자’를 제시하려 합니다. 여러분에게 학자란 어떤 존재인가요? 미디어 속 대학교수, 지식인, 전문가처럼 먼 인물? 한두 다리 건너 오랫동안 학위를 하고 있는 친지나 지인? 혹은 자기 자신이 학문을 업으로 삼고 계신 분도 있겠네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문화사 명예교수인 피터 버그의 『지식의 사회사』를 보면 17~18세기 유럽에서는 종교개혁과 인쇄혁명을 거치며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수와 이들끼리의 교류가 늘었다고 합니다.
1600년, 또는 이때를 전후한 무렵이면 일종의 사회적 분화 과정이 유럽 학자들 안에서는 분명해져 있었다. 문필가들은 하나의 반半독립적 집단이었으며, 이 사람들의 자의식은 점점 강해졌으니, 이 자의식은 17세기 프랑스에서처럼 저술가(auteur)나 작가(écrivain) 같은 말들을 점점 많이 쓰던 것에서 드러났다. 작지만 영향력 있는 한 집단이 있었으니, 우리 시대 말로는 ‘정보 중개인’으로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집단이 다른 곳에 있는 학자들이 서로 교제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고, 아니면 ‘지식 관리자’로 부를 수도 있을 텐데, 이 집단은 자료를 수집하는 것뿐만 아니라 조직하려고도 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 가운데 몇몇의 이름은 다시 등장할 텐데, 그중에는 프랜시스 베이컨, 장 바티스트 콜베르, 드니 디드로, 새뮤얼 하틀리브,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마랭 메르센, 가브리엘 노데, 올덴버그, 테오프라스트 르노도가 있다.
대학교수들 또한 구별되는 집단이 돼 가고 있었는데, 특히 독일어 사용권에서였다. 이 권역에는 18세기 말이면 마흔 곳이 넘는 대학이 있었거니와, 다른 고등교육기관들은 계산에 넣지 않은 수치였다. 대학교수들은 보통 비성직자였으며, 다른 교수의 아들이나 사위인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교수들이 갖고 있던 별도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학위 예복이나 학위 칭호에 점점 더 많이 신경을 쓰던 것이나, 웁살라 대학을 비롯한 다른 대학들에서 교수들의 초상화를 걸어놓은 복도가 등장한 일을 들 수 있다. 19세기 옥스퍼드 대학의 벤저민 조윗처럼, 그러니까 1870년부터 1893년까지 베일리얼 학료의 학감이었던(그러면서 이 장의 제사題詞로 쓴 시구에서 풍자 대상이 됐던) 인물처럼, 저 근대 초의 교수 직위는 지적 권위의 구현이었다.
근대 초 학자들은 자기네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7세기 말 잉글랜드에서는, 그러니까 막스 베버가 이 주제를 놓고 저 유명한 생각들을 발표하기 두 세기 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학료 학감 아이작 배로가 논문 「근면함에 관해」에서 학문을 소명 또는 ‘천직’으로 다루는데, 곧 학자들의 ‘일’이란 “진리를 발견하”고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라 설파했던 것이다. ‘지식’이라는 말로 배로가 의미했던 것은 “명백하고 통속적인 일들”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숭고하고 심원하며 난해하고 복잡하며, 일상적 관찰과 상식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울 주제들”이었다. 구체적 분야의 학문적 직업에 속한 사람들도 더러 자기 일을 천직으로 여겼는데, 대표적으로는 독일 역사가 요한 슬라이단이나 프랑스 역사가 앙리 드 라 포플리니에르가 있다.
(…) 18세기에는, 기고자들이 점점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데, 정기간행물들이 늘어나면서였다. 유명한 지식인들에게, 역사가들도 포함되거니와, 주어지는 보상도 높아지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알렉산더 포프가 경제적으로 자립한 최초의 지식인으로 불리게 됐으며, 곧 새뮤얼 존슨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에서는, 철학자들(philosophes), 이를테면 디드로를 비롯한 다른 『백과전서』 기고자들이 벨과 존슨의 선례를 따랐으니, 참고서를 제작하며 글을 써서 생계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거니와, 다만 백과사전을 어떤 정치적 기획을 지원하는 데 썼던 것은 두드러지게 새로운 대목이었다고 하겠다.
글을 써서 성공한 잘 알려진 사례들 때문에 ‘문학의 밑바닥’, 곧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이런 곳을 가리키던 ‘그럽가(Grub Street)’를 잊어서는 안 될 일인데, 그러니까 성공하지 못해 가난한 문필가들의 세계가, 볼테르가 표현한 대로는 문학 천민들(la canaille de la littérature)의 세계가 또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비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두드러지는 것은 유럽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18세기 중반이면 어느 정도는 경제적으로 자립적인 지식인 집단이 출현했다는 것이며, 이 사람들은 나름의 정치적 견해들을 갖고 있었고, 몇몇 대도시에, 대표적으로는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베를린에 집중돼 있었으며, 자기네끼리 수시로 접촉했다. 
― 피터 버그, 『지식의 사회사 1』,
「2장: 유럽의 지식인들」 중에서
실용 지식과 다른 ‘학문’을 자신의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나타나 ‘지식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된 것이 18세기 중반의 일이라니,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라는 느낌이네요. 동아시아라면 성리학의 진리를 탐구한 사대부들이나 과거제를 통과한 관료들을 이와 비슷한 학자로 볼 수 있을까요. 유럽 지식인의 출현에 대학이라는 기관, 출판이라는 매체, 도시라는 공간이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학자는 일하고 연구하는 자리를 주는 기관과 자신의 학식을 알릴 다양한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한편》 10호의 별책 『공부하는 일』은 오늘날의 ‘학자’들과 만나 이런 지식인의 연구 환경을 살펴보려 했습니다. 연구라는 일을 실제 일에 적용한 사례에 더해 연구자가 되기 전 대학에서의 공부 경험도 접할 수 있는 인터뷰들인데요. 제가 인터뷰한 과학기술학 전공자 강연실 박사는 “중고등학교 때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공부한 편입니다. 책은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봤고요.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책을 보는 것이 ‘업’이 되었습니다”라는 솔직한 이야기를 전해 주셨어요. 『납치된 도시에서 길찾기』의 저자 전현우 연구자는 대학 수업에서 책으로 익히는 사상을 자기 말로 바꾸는 연습을 하며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고요.
Q. 과학학 전공은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등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방법론을 익혀 과학을 다루는 학문이지요. 제가 다닌 대학원도 3분의 2가 이공계 출신이라 글을 읽고 의견을 내는 공부 방식에 애를 먹는 동료가 많았던 기억이에요.
A. 제가 그중 한 명입니다. 그간 읽지 않았던 책을 엄청난 양으로, 게다가 영어로 된 것들로 읽고 내 의견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새로운 과제였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찾아보고 확장하는 연구를 처음 하는 상황에 놓인 거죠.
대학원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서는 수업 도서를 읽고 어떤 인사이트를 얻었냐는 교수님 질문에 ‘인사이트’라는 것이 뭔지 되물은 적도 있어요. 그때까지 제가
경험한 공부는 글이든 수식이든 주어진 텍스트를 최대한 잘 이해하는 것이었지, 내 생각이나 의견을 주석처럼 더하는 방식이 아니었거든요.
― 《한편》 10호 부록 『공부하는 일』,
과학기술학 연구자 강연실 인터뷰 중에서
Q. 비트겐슈타인을 접하게 된 대학 시절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볼까요?
(…) 좀 더 재미를 느낀 건 [서강대 철학과] 김영건 선생의 수업이었습니다. 논리학개론 수업에서 이 학생 저 학생 말을 시키는데, 제가 그때 좋아하던 네그리 같은 사상가를 많이 인용하니까 자기 말로 간단하게 말하라고 자꾸 시키는 거예요. 기분이 나빴지만 F학점을 받을 수는 없으니 참고 노력을 좀 해 봤습니다. 좌충우돌하다가 다행히 나쁜 버릇은 고쳤다고 해야 할까요. 자기 말로 간단히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낄 때 해방감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이런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믿고 네이버 블로그 등지에서 열심히 키보드 배틀을 했던 기억입니다.
― 《한편》 10호 부록 『공부하는 일』,
교통·철학 연구자 전현우 인터뷰 중에서
엄청난 양의 텍스트를 읽고 자신만의 ‘인사이트’를 만들기, 사상가의 말을 자신의 언어로 바꾸기 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학자의 공부법입니다.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시험공부를 위해 자습하며,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하며, 커리어 계발을 위한 공부를 하며 있었던 각자의 경험을 떠올려 봐도 좋겠습니다.
대체로 지금의 예비 학자들은 박사학위를 딴 후 연구단·연구소 등에 적을 둘 때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 공동체에 편입된다는 느낌이지만 뜻 맞는 사람들과 대학 밖 연구 공동체를 만들고 논문과 책 집필, 번역 작업에 매진하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공계의 경우 박사학위를 거쳐 ‘현업’에서 커리어를 쌓는 사람이 ‘진짜 전문가’라는 인식도 커지고 있고요. 학자의 모습이 이처럼 다양하다면, 내가 아는 지식인들에게 무엇을 얻고 무엇을 참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 다를 듯합니다. 다른 분들은 발췌와 인터뷰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연구’라고 하면 막연한 느낌이 있는데, 그 의미가 구체화되어서 좋아요. “자기 말로 간단히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느낄 때의 해방감.” 『공부하는 일』에 함께 실린 남수빈 편집자님의 인터뷰 중 ‘수용한 언어를 자기 언어로 구성해 짜임새를 갖춘 글로 조직해 낼 수 있는가‘가 공부의 핵심이라는 대목도 떠오르네요. 미학 연구자이기도 한 편집자님은 경제적 문제와 창작의 관계는 모든 창작자의 난제라는 말씀도 해 주셨는데요. 인용해 주신 『지식의 사회사』 중에서도 생계에 대한 언급이 눈에 들어와요. 글을 써서 성공한 사례가 있는 한편에 ‘문학의 밑바닥’ 또한 있다는…… 지금은 상황이 더 쉽지 않고요.
졸업 이후의 삶을 고민할 때 대학이 ‘돕기보다 오히려 쫓기게 만드는 공간’이었다는 독자님의 말을 곱씹게 돼요. 대학 3~4학년이 되니 많은 친구들이 대학에서는 배울 수 없는, 대개는 시험을 치르기 위한 공부를 위해 학원을 찾았던 기억이 나요. 저도 그랬고요. 공부를 이어 가기의 어려움과 대학 안과 밖 공부 사이의 단절. 거기에 끼어든 생계라는 문제를 들여다보면서 달리 관계 맺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네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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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2.2 5: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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