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모든 사람이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해

 

 

토카르추크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에서
두 번째 연휴가 지나갔습니다. 아아, 연휴는 갔습니다……. 다들 한 주를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비 온 뒤로 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 저는 이제 가을겨울에 적응이 좀 됐어요. 한동안 무척 졸리고 배고파서 계속 자고 계속 먹었죠.
지난 138번째 레터 ‘어쩌다 게임회사에 들어가서’에 남겨 주신 반응을 읽어 볼까요. 좋았습니다! 게임 회사에 재직 중이라서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오랜만에 봤는데요, 마침 이번 글이 너무 좋았어요! 공감되기도 하고요. ^^” 소중한 반응 고맙습니다.  한편 “글자가 너무 많아요.”라는 반응도 있었어요. 글을 주로 하는 ‘한편의 편지’에게 하나의 도전을 안기는 피드백인데요. 이를 의식하면서 오늘은 짧은 글로 긴 여운을 전하려고 합니다. 마치 매주 찾아서 읽는 별자리 점처럼요.
때때로 나는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은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들의 상이 서로 조합된, 일종의 별자리 같은 집합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이미 존재하는 어떤 패턴에 따라 인물들을 서로 연결 짓고 있을 뿐입니다. (중략)
문학적 인물이란 우리의 꿈이면서 우리의 경험과 상상이 빚어낸 보다 고차원적인 형태의 존재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식하고 있지만 자신의 탄생에 관여한 우리 작가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더 큰 계층 구조의 일부는 아닐까요? 그 거대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자연에 의해 쓰인 문학이고, 세상이 꿈꾸는 식물적인, 아니 나아가 무기체적인 상상력의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올가 토카르추크, 최성은 옮김,
문학적 인물들, 두셰이코 케이스」,
『다정한 서술자』 276, 299쪽에서
이 글은 토카르추크가 소설 쓰기에 관해 강의한 내용이에요. 글 제목 「문학적 인물들, 두셰이코 케이스」에서 ‘두셰이코’는 바로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주인공이죠. 경찰서장에게 신성한 분노를 표출하던 그 인물이요.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은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들의 상이 서로 조합된, 일종의 별자리 같은 집합체”라는 도식화가 재미있어요. 우리 역시 “자연에 의해 쓰인 문학”이라는 말은 그런 도식화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하고 있어서 놀랍고요. 이처럼 문학적 인물이 “패턴”이라고 설명하는 게 일견 냉담해 보이지만, 오히려 토카르추크는 창조자의 다정함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낙원에서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에게 다정한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만 했고,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포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283쪽) 이 책의 제목이 ‘다정한 서술자’라는 게 상기돼요.
《한편》 ‘외모’ 호에서 제일 까다로운 문제는 이미지를 둘러싼 것이었는데요. ‘자아 이미지’ 또는 ‘자기상’이라는 개념은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내가 만들고, 그 이미지가 나를 구속하는 상호 작용을 포착하고 있어요. 어려운 대목은 이 이미지가 혼자서, 스스로 작동한다는 점인데요. 토카르추크의 표현에 따르면 이런 식이에요. “윤곽만 드러나 있는 인물의 어렴풋한 이미지에 줌 렌즈를 들이대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순간 그 이미지가 선명해지고 강렬해지더니, 갑자기 세부 항목을 그러내며 고유한 형태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269쪽) 마치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동물을 상상해 내는 것 같은 일인데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인물들 사이에서 패턴 찾기! 저는 같은 대목에서 과학 저술가 필립 볼의 『자연의 패턴』을 떠올렸어요. 첨단 실험실 과학 이전의 생물학은 동식물을 하나하나 관찰해 그 사이의 패턴을 찾고 분류하는 데서 출발했죠. 18세기 후반에 성행한 형태학(morphology)은 그리스어 형태(morphé)와 이성(lógos)의 합성어인데, 자연의 모습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져다 대는 행동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네요. 
같은 책의 첫 번째 글 「오그노즈야」를 보면 그런 인간의 인식 체계가 자연의 이미지를 더 포섭하는 쪽으로 뻗어나가는 변화를 느끼게 되는데요. 이 글에서 토카르추크는 우리가 코로나 시대에 이르러 “당신의 몸은 당신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인간의 몸에서 인간 세포는 43퍼센트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자주 몸을 씻는다 해도 우리 몸은 박테리아나 곰팡이, 바이러스, 고세균 같은 ‘이웃들’의 무리로 뒤덮여 있다. 그중 대부분은 우리 내장 속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서식한다.”라고요. 공생을 인식한 현대인의 자아상이 어떤 모습인지 짧게 인용해 볼게요.
백인 남성, 양복을 입고 코르크 헬멧을 쓴 정복자의 이미지는 점점 희미해지고 사라지는 중이다. 그 대신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그림 속 얼굴들과 비슷한 이미지, 다시 말해 유기론적이고 다층적인 복합성을 띠고 있으며 쉽게 이해되지 않는 하이브리드의 얼굴, 생물학적 맥락에 차용과 참조가 더해진 복합체로서의 얼굴이 거울 속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비온트(biont, 생리적 개체)’가 아니라 ‘홀로비온트(holoobiont)’, 즉 전(全) 생명체다. 
올가 토카르추크, 최성은 옮김, 「오그노즈야」,
『다정한 서술자』 27~28쪽에서
* 이탈리아 화가. 20여 점의 유화와 많은 소묘를 남겼는데 동식물과 사물 등을 조합해 사람의 두상을 형상화한 괴기스러운 환상화 「여름」, 「겨울」, 「물」, 「불」 등으로 유명하다.
작가를 초월해서 떠오르는 인물들…… 그 인물에 대해 들려주는 서술자의 힘…… 전 생명체라는 이미지…… 알쏭달쏭한데요.  지난 레터에서 소개해 드렸던 『소설 만세』의 저자인 정용준 소설가의 『다정한 서술자』 서평을 통해 그 실마리를 한번 찾아볼까요?
이 책을 읽고 작가로서 내가 새롭게 생각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일인칭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 하지만 동시에 일인칭의 협소한 세계에 갇혀 있지 말자. ‘나’라는 주체. ‘개인’이라는 입장. 중요하고 고유하지만 그 고유성과 중요한 마음이 얼마나 타인을 상처 주고 무시하는지도 잊지 말자.
삼인칭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 하지만 동시에 삼인칭의 안전한 거리감에 안주하지 말자. 무감하지 말자. 발견하고 목격한 것에 대해 책임감을 갖자. 서술자는 사건을 묘사하는 자가 아니라 목격한 것을 마음을 담아 말하는 자니까.
사인칭의 마음을 갖자. 서사에서 시점은 단순히 기능과 도구가 아니다. 인물의 눈동자다. 그 인물을 바라보는 피가 도는 눈동자다. 눈동자에는 의지가 있고 마음이 실려 있고 필요하다면 말하고 다가서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살아 있는 렌즈다. 살과 뼈와 시간과 꿈속으로 침투하는 환청이 아닌 진짜 목소리다. 눈동자에 힘을 실어 주는 빛이고 초점을 맞추게 하고 줌 인 혹은 아웃을 가능하게 하는 힘과 능력이다. 눈동자에 담은 것을 마음에도 담고 그 단상을 상상과 연상 나중에는 이야기까지 만들어 내는 창조자다. 
정용준, 「서술자들이여 우리가 다정해지자」,
《릿터》 38호, 95쪽에서
‘외모’ 들어가는 글에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겉모습은 막대하고, 관조의 ‘거리’를 유지하기엔 모든 것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너무 많은 겉모습들을 보게 되는 와중에 정작 나의 외모를 용기 내어 응시할 만한 거리 두기가 어렵다는 현실 인식에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 책임감 있고 무감하지 않은 일인칭과 삼인칭, 그리고 ‘다정한’ 사인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관조의 딜레마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기도 해요. 서평과 함께 실린 올가 토카르추크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가 꿈꾸는 사인칭 서술자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서술자, 예를 들어 개구리의 관점에서 새의 관점으로 자유롭게 시점을 넘나드는 초월적 지위를 가진 서술자, 저자의 한계를 초월하는 서술자”라고 해요.
이야기를 읽는 동안 새와 개구리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다면, 그렇게 여러 관점으로 외모를 바라볼 수 있다면 외모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헉, 두 분의 인용 폭발! 폴란드의 소설가, 영국의 과학저술가, 한국의 소설가까지 이어서 보니까 이 자체로 세 사람의 시점 교차가 되었네요. 이런 공개적인 생각의 흐름이 저는 재미있는데 구독자 분은 어떠신가요? 아래 버튼을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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