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을 같이 읽어요! 사흘 동안의 연휴가 지나갔어요. 다들 연휴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이틀은 집에서 쉬고 셋째 날 극장에 가서 무서운 영화를 봤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깜짝! 유령을 보았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어두침침한 모서리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어른거리고 있는 거예요.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눈을 비비고 다시 본 그는…… 사무실에서 마주쳐야 마땅할 동료 편집자였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콘텐츠를 또 보다니, 하하하…….(썰렁) 《한편》 8호 ‘콘텐츠’를 둘러싼 이야기도 이제 막바지. 다음 호인 ‘외모’로 넘어가기 위해서 오늘은 시 한 편을 들고 왔어요. 릴케의 시 한 대목과 해설입니다.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1923)는 우주의 거대한 공간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원초적인 세계의 힘 가운데 놓인 인간의 삶에 대한 긴 명상이다. 여기에서도, 모든 것을 해체하는 듯한 큰 힘의 주제는 계속되지만, 이와 더불어 릴케는 사물과 삶 그리고 그 이미지의 창조가 그러한 힘의 확인의 다른 이면을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제1비가」의 첫 연은 인간의 모든 것이 부정되는 우주의 무한함에 대한 처절한 부르짖음이다.
상하로 도열한 천사들 가운데, 어느 누가 나의 외침을 들을 것인가? 그중의 한 천사가 나를 포옹한다 한들 나는 그 존재의 힘에 자지러질 것을. 아름다움이란 무서움의 시작일 뿐 우리는 가까스로 견디고 하찮은 우리를 짓부수지 않음이 놀라울 뿐. 모든 천사는 무서운 존재임에.
우주 공간의 천사의 관점에서 볼 때, 지상의 존재인 인간의 일은 너무나 무의미하다. 아름다움은 인간이 하늘의 질서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이나 그것의 참의미는 인간을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가는 여러 변주를 통하여 결국 사람은 아름다움 — 어쩌면 인간적인 것으로 변용된 아름다움을 통하여 인간을 넘어가는 우주적인 것과 사람의 필요 사이에 위태롭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매일 보는 언덕 위의 나무, 늘 그렇게만 있을 듯한 익숙한 것들의 무변화 — 이러한 것들이 사람의 삶을 지탱하여 주지만, 밤이 오면, 우주 공간의 밤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의 얼굴을 문드러지게 한다. 그러나 밤은 조용하게 환각을 깨우는 자이면서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런 만큼 그것은 이미 인간의 마음의 일부이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그 사랑이나 영웅적인 행동 — 그 소망의 실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소망이 순전히 인간의 주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구 자체가 불러내는 것임을 — 객관적 동기에 의하여 불러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소망에서 나오는 소리를 성자의 경건함으로 조심해서 듣는다면, 그것은 땅을 벗어나는 어떤 거대한 것으로 변모한다.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를 잘 들으면, 거기에는 정적으로부터 나오는 쉬지 않는 전언(傳言)이 있다. 거기로부터 삶에 대한 대긍정, 삶과 죽음, 우주의 비인간성과 삶의 소망 사이에 존재하는 삶에 대한 대긍정이 나온다. 이것을 언어로, 미술품으로, 일용품으로 표현하려 해 왔던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 김우창, 「해체와 이성」
『김우창 전집 14: 산과 바다와 생각의 길』 378~379쪽 중에서
천사의 관점에서 볼 수 없는 인간인 저는 이 글을 읽고 아름다움을 마주쳤을 때 제가 어떻게 했는지 돌아보았어요. 요새 ‘아름다움은 복제 행위를 부추기고, 심지어 요구한다’, ‘아름다움은 신중을 부추긴다’라고 말하는 책을 들춰 보는 중인데요. 공휴일의 극장에서도 방금 스크린에서 본 무서움과 아름다움을 머릿속에 신중하게 다시 그려 보다가 유령 같은 실루엣을 마주쳤어요. 이것은 현실인가 환상인가…… 뒷걸음질치다가 다가와 팔을 잡는 리트리버 편집자님 덕분에 정신을 차렸답니다.
우주 스케일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시를 읽으니 자연히 제 기억 속 장엄한 자연 풍경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자연물은 대부분 산이에요. 분단선 넘어 찾은 금강산 냇물의 반짝거림, 실제인지 사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감 없었던 알프스산맥의 설경, 글로 짐작한 것보다 훨씬 커서 창밖을 보는 내내 초점을 조정해야 했던 지리산 등…… 시끌벅적한 일행 사이에서 “멋지다!” 한마디로 이들을 대할 때와 달리, 조용히 혼자 그 실물과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릴케가 말한 ‘무서움’에 훅 빠져드는 듯해요. ‘어쩌다 저 대단한 것과 내가 이 자리에 같이 있을까?’ 하고요.
이런 감상에서 우주의 무한함에 보내는 찬사란 일상과 차원이 다른 특별한 경험으로 이미 분리된 셈인데, 이때의 아름다움과 평소 “언어로, 미술품으로, 일용품으로” 변모한 것들에 느끼는 아름다움을 비교해 보고 싶기도 하네요. 내 인생에 인공적인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경험이 있었나? 애초에 나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나 하고요.
‘아름다움’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역시 추상적인 생각으로 흐르게 되네요. 뇌가 재가동되기 시작하는 공휴일 다음 날에는 이처럼 두서없는 이야기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릴케의 「제2비가」도 읽으면서 마칠까요? 역시 『김우창 전집』의 번역이에요.
처음 복되었던 것들, 창조의 귀염둥이들, 높은 산이며, 아치 햇살 비추는 창조의 산봉우리들 — 꽃피는 신들의 꽃가루들, 빛의 마디와 굽이들, 통로며, 계단이며, 옥좌며, 존재의 공간들, 기쁨의 방패들, 폭풍처럼 휘몰아 사로잡는 감정, 그리고 홀연, 홀로, 흘러 나갔던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다시 스스로의 얼굴에 다시 거두어들이는 거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