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우리도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지요

 

 

투르게네프 산문시
지난 한 주 어떻게 보내셨나요?주말에 있었던 이태원 사고로 황망한 때입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슬픔을 나누고도 싶은 마음으로 편지를 띄웁니다.
옛사람이 산에 다녀온 글을 엮은 『산문기행』 레터에 여러 분이 감상을 전해주셨어요. “엄마가 아프신 뒤로 산에 거의 가지 못했는데 이렇게 생생하게 산에 오른 이야기를 알려주는 책을 덕분에 처음 알았습니다!” 사연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제 가을산에 다녀왔는데 그 감성을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우연처럼 이끌리는 단어들이었습니다~” 어느 산에 다녀오셨는지 궁금해요. 근데 대화가 넘 길어요 약간만 짧게~~”라는 의견도 감사합니다. 지금 편지를 쓰면서도 고민이지만, 대화는 얼마나 길어야 좋을까요? 밤을 새우며 이야기하고도 헤어질 때 아쉬워하는 편인 저는 “우리도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지요.”라는 시구에 눈길이 갔는데요.
추모하는 마음으로 시를 보내드립니다. 이태원 사고 사망자의 명복을 빌며 부상자의 쾌유와 회복을 바랍니다.
대화
융프라우에도 핀스터아르호른에도
아직 인간의 발자취가 없었다.
알프스 정상…… 온통 험한 봉우리들의 연속…… 산들의 최중심지.
산 위로 펼쳐진 연옥색의 말 없는 밝은 하늘. 매서운 강추위. 반짝이는 얼어붙은 눈. 그 눈을 뚫고 솟아난 얼음 덮이고 비바람을 견뎌 낸 준엄한 바윗덩어리.
지평선 양쪽에서 떠오른 두 바윗덩어리, 두 거인은 융프라우와 핀스터아르호른이다.
융프라우가 이웃에게 말한다.
“뭐 새로운 소식 없소? 당신이 더 잘 보이잖아. 거기 아래쪽은 어떻소?”
한순간 몇 천 년이 지나간다. 핀스터아르호른의 대답이 울려 퍼진다.
“꽉 들어찬 구름이 지구를 덮고 있다네…… 기다리게!”
한순간 다시 수천 년이 지나간다.
“자, 지금은 어떻소?” 융프라우가 묻는다.
“이제 보이는군. 저 아래쪽은 여전하네. 얼룩덜룩하고 작기만 하지. 물은 푸르고, 숲은 검고, 쌓아 올린 돌무더기들은 잿빛이네. 주변에는 여전히 딱정벌레들이
우글거리지. 알다시피, 아직도 당신이나 나를 한 번도 더럽힌 적 없는 저 두 발 달린 것들이라네.”
“인간들?”
“그래, 인간들.”
한순간 수천 년이 흐른다.
“자, 지금은 어떻소?” 융프라우가 묻는다.
“딱정벌레들이 약간 적어 보이네.” 핀스터아르호른의 대답이 우렁차다.
“아래는 더 선명해졌어. 물도 줄고, 숲도 드물어졌다네.”
한순간 다시 수천 년이 지난다.
“무엇이 보이오?” 융프라우가 묻는다.
“우리 주변이 아주 깨끗해진 것 같네.” 핀스터아르호른이 대답한다.
“저 멀리 계곡 따라 여전히 얼룩이 있고, 뭔가가 살짝 움직인다네.”
“그러면 지금은 어떻소?” 한순간 수천 년이 지나자, 융프라우가 묻는다.
“이제는 좋아.” 핀스터아르호른이 대답한다.
“어디나 깨끗해졌고, 어딜 가나 완전히 하얗고……. 어디에나 모두 우리 눈이지. 눈과 얼음이 고르게 있다네. 다 얼어 버렸어. 이제는 됐어, 잠잠하다네.”
“좋아요.” 융프라우가 중얼거렸다. “노인장, 그건 그렇고 우리도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지요, 잘 시간이오.”
“잘 시간이네.”
거대한 산들이 자고 있다. 맑고 푸른 하늘도 영원히 침묵하는 대지 위에서 자고 있다.
— 1878년 2월
참새
사냥에서 돌아와 정원의 가로수 길을 걸었다. 그때 개 한 마리가 내 앞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개가 걸음을 늦추더니 날짐승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듯 살금살금 다가가기 시작했다.
가로수를 따라가다 눈을 돌리니 작은 참새 새끼 한 마리가 눈에 보였다. 입부리 주변이 노랗고 머리에 솜털이 난 참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가로수 길 자작나무를 강하게 흔들었다. 그때 참새가 둥지에서 떨어졌다. 이제 막 날아 보려 한 참새 새끼가 날개를 편 채 힘없이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개가 서서히 다가갔을 때, 갑자기 가까운 나무에서 가슴털이 검은 어미 참새 한 마리가 개의 콧등 앞으로 돌멩이처럼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모든 털을 곤두세우고 애처로운 소리로 필사적으로 울어 대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개를 향해 두어 번 덤벼들었다.
어미 새가 새끼를 구하기 위해 돌진했고,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새끼를 구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작은 몸뚱이는 공포로 벌벌 떨었고, 어미 새의 가냘픈 목소리는 거칠게 쉬어 버렸다. 어미 새는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자기 몸을 희생한 것이다!
참새에게는 개가 얼마나 큰 괴물로 보였을까! 그렇지만 참새는 안전하고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참새의 의지보다 더 강한 어떤 힘이 참새를 날아 내려오게 만들었다.
나의 개 트레조르는 멈추어 섰고, 슬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개도 그 힘을 인정한 모양이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개를 급히 불렀고, 존경 어린 경건한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그렇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 영웅적인 작은 새에 대해, 그 사랑의 충동과 돌진에 대해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사랑은 죽음보다, 죽음의 공포보다 더 강하다. 삶은 사랑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움직인다.
— 1878년 4월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조주관 옮김,

 

  
융프라우와 핀스터아르호른이 나누는 대화는 고요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대자연은 오랜 세월 치열하게 살다 떠나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때로는 관조적으로, 때로는 포용하며 시간을 보냈겠지요. 언제나 그랬듯 자연은 오늘도 우리를 평안한 침묵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의 희로애락에 흔들리는 저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슬픔에 잠기는 날이면 지쳐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결국 사랑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미 참새의 용맹한 사랑이 개를 멈추게 했고, 시인을 깨닫게 했고, 새끼 참새를 구했듯이 말입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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