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어쩌다 게임회사에 들어가서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
지난 레터에서 현실의 옷차림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가상세계의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심민아 작가의 장편소설 『키코게임즈: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는 어쩌다 게임회사에 다니게 된 ‘겜알못’ 유라의 이야기예요.
게임 세상에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캐릭터들이 돌아다니고, 이들은 클릭 한번에 옷을 갈아입고 외모를 바꿔요. 게임과는 거리가 먼 유라는 현실과 다른 가상세계의 모습에 혼란을 느끼며 오늘도 출근을 합니다.
아침, 판교행 버스에서 언제나 기이한 감각을 느낀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향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피곤을 달고 실려 간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0과 1로 만들어 화면 속에 반짝반짝, 진짜인 것처럼 만들려고, 지금 존재 중인 사람들이 존재하는 하품을 밀어 내며 실려 간다. 사람들의 검은 머리통은 저마다 서로 다른 판타지를 품고 있다.
뱀파이어, 외계인, 교복 차림으로 줄지어 선 미소녀들(심지어 고양이 귀와 꼬리를 가진), 엘프, 오크, 세이렌, 슬라임, 좀비, 드워프의 복잡한 공존. 마법과 기술이 횡행하는 세계. F=ma와 그래비티 위에 반과학이 흘러넘치는 세계. 크리스털과 생명물약의 지배를 받으며, 유사 연애와 가짜 연애가 아무렇지도 않고, 우주 최강자들이 넘쳐 나는 세계. 그놈의 세계관이 넘치고 넘쳐 나는 세계.
‘그것’을 만들러 가는 만성 안구건조증 환자들이 스마트폰 액정으로 남들이 만든 ‘그것’을 보면서 ‘그것들’이 모인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 심민아, 『키코게임즈: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 26~27쪽에서
그런데 0과 1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아요. 가상세계의 외양을 만들어 낼 때 참조하는 상상력 창고에 내가 본 소설, 영화, 드라마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팀장님은 나의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플레이 감상이 궁금하셨던 것 같다. 팀 점심 날, 옆자리에 앉자마자 물어보셨다. 재밌었다는 빈말은 못했다. 사실 조작이 아직도 어렵다고, 주변 캐릭터와 설정이 아무리 게임이지만 과장되어서 오그라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팀장님은 끙, 하며 아쉬워했다. 그건 취향 전파에 실패한 호모사피엔스의 안타까움의 표현이자,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오그라들면 앞으로 ‘이세카이’에서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올 몬스터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걱정의 소리였을 것이다.
그날 팀원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의 성장 배경이 어떻든 게임 취향이 어떻든 간에 다들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했지만 어쨌든 다들 절대 반지와 해리포터 속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 정거장을 마음속에 하나씩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힘들고 지칠 때, 상상력과 뭔가 남다른 것이 필요할 때 마음속 어딘가 자신만의 쉴 만한 물가로 도피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 장소가 하나로 수렴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쉴 만한 물가란 없는 것이다. 거기 가면 이미 온갖 인종의 온갖 인간들이 북적이고 있는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Hân hạnh được biết bạn…… Enchantée……
실례합니다…… Xin lỗi, vui lòng cho tôi đi qua…… Excusezmoi……
전 세계 사람들이 누운 데를 비집고 들어가 조그맣게 ‘메이드 인 코리아’ 태그가 붙은 면 100퍼센트 타월을 깔고 나의 기다란 팔다리를 옹송그리고 누워 눈을 몇 번 끔뻑이고 있노라면, 솜사탕도 번데기도 반미에 냉커피도 크레페도 섞어 파는 지나가던 손수레가 일어나서 이거부터 사 먹으라고 나를 일으켜 세울 것 같다.
이봐, 아가씨, 일어나. 돈은 내고 누워야지. 자릿세 몰라?
─ 심민아, 『키코게임즈:
호모사피엔스의 취미와 광기』, 52~53쪽에서
천방지축 가상세계를 만드는 어리둥절 제작자 이야기! 짧은 연휴를 보내고 출근한 터라 직장인 커피 타임 대목에 관심이 가네요. 팀원들이 “각자의 성장 배경이 어떻든 게임 취향이 어떻든 간에 다들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분석이라니. 점심시간 화제에 못 따라갈 때 혼자서 속으로 사람들을 관조하며 버텼던 나의 모습과 겹쳐지고……
가상세계의 외양이 현실과 아주 다르고, 그러면서 동시에 현실을 참조한다는 까다로운 생각거리를 던져 주시니, 게임을 안 한 지 오래인 저는 철학책을 꺼내 봤어요. ‘먼 곳의 이미지를 눈앞에 펼쳐 놓는 화면’이 발명되고 나서부터는 현실이 먼저이고 현실의 재현이 나중이라는 도식이 희미해진다는 건데요. 그 유명한 보드리야르가 TV를 분석하는 대목입니다. 《한편》 9호 ‘외모’의 제사가 나온 책이기도 하죠! 시뮬라시옹……simulation……시뮬라크르……simulacres……
문제된 것은 전통적인 인과의 양태이다. 원근법적인, 결정론적인 양태, <능동적이고>, 비평적인 양태, 분석적인 양태, 즉 원인과 결과의 구별,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의 구별, 주체와 대상의 구별, 목적과 수단의 구별이 그것이다. 이러한 양태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TV가 우리를 보고, TV가 우리를 소외시키고, 조작하며,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이 모든 것은 대중 매체에 대한 분석적 개념에 종속되어 있다. 능동적이고 효율적인 외적 인자의 개념, 소실점으로서 실재와 의미의 지평을 갖춘 <원근법적인> 정보 개념 말이다.
그러나 TV를 DNA의 양태 위에서 어떤 효과로서 생각해야만 한다. 이 효과 속에서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최소한의 거리를 항상 유지하고 있었던 낡은 극적 도식이 그의 중심축들을 핵반응처럼 수축하고 재수축함에 따라서 결정의 대립극들이 사라져 버린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최소한의 거리란 정확히 말하면 의미의 거리이다. 이 거리는 또 떨어짐, 다름, 가능한 유지되어야 했던 최소한의 떨어짐이다. 이 떨어짐은 더 이상 작게 축소될 수 없는 거리로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안정하고 비결정의 과정 속에 흡수되어 버린다. 담론이란 것은 한계지어진 질서이기 때문에 담론은 이 불안정한 비결정의 과정을 고려할 수 없게 된다. 
─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스마트폰 액정으로 남들이 만든 ‘그것’을 보면서 ‘그것들’이 모인 ‘그곳’으로 가는” 사람…… 네, 여기 있습니다.  게임을 안 한 지 오래되어 철학책을 펼친 리트리버 편집자님과 달리 PC 게임부터 스마트폰·온라인 게임까지 적잖게 ‘그곳’에 가 본 저는 이 대목에서 뼈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교복 치마, 고양이 귀, 고양이 꼬리라는 세 단어는 늘어놓고 보니 너무나 뜨악하지만, 저 역시 판타지적인 아이템을 모으려 혈안이 되었던 때가 있었단 걸 부정할 수 없네요.
최근에는 스마트폰이 아닌 게임기 액정’ 너머로 새로운 가상세계에 접속할 일이 있었습니다. 무인도에서 동물 주민과 함께 나만의 삶을 꾸린다는, 몇 년 전 유행한 인기 게임을 이제야 해 본 것이죠. 그런데 이번 《한편》에 실린 김애라 연구자의 글 「메타버스 아바타의 상태」를 읽고 난 후라서인지, 초기 캐릭터 설정 단계의 이 문구가 눈에 밟히더군요. “이번 기회에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한다 생각하고 마음껏 꾸며주세요!”
게임 개발자들은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으니 ‘마음껏 꾸며’ 보라고 했지만 저는 늘과 같이 조금 짙은 피부색에 검은 머리, 짙은 갈색 눈을 선택했어요. 미션을 진행할수록 피부색, 머리 색, 눈 색의 옵션이 늘어났으나 제 눈에 낯선 한없이 새하얀 피부, 핑크색 머리, 청록색 눈은 5분 체험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나를 대신해 세운 게임 캐릭터의 외양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요? 최근 재개봉한 「아바타」를 보고 나니 파란 피부도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기분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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