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당신에게 콘텐츠란?”

 

 

《한편》을 함께 말하는 자리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 주 사이 날씨가 어쩜 이렇게 오락가락하는지 모르겠어요. 더웠다가 습했다가, 비가 왔다가 갰다가……  바쁘디 바쁜 현대인의 마음은 왔다 갔다 하는 주변 온도처럼 좀체 가만 있지를 않아요.
이런 제가 요즘 가장 집중하려 애쓰는 일은 《한편》과 ‘탐구’ 행사 기획이에요. 그간 《한편》을 읽어온 분들이라면 매호 출간 후 열리는 필자와의 온·오프 세미나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호의 세미나는 조금 색다르게 《한편》 편집자들이 직접 진행에 나서기로 했어요. 독자 분들과 한자리에 모여 《한편》의 주제 선정부터 잡지·책 출간에 이르는 콘텐츠 기획까지 폭넓게 이야기해 보려고요.  《한편》 애독자와의 만남에 두근거리지만 행사 날을 생각하면 떨렸다가 흥분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상태가 되는 심정이 짐작되시나요? 
한창 일에 과몰입하다가 ‘콘텐츠 시대에 우리가 만드는 《한편》 유니버스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이런 망상에 대한 실마리도, 독자와의 만남 준비도 그 시작점에는 역시 ‘여러분께 콘텐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어요. 사실 ‘콘텐츠’ 하면 ‘언제든 상품이 될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이번 호에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든 조영일 평론가의 글 첫머리를 인용해 봅니다.
콘텐츠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단수형인 콘텐트(content)였다. 1994년의 일로, 하루키식으로 말하자면 커트 코베인이 자살을 하고 김건모의「핑계」와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이 대히트를 치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다. 하지만 1994년은 무엇보다 인터넷 상용 서비스가 시작된 해였다.
콘텐츠라는 신조어가 비교적 빨리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의 보급, 즉 정보통신의 발달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네트워크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동시켜야 비로소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1995년부터 시작된 IT버블은 김대중 정부가 쏟아 낸 벤처기업 육성책 덕에 한국에서도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IT, 벤처, 인터넷, 디지털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주가가 폭등했다.
흥미롭게도 복수형 콘텐츠를 한국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일본에서도 1995년을 전후로 이 단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1995년의 9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제10회 ‘한일 하이테크 세미나’에서 당시 세가의 부사장이었던 이리마지리 쇼이치로(入交昭一郞)는 “멀티미디어는 하드웨어, 네트워크, 콘텐츠 등 3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콘텐츠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조영일, 「콘텐츠 시대의 예술작품」,
《한편》 8호 ‘콘텐츠’ 중에서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복합적인 감정이 떠올라요. ‘봐, 역시 콘텐츠는 1990년대 IT 붐과 국책 사업 부흥 분위기 속에 선택된 단어잖아!’라는 자기 확신이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복수형 콘텐츠를 쓰지 않는다고? 그럼 이 혼란을 뭐라고 불러?’라는 배신감과 호기심이 있었어요. 같은 호 「핫플레이스의 온도」를 쓴 콘노 유키 큐레이터는 “일본에서는 콘텐츠보다 소재(素材)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라고 지적했는데, 지금 시점에서 콘텐츠 용례를 다시 탐구하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네요.
이쯤 되니 이번 설문조사에 대한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설문 문항 속 ‘콘텐츠’를 보며 어떤 생각을 떠올리셨나요?
오늘 본 인터뷰에서 한 국회의원이 “우리 당에는 콘텐츠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재미있게도 기사 본문에서는 “첫째도 내용, 둘째도 내용이 필요하다.”라고 되어 있었는데요. 인터뷰에서는 ‘콘텐츠’라고 말하고 기사를 편집하면서 ‘내용’이라고 수정한 것인데, 둘 사이의 어감 차이를 느끼시나요?
덕질로 삶을 충전하는 편집자 님의 마케팅 고민에 공감하면서 저는 오늘날 인문학에 필요한 게 뭘까 생각해 보는데요. 때로는 콘텐츠는 너무 많은데 내용이 없는 게 갑갑하고, 때로는 내용은 분명히 있는데 ‘콘텐츠=팔리는 문화상품’이 되지 못하는 게 답답해요. 이런 상품화의 굴레에 갇힌 현대인에게 돌파구는 실제 접촉인데요. 설문조사의 소중한 답변들에서 스마트폰 화면 너머의 목소리를 듣고 있어요.
“콘텐츠에 관해서 무엇을 알고 싶나요?”라는 문항에 “콘텐츠를 현명하게 소비하는 법”이라고 적었습니다. ‘매일 콘텐츠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이라는 이름 그대로 늘 넘쳐 나는 콘텐츠 사이를 둥둥 헤매고 있거든요. 유튜브의 ‘나중에 볼 동영상’에는 무려 246개의 동영상이 있고, ‘나중에 읽어야지’라는 마음으로 스크랩한 링크는 75개,  ‘나중에 들어 봐야지’ 하고 저장해 둔 음악 플레이리스트는 23개…… 막상 다시 보지는 않으면서도 언젠가 보리라는 미련에 지우지 못한 목록들이에요. 목록이 길어질수록 소비할 시간은 더 줄어드니, 더 격렬해지는 콘텐츠의 파도에 무방비로 몸을 내맡기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콘텐츠 탐색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오히려 명확해 보여요. 새로운 뉴스레터, 주위 사람들이 추천하는 영상, 좋은 것만 모아져 있다는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눈이 번쩍 뜨이거든요.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밖에요. “어떻게 하면 콘텐츠를 지금보다 잘 소비할 수 있을까요?”
레터의 제목을 보고 ‘그렇다면 책은 무엇입니까!’를 떠올린 저, 영락없는 출판사 직원일까요? 콘텐츠와 《한편》을 함께 생각하자면, 《한편》 3호에 실렸던 강혜민 비마이너 편집장의 글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장애인 투쟁 현장의 열악함을 다룬 글이 ‘환상’이라는 주제에 실려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인데요. 이 글은 제게 읽기에서 시작해 다른 콘텐츠를 거쳐 다시 읽기로 돌아오는 과정의 재미를 알려 주기도 했어요. 강 편집장의 글을 보고 유튜브로 건너가 다큐멘터리와 여러 인터뷰 영상을 본 후 같은 글로 되돌아오니, 새로운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되고 이전에 떠올리지 못한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었거든요. 이렇게 여러 형식의 콘텐츠를 옮겨 다니는 시간이 어떤 깊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저는 책을 쥘 때 특히 실감해요. 그래서 밀려드는 콘텐츠들 틈에서도 책을 놓을 수 없나 봅니다.
최근에는 ‘탐구’ 시리즈의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을 완독했어요. 매 장마다 밑줄도 많이 긋고, 플래그도 잔뜩 붙여 두었답니다. 이번 《한편》 세미나에서 편집자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나면 아마 더 많은 밑줄과 플래그가 생기겠지요. 세미나 전에 탐구 시리즈를 모두 읽어야 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바쁩니다. 모든 것이 콘텐츠가 되는 시대, 이번 세미나가 독자 분들에게 어떤 콘텐츠로 다가가 얼마만큼의 깊이로 남게 될지도 궁금해요.
세 분의 코멘트만 보아도 벌써 ‘콘텐츠’ 이야깃거리가 한가득이네요.  생산자·유통자·소비자로 대표되는 콘텐츠를 대하는 방식, 콘텐츠의 정의에 관한 서로 다른 관점, 다양한 콘텐츠의 형식 등 무한히 늘어나는 경우의 수는 혼란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살필 탐구 주제가 많다는 점은 묘한 흥분과 설렘을 주기도 해요.
이번 달 초 진행된 탐구 시리즈 저자 세 분의 대담에서 “더 연결된 인문학이 더 튼튼하다.”라는 문장을 접했어요. 《한편》이 심은 인문학의 씨앗도 제각기 다른 속도로 자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땅과 줄기와 꽃가루가 연결된 곳에서 콘텐츠와 책, 인문학 고민을 나누어 보면 어때요?
질문: 지금 우리에게 인문학이란.
박동수: “더 연결된 과학이 더 튼튼하다”는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말을 빌려, ‘더 연결된 인문학이 더 튼튼하다’고 말하고 싶다. 인문학은 학문적 연구와 대중적 소통이 서로 긴장하고 지탱하는 순환 속에서 풍부해진다. 인문학의 위기는 앞서 잡지, 문예지 등이 수행하던 순환의 중간 단계가 무너짐으로써 발생했다. 학문 최전선의 논의를 대중적 장에 전달하는 작업들이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
임소연: 지금까지는 학문 간 장벽 때문에 인문학의 영역에 과학기술이 계속 존재해왔다는 사실이 쉽게 잊혀졌다. 인문학자들이 생태에 대해 논할 때, 그에 앞서 인간 아닌 존재들에 대한 지식을 오랫동안 축적해온 자연과학자와 공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윤아랑: 폭로만으로 완수되지 않는 비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나쁘다’ 이후의 실천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때 같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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