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쏟아지는 신상 옷과 어리둥절

 

 

옷차림 이야기
지난 주 정기구독자께 이번 ‘외모’ 편이 선발송되었어요. 이제 온오프라인 서점에서도 이번 호를 만나보실 수 있는데요. 다양한 ‘보이는 것’을 다루는 열 편의 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끄는 제목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9월 말이 되어서도 여름옷 정리를 하지 못한 저는 아무래도 패션 칼럼니스트 박세진의 글 「패션 역주행에 대처하는 법」에 눈길이 갑니다. 작년 이맘 때, 자주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미우미우의 언더붑(가슴 아래가 보이는 상의), 로라이즈(밑위가 짧은 하의) 룩 이미지가 올라오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쁘다’기보다 ‘망측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나요. 이런 반응이 무색하게 곧 많은 셀럽이 상의와 하의의 아랫배 부분을 잘라낸 옷을 입고 숨겨 두었던 복근과 허리 라인을 뽐냈지요. ‘대체 패션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하며 혼란을 느끼던 와중에 아래 문단을 만났어요.
스웨터나 셔츠 아래를 잘라 버리고, 쇼트 팬츠를 가슴까지 끌어 올려 브라톱을 만들기도 한다. 하의로는 극단적으로 짧은 미니스커트나 바지가 나온다. 내부에 감춰져 있던 주머니가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스커트 밑단은 대충 자른 듯 실이 너풀거린다. “이런 답답하고 재미없는 옷이라니!”라고 외치며 가위를 들고 면 셔츠와 바지를 자르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런 컬렉션들을 이해하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될 듯하다. 긴 양말과 로퍼 같은 아이템이 룩의 완성을 돕는다.
재미있는 점은 상의–배–하의 구성이 이루는 비율이다. 크롭톱과 미니스커트 사이의 간격은 꽤 먼데, 목에서 허벅지까지 옷으로 덮인 신체 구간은 대략 2.5 대 3 대 2 정도로 나뉜다. 즉 상의나 하의가 몸을 가린 부분이 가운데 드러난 배 부분보다 조금씩 작다. 이 비율은 기존 크롭톱 룩과 달리 허리의 길이를 극대화하고 있어 살짝 낯설게 느껴진다. 위에서 상상한 스토리를 다시 떠올려 보자면 쓱쓱 자르는 서툰 손길 덕분에 비율이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학생복 소재로 만든 언더붑이나 바지를 끌어 올린 크롭톱 같은 걸 보면 전반적으로 기존의 옷차림을 약간씩 뒤틀며 장난을 치고 있다. 말하자면 패션식 유머라 하겠다.
─ 박세진, 「패션 역주행에 대처하는 법」,
《한편》 9호, 53~54쪽에서
이제까지 잘 입고 다니던 옷을 ‘재미없다’며 슥슥 잘라버리는 패기…… 당혹스러운 한편 패션계에서 쓰이는 유머의 용법을 새로 깨닫게 된 대목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외모를 볼 때 그 사람의 얼굴과 몸 다음으로 몸 위에 걸치고 있는 것들을 봅니다. 외모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패션은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런 패션의 대세는 시대의 맥락과 늘 공명합니다. 같은 글에서 박세진 칼럼니스트는 다시 돌아온 로라이즈 유행에 대해 “오버사이즈 룩과 원마일웨어(집 근처 1마일 내에서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차림새) 등 노출 없는 패션이 한동안 대세를 이뤄 온 것을 떠올리면” “최근 패션의 방향에 대한 반항 그 자체로 보인다.”라고 말해요.
너무 마른 몸을 추구하기보다 지금의 몸에 맞춘 옷을 찾아 입자는 최근의 대세와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패션계의 ‘신상’이 충돌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패션계의 ‘퍼 프리 선언’에 이어 인공적인 재활용 소재의 가치를 강조하는 ‘비건 패션’ 기조도 언젠가 비슷한 역풍을 맞지 않을까요?
양적으로만 보면 시중에 비건 아이템은 매우 많다. 보통 천연 가죽, 천연 모피는 비싸고 고급스러운 소재, 합성피혁, 인조 모피는 가죽이나 모피를 대체하는 저렴하고 품질이 낮은 소재라는 인식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소위 가짜 가국, 가짜 모피로 제품을 만들 때는 디자인이나 내구성에 공을 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격이 싸면 비건 제품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저렴한 아이템들은 대부분 비건 제품이다. 
하지만 소재는 더욱 다양해지고, 동물성이든 비동물성이든 소재의 퀄리티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우리는 시중에 나온 것들 중에서 가장 좋고 비싼 소재를 사용해 코트를 만들었다. 동물성 소재를 사용하지 않고 디자인적으로 세련되고 퀄리티 높은 제품을 선보이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스텔라 매카트니, 랄프 포렌, 비비안 웨스트우드, 아르마니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들의 퍼 프리 선언 덕분에 인조 모피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
모피의 그림자를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 같았던 페이크 퍼가 패션에서 주목받는 것 자체가 큰 변화다. 인조 모피는 천연 소재가 고급이라는 인식을 깨고 동물성 소재를 합성 소재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또 페트병을 재활용해 만든 폴리에스터 원단이나 가죽의 대체재로 파인애플, 사과, 와인, 버섯, 선인장 같은 식물성 기반의 환경친화적인 소재가 계속 개발되고 있다.
─ 신하나, 「우리의 것이 아닌, 낫아워스」,
《릿터》 24호, 42~43쪽에서
패션에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기능과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기능이 공존하는 한 이런 역주행 현상은 불가피하겠지요. 매 계절 옷사기가 고역인 저로서는 디자인만 맘에 든다면 ‘인공적인’ 소재로 인한 마이너스는 없을 듯하지만, 갖고 있는 코트를 한철 더 입는 쪽을 택할 것 같아요. 다만 이제는 패션계의 유행을 남의 일 보듯 하기보다 ‘로라이즈 치마는 내 눈에 별로야’라든가 ‘비건 브랜드의 옷이라면 한 번 사 보고 싶어’라는 말을 꺼낼 수 있을 듯해요. 다른 분들은 요즘 패션 트렌드에 대해 속으로만 품고 있던 감상이 있나요?
저도 패션식 유머를 읽어 내고 구현해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서도 그러기 위해 써야 할 돈과 시간, 자원을 생각하면 아득해져요.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환경 파괴와 자원 낭비를 외면할 수 없는 때인 만큼 일단 많은 아이템을 사서 옷장을 채우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옷은 나를 표현하고, 내 겉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아주 용이한 수단이기도 하잖아요. 그 사이에서 고민을 멈출 수가 없네요……. 품을 들여 내가 선택하고 입을 옷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또 이후엔 어떻게 될지를 알아보고, 나에게 맞는 옷이란 뭘까를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작년부터 계절마다 옷을 딱 하나만 사자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했는데요. 그러다 보니 옷의 소재나 디자인의 출처 등 옷에 관한 정보를 더 모으게 되어요. 패션 칼럼니스트 박세진의 글이 말하는 ‘일상복 탐구’도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 패스트 패션과 더 멀어질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어요.
저는 편한 옷차림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저만의 스타일을 발견해 가고 싶은 욕망을 늘 품고 있어요. 유행에 뒤쳐지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고요. 게다가 유행이란 정말 무서워서, 여름에 편하게 입을 흰 티셔츠를 주문했더니 크롭티가 도착했어요. 예쁜 초록색이라 선택한 카드 지갑은 선인장으로 만든 가죽 재질이었고요. 최신 유행과 패션식 유머에 저도 들어와 있었던 셈이죠.
패션 옆에 ‘유머’라는 단어를 놓으니 요새 방영 중인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한 대목이 생각나요. 유능하고 성공한 정치인 남편 옆에서 단정하지 않고 화려한 옷차림을 하는 여자에게 누군가 “옷을 왜 그렇게 입냐” 물으니 그는 “유머”라고 답해요. 여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차림이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동시에 남편을 더 똑똑하고 능력 있어 보이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대중의 반응을 유도하고 비트는 패션을 ‘유머’라고 표현한 거죠. 
드라마를 보면서 “유행과 패션은 의상 분야의 여론”일 뿐이라는 발자크의 말을 떠올렸어요. 발자크는 옷차림이 감각적으로, 은밀한 듯하지만 실상 노골적으로 나를 남과 구별 짓는다고 말해요. 그 구별의 기준은 바로 여론이고요. 생각해 보면 특정 옷차림을 두고 ‘재미없다’, ‘힙하다’, ‘우아하다’ 하는 여론이 모여 유행과 패션을 만들어 내지요. 여러분은 유행의 물결에서도 가급적 지키려 하는 원칙이 있을까요? 더 나아가 나만의 ‘유머’가 있다면요?
한 인간의 정신은 그가 지팡이를 든 스타일로 짐작할 수 있다. ‘구별’은 일반적인 것이 되면 가치가 떨어지고 소멸한다. 그러나 구별의 기준을 분명히 알리도록 책임을 떠맡은 강력한 힘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여론이다. 유행과 패션은 의상 분야의 여론이었을 뿐이다. 의상은 모든 상징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므로, 혁명 또한 유행과 패션의 문제이자, 생사(生絲)와 나사(螺絲), 비단을 짜는 사람들과 비단으로 짠 옷을 입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었다.
 
─오노레 드 발자크, 고봉만·박아르마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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