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주간 탐구 시리즈 3종 신간을 소개해 드렸어요. 여러분들은 ‘미디어 환경 탐구’, ‘정치와 약속 탐구’, ‘이동의 위기 탐구’ 중 어느 주제에 특히 마음이 가셨나요?
지난 주 레터를 보신 한 독자분께서는 『납치된 도시에서 길찾기』 발췌를 보고 오랜만에 자동차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는 감상을 남겨 주셨어요. “꽉꽉 들어찬 도로를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는 이 독자님께서는 “가끔씩 출근길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 혹은 걷기로 다니는 상상을 하며 속으로 웃을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게요, 모든 사람이 다른 것에서 빌어온 에너지가 아닌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세상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요?
세계의 위기와 재난이 요즈음 탐구 주제인 저는 『납치된 도시에서 길찾기』의 신도시 거리 묘사를 보다 오랜만에 세계 방방곡곡의 거리 이름을 탐색한 책 『주소 이야기』를 펼쳐 봤어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 사례를 취재한 저자에 따르면 “도로명에도 유행이 있다.”고 하네요. 당최 기원을 알 수 없는 이름도 따지고 보면 제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요.
도로명에도 유행이 있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자연과 관련된 거리 이름이 유행이었다.(폴란드도 마찬가지였는데, 영어의 Forest, Field, Sunny, Short, Garden에 해당하는 단어가 들어간 도로명이 가장 많았다.) 최근 벨기에에서는 시민들이 도로명을 직접 지은 일이 있었는데, 전통 음식의 이름을 따 ‘퀴베르동(Cuberdon, 원뿔 모양의 벨기에 전통 캔디)가’, ‘스페퀼로스(Speculoos, 쿠키)가’, ‘시콩(Chicon, 치즈와 치커리를 넣고 만든 요리)가’라고 지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영국에는 다양한 문화를 반영한 도로명이 많이 생겨났다.(이슬람 사원을 뜻하는 카르마 웨이(Karma Way)나 마스지드 레인(Masjid Lane)이 대표적이다.) “미래에는 여성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 유행할 것”이라고 말한 학자도 있다. 실제로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단체인 ‘오제 르 페미니즘’은 파리 전역에 새로운 (비공식) 도로명을 짓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니나 시몬 거리’도 그중 하나다.) 파리 시내에 여성의 이름을 딴 도로명은 전체의 2.6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런던은 과거를 상기시키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나는 한때 거칠기로 유명했던 한 런던 동부 지역에 새로 생긴 최신식 아파트에 사는 친구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부트메이커스 코트(Bootmakers Court)’라고 적힌 아파트 주소에 놀라 잠시 멈칫했다. 구두장이의 길이라고? 고가의 카본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화이트칼라 계층의 젊은 아파트 주민들 중에 신발 공장에서 일한 만한 사람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영국인이자 지리학자인 도린 매시도 과거 노동자 계층 주거지였다가 최근 급격하게 고급 주택지가 된 도크랜즈에서 비슷한 현상을 발견했다. 그녀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는 오랜 주민들에게 도로명은 노동자 계급 동네였던 시절, 곧 선술집, 축구, 고된 노동, 지역 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 사용된다. 오늘날에도 옛 이름을 쓰거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아파트의 이름을 심사숙고하여 짓는 일 역시 똑같이 낭만화되었지만 형태는 다른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이다.”라고 설명했다. ‘부트메이커스 코트’ 아파트는 과거 런던 동부의 노동자 계급이 절대 살 수 없는, 방 한 칸짜리가 40만 파운드인 고가의 아파트이지만, 그곳에 사는 런던 부자들은 그 이름 덕분에 어느 곳보다 낭만적인 동네에 산다는 기분을 만끽한다. 비록 과거에는 결코 살고 싶어 하지 않았을 지역이지만 말이다.
― 디어드라 마스크, 연아람 옮김, 『주소 이야기』,
「거리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중에서
여러분이 살고 계신 동네나 거리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제가 상경 후 처음 자리잡은 동네 이름은 ‘부트메이커스 코트’만큼이나 역사가 긴 유적지 이름과 같았어요. 그 후 몇 년간 살았던 다른 동네의 이름은 야트막한 동산이 있어 멀리 옆동네까지 내다볼 수 있다는 지역 특징이 반영된 것이었죠. 전자는 오래된 이름만큼이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있어 좋아한 곳이었지만, 떠돌이 처지로서는 런던 고급 주택지의 터줏대감이 품을 만한 감상은 떠올릴 수 없었답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지형지물을 딴 동네명보단 의미불명의 수식어가 붙은 아파트명이 사회적으로 회자되곤 해요. 그런데 이 책에는 한국의 의미불명 도로명 주소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답니다. 저자가 만나본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2011년에 도입된 도로명 시스템을 반기지 않았다나요? 인천 모처의 국제도시가 떠오르는 아래 단락을 공유하며, 독자 분들의 동네 이야기를 기다려 봅니다.
행정관청에서는 간단하고 논리적이며 진부한 방법으로 도로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어 500여 개의 대로에만 이름을 짓고 나머지는 번호를 붙이는 식이었다. 한 일간지는 김혜정이라는 사람이 인천에서 친구 집을 찾다가 도로 이름이 죄다 ‘루비’와 같은 영어 보석 이름이어서 헷갈린 탓에 길을 잃었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그녀는 “도로 이름만 보고 귀금속 거리인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 동네더라고요. 정말 이상해요.”라고 불평했다. 시 공부원들은 “국제적인” 느낌을 내기 위해 보석 이름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국제적인 느낌이 나는 이름의 도로가 많은 이유는 아마도 도로명 주소가 애초에 내국인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기존 주소를 계속 사용하고 있으니, 새 도로명은 내국인과 외국인에게 두 종류의 도시 경관을 만들어 준 셈이 되었다. 외부의 시선에서 한국은 조금 더 서구식으로 변했지만, 정작 한국인들은 오랜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한국인들이 도시를 선보다는 구획으로 바라보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