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호의 뒤표지 안쪽까지 정독한 독자분이라면 다음 호 주제가 ‘외모’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편집부에서는 ‘외모’ 호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콘텐츠’와 ‘외모’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는 책을 한 권 소개해 드려요. 220년 전인 1795년, 20년 가까이 재위한 노련한 왕이었던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기획하고 연출한 한국사 최대의 정치 콘텐츠! 성대한 외모의 대축제 현장을 담은 책 『의궤, 8일간의 축제』입니다.
구름처럼 모여든 백성
1795년 윤2월 8일, 한성(한양) 도성은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평소에도 저잣거리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지만, 이날은 그야말로 사람으로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의막(依幕)까지 들어섰지만, 그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의막 앞은 하룻밤 거처하게 해 달라고 사정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밤에도 소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면 곤장을 맞아야 했지만, 이날은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통행금지가 일시적으로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다시없을 구경을 위해 아들 손을 끌고 상경한 한 아비는 의막을 구하지 못해 처마 밑에 자리를 잡았다. 불 밝힌 주막은 대목을 놓칠세라 손님맞이에 분주하고, 제각기 모여 앉은 무리는 서로의 목격담을 경쟁하듯 내놓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여염집 규수를 희롱했다는 얘기부터, 한강 최고의 명당자리를 잡기 위해 모 대감 댁의 하인들이 육탄전을 벌였다는 얘기, 심지어 길에서 아이를 낳는 일을 보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렇게 한양에 사람이 몰려든 이유는 큰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모두 국왕이 어머니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축제를 연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효심 지극하고 백성을 아끼는 왕은 행차길 구경꾼을 막지 않고 오히려 장려한다고 했다. 살면서 왕을 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들었다. 억울함이 있는 사람은 재수가 좋으면 왕에게 직접 고할 수도 있다고 하니, 왕이 지나갈 길목마다 자리싸움에 난리 법석이었다. 전국의 장사치들도 때를 놓칠세라 밀려드니, 한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소란스럽고 혼잡했다.
지상 최대의 축제
축제의 이름은 ‘행행(行幸)’, 즉 ‘행복한 국왕의 행차’라는 뜻이었다.
국왕의 행차는 매년 있었지만, 올해의 행행은 급이 달랐다.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질 예정이었다. 축제 기간은 8일로,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에 다녀오기로 되어 있었다. 행선지가 수원이 된 까닭은 그곳에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행차는 참여 인원은 물론 동원된 마필과 책정된 예산도 역대 최대였다. 행렬에 참석하는 인원만 6000명, 동원된 말만 1400필이었다. 행차에 책정된 예산은 10만 냥으로, 1냥을 오늘날 화폐가치 7만 원으로 계산하면 약 70억 원이 투입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행차였다.
정조는 이를 위해 2년 전부터 예산 마련에 들어갔다. 1793년(정조 17년) 1월 선혜청 당상으로 있던 정민시(鄭民始, 1745년~1800년)에게 예산 마련을 지시해 놓았다.
─ KBS 의궤, 8일간의 축제 제작팀,
『의궤, 8일간의 축제』, 25~27쪽에서
최고 인기 아이돌의 콘서트 현장이 떠오르는 축제 현장이네요.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밤! 들뜨고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규모도 어마어마한데요. 저는 2년 전부터 예산 마련에 들어간 정조의 철저함에 놀라고 말았어요.
그런데 220년 전의 이 화려한 행사는 수원화성문화제에서 재현되고 있다고 해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비밀은 바로 기록! 국가 행사 매뉴얼인 ‘의궤’에 준비 과정부터 절차와 진행, 사후 포상, 발생했던 문제와 앞으로의 유의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고 하네요. 기록만이 답이다…… 현대에 재현된 행사의 모습도 함께 살펴봐요!
220년 전으로 들어가는 문
매년 10월이 되면 수원(水原)은 떠들썩해진다. 타임머신을 타고 거슬러 올라온 듯 조선 시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장안문(長安門)과 화성행궁(華城行宮) 일대를 가득 메운다.
취타대의 가락이 사방을 휘휘 맴돌고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룬다. 그 위로 엄청나게 큰 깃발이 눈에 띈다. 옥색 바탕의 천에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마주 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테두리에는 불꽃 모양의 화염각(火炎脚)을 잇대어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시대 국왕의 거둥을 상징하는 깃발인 용기(龍旗)다. 왕을 상징하는 수많은 의장 사이로 드디어 왕이 등장한다. 발 디딜 틈 없이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카메라의 셔터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이처럼 수원 사람들은 매년 10월이 되면 조선의 국왕과 인사를 나눈다.
축제의 주인공은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正祖, 1752년~1800년)다. 정조는 조선 후기를 문화적 황금기로 이끈 군주로, 세종과 더불어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손꼽힌다. 이 축제는 1795년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고자 수원에 행차해 성대한 잔치를 벌인 8일간의 일들을 재현한 ‘수원화성문화제’다. 당시에 정조는 약 6000명에 이르는 수행원을 이끌고 수원으로 가서 회갑 잔치, 과거 시험, 대규모 군사훈련, 양로 잔치 등을 열었다.
조선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그 축제가 수원화성문화제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국가 행사 매뉴얼, 의궤
비밀은 ‘의궤’에 있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당시의 성대했던 모습이 글과 그림으로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궤는 ‘의식(儀式)’을 뜻하는 ‘의(儀)’와 바큇자국을 뜻하는 ‘궤(軌)’의 합성어로, ‘의식의 본보기’라는 뜻이다. 조선 왕조는 국가나 왕실에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모든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 두었다. 일종의 ‘국가 공식 행사 보고서’였던 셈이다. 왕실의 혼례부터 세자 책봉, 장례, 연회, 사신 영접이나 궁궐 및 성곽의 건축까지 중요한 행사는 놓치지 않았다. 이는 모두 예법에 맞게 행사를 치르고 다음 행사 때 시행착오 없이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