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탐구의 모든 것

 

 

《한편》이 탐구가 되기까지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편》의 편지를 꾸준히 열어 본 독자님이라면 《한편》 편집부가 준비하는 새로운 인문 시리즈의 존재를 알고 계실 듯해요. 지난 5월 민음사 춘계 학술대회 ‘탐구하는 생활’에서는 저자가 직접 책의 내용을 소개했죠. 6월 서울국제도서전에 먼저 공개된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도서전 베스트셀러 1위 도서’라는 감사한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탐구 시리즈를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한 권만 두고 보아도 아름답던 빨간책이 세 권이나! 이번 주 정식 론칭한 탐구 시리즈는 박동수 편집자의 『철학책 독서 모임』, 윤아랑 평론가의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임소연 과학기술학자의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까지 3종을 먼저 선보입니다. 한동안 일을 덕질했던 저는 이 셋이 모여 있는 모습만 봐도 코끝이 찡하답니다.
탐구 시리즈의 강점은 인문사회과학 각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이 젠더, 정치, 세대 갈등 등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를 자기 삶의 문제로 가져와 그 해법을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가령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이미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 잡은 페미니즘과 과학의 문제를 나란히 두고 보는 탐구인데요. 사실 이 두 분야가 연결될 가능성은 2018년의 낙태죄 폐지 논의, 디지털 성범죄 처벌, 숙명여대 트렌스젠더 학생 입학 논의 등 다양한 장면에 존재해 왔어요. 각 사건의 의미를 페미니즘 이론이나 과학 지식, 기술·사회 비평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도 적지 않았고요.
그러나 저는 책 첫머리에 담긴 저자의 고백을 따라 읽으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 마냥 먼 일’이라고 생각한 과학기술을 제 삶의 영역으로 가져오게 되었어요.  아래에 그 일부를 인용할게요.
지금까지 과학에 관심이 없었거나 심지어 싫어했어도 좋다. 반대로 당신이 과학을 잘 알고 좋아한다면, 현재 과학계에 종사하고 있다면 더욱 좋다. 어느 쪽에 해당하든 조신하게 사회에서 기대하는 여성 또는 남성의 도리를 다하며 무언가 주어지기를 기다리거나,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은 이 책의 완벽한 독자다. 나는 특히 과학과 불화를 겪었던 경험이 있는 이들, 그래서 과학책에는 그다지 마음이 가지 않는 독자들을 떠올리며 이 책을 썼다. 바로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을 싫어했고 미워했다. 그런 나에게도 과학을 좋아했던 시기가 있었으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이다. 수학자가 꿈이었던 그때는 수학과 과학을 어려워하고 못하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수학과 과학이 재미있었다. 이 꿈은 과학고에 진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깨졌다. 그곳에는 나보다 수학과 과학을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도 많았다. 천재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나는 과학이 싫어졌다. 나를 못나게 만드는 과학이 미웠다. 그때는 과학을 잘하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시 과학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페미니즘이다. 처음에는 과학을 비판하는 것이 좋았다. 객관적이고 엄밀해 보이던 과학 지식이 성 고정관념과 편견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 갈 때마다 통쾌했다. 과학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과학으로 정당화되는 주장이나 행위에 예전처럼 영향받지 않게 되었다. 내가 여자라서 더 쉽게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도 좋았다. 과학자가 되지 못한 게 내 능력 부족 탓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큰 위로가 되었다. 이렇게 성차별적인 과학이라니, 과학자가 되지 않아 오히려 천만다행이었다. 나쁜 과학을 믿는 대신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편이 훨씬 나아 보였다. 과학의 권위에서 해방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
지금 한국 사회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크다. 기후위기와 감염병 대유행이라는 현실과 맞물려 과학기술의 힘과 한계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여성과 과학을 함께 탐구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시기는 없을 듯하다. 이 책이 소개하는 과학 연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과학이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과학은 적도 아니지만 신도 아니다. 이미 곁에 다가와서 서성대고 있다.
적절한 친근감과 적절한 믿음은 친구의 조건이자 미덕이다. 때로는 과학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과학에게 조언하거나 함께 참여하며 과학을 돕자. 알고 싶지 않았던 과학이 궁금해지고 남의 일이던 과학이 내 일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들어가며: 신비롭지 않은 모두를 위하여」
임소연,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중에서
“나는 과학을 싫어했고 미워했다. 그런 나에게도 과학을 좋아했던 시기가 있었으니”로 시작하는 문단에서 저는 ‘문과는 좋은 대학 갈 거 아니면 과학 공부할 필요 없어.’라며 제 학구열에 찬물을 끼얹은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떠올랐어요. 여러분들께도 이런 사연이 하나쯤 있으실까요?
이렇게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이 저자의 진솔함과 오늘날의 문제에 개입하는 정확한 언어로 여성과 과학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탐구한다면, 『철학책 독서 모임』은 ‘오늘의 철학’을 탐구해요. 2020년대 한국에서 나온 열 권의 철학책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또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은 ‘동시대 문화’에 대한 탐구로, 다양한 힘들이 부글거리는 지금 한국 문화의 쟁점을 들여다봅니다.
『철학책 독서 모임』의 박동수 선생님과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의 윤아랑 선생님은 《한편》 1호 ‘세대’, 《한편》 2호 ‘인플루언서’의 필진이었어요. 탐구 시리즈는 《한편》 편집부가 주목하는 젊은 저자들의 독창적인 연구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갑니다.
탐구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미소 띤 입, 빛나는 눈, 약간의 호기심을 품고 있는 얼굴이 떠올라요. 고집스럽게 다문 입이나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고 째려보는  눈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약간 기울어진 자세요. 탐구의 산뜻한 어감은 전문가들의 몰입과 문외한의 어리둥절 사이에 있어서 좋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와 같은 오래 흠모한 철학책도 떠오르구요.
탐구 시리즈를 여는 1번 『철학책 독서 모임』은 한동안 철학을 멀리했던 사람에게도, 그동안 난해하고 알 수 없는 철학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둘다 저)에게도 추천하는 ‘오늘의 철학 탐구’인데요. 「들어가며」를 미리 보내드려요.
모든 시대에는 언제나 오늘의 철학책이 필요하다. 과거에 쓰인 철학책들은 말투도 주제도 어딘가 고루해 보인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 책들은 그 시대의 관심사에 따라 철학적 개념을 창조하고 조직하고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눈으로 보면 관심사도 철학적 개념의 구성 방식도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오늘의 철학책은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고 전문 학자들이 검증한 것도 아니다. 당연히 고전도 아니다. 너무나 다양한 철학책들 가운데에서 무슨 책을 골라 읽어야 할까? 정답은 없다. 어떤 선택도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버텨 낼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다. 지금은 너무나 중요해 보이는 책이 나중에 가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선택이 없다면 오늘의 철학도 있을 수 없으니까.
오늘의 철학 탐구
하나의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철학은 영원한 것,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지 시대적인 것, 유동적인 것을 탐구하지는 않는다는 의문이다.
과거의 전통 철학이 그런 영원한 진리를 추구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했듯 칸트 이후에 서양 철학에는 한 번의 단절이 있었다. 전통 철학이 ‘진리란 무엇인가’와 같은 영원한 물음에 천착했다면, 19세기 초 이래로 철학 활동의 장에서 동시대에 관한 물음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형상으로서 우리의 현재는 무엇일까? 이 현재에 속하는 한에서 우리는 누구이고 또 누구여야 하는가? 왜 철학을 해야 하며 또 이 현재와 관련해 철학의 특수한 임무는 무엇인가? 이때부터 철학은 동시대를 다루는 장르가 되었다. 철학의 동시대성과 관련해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 “자신의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한것이 철학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리처드 로티는 오늘날 철학의 “탐구는 영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역사의 바로 이 순간에 있는 ‘오늘의 우리’가 누구인지를 자문하는 것이 철학의 주요 문제 중 하나가 된 셈이다.
나는 이 점에서 오늘의 철학책이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시작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원한 지혜나 위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사유하게 하는 통로이자 세상의 실상과 마주해 전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의 공간. 우리는 오늘의 철학책을 통해서 동시대적 감각을 공유하고 현재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주목해야 할 철학책은 무엇일까? 그런 철학책은 대체 어떤 현재성을 담고 있을까?
우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도 가치를 주입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철학자 이졸데 카림에 따르면 우리는 다원화 시대를 살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에 어떤 것이 맞고 어떤 입장이 옳은지를 두고 끝없이 다투는 시대, 다양한 정체성들이 서로 경합하는 시대, 동질적이고 통일적인 사회를 찾을 수 없는 시대다. 생활양식의 다원화, 인구의 다원화, 정체성의 다원화를 되돌릴 길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첫 번째 문제란 바로 ‘우리란 무엇인가’다. 세대, 젠더, 계급, 인종, 민족, 장애 등으로 이토록 분열된 풍경 속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공유하고 있을까?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을까?
─ 「들어가며: 철학책을 함께 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박동수, 『철학책 독서 모임』 중에서
철학책 하면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하는 마음에 어디서 들은 책, 저기서 들은 책을 잔뜩 주문하고선 막상 책 꾸러미가 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함에 빠졌던 지난날이 생각나요. 그래서인지 박동수 선생님의 “정답은 없다.”라는 단호한 문장에 안도하다가도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선택이 없다면 오늘의 철학도 있을 수 없으니까.”라는 문장에서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한편》 동료들은 탐구 시리즈에 어떤 느낌 받았는지 이야기 들어 봤어요!
《한편》의 필자들이 한 권의 책으로는 무엇을 보여 줄까 너무 궁금했어요. 탐구 시리즈 실물을 보면, 일단 감탄하며 요리조리 만져 보고 펼쳐 보고 떠들어 보지 않을 수 없어요. 그만큼 영롱합니다. 학술대회 ‘탐구하는 생활’에서 필자들의 출발점과 문제의식, 관점을 충분히 공유받은 채로 책을 읽어 나가니 저의 ‘오늘’을 탐구할 세 명의 동료를 얻은 것 같아요.
저는 지금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을 읽고 있는데요, 호쾌하고 사려 깊은 「들어가며」를 읽으면서부터 책에 빠져들었어요. 어떤 독자를 위한 책인지 간명하게 설명하는 문장도 힘 있어요. “자신의 삶과 몸·경험을 더 잘 이해하려는 여성, 일상에서 분투하는 여성과 함께하려는 모두를 위한 탐구다.” 탐구 동료를 더 만들고 싶어요. 탐구 시리즈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기회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탐구 시리즈를 처음 보고 오랜만에 이 책을 가지고 싶다, 자랑하고 싶다, 읽어보고 싶다는 강력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출판사 근무 십여 년에 자사의 책을 악착같이 챙기려는 욕망은 어느 정도 내려놨다고 자부했었는데 작고 단단하고 새빨간 이 책들을 보고는 젊은 시절의 그 생생했던 욕망을 다시금 경험했습니다.. 새로 산 미니백에도 우아하게 들어가 안착한 모습을 보곤 지적 고양감에 휩싸여 눈물도 조금.. (잘 샀다 가방) 
마케팅 회의에서 했던 지금 왜 인문학 책을 읽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이토록 섹시하고 직관적이고 완벽한 답이 있을 줄 그때는 몰랐어요. 감탄이 길었네요, 그냥 함께 읽어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지만 견고한 만듦새를 보면 감탄이 나옵니다. 자꾸 밖에서 꺼내고 싶어지는 책이랄까요? 서울국제도서전에 등장한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강렬한 색상처럼 압도적인 반응을 끌어냈기도 했죠!
저는 7월 13일에 열릴 예정인 <우리끼리 독서 모임: 『철학책 독서 모임』>을 위해 찬찬히 『철학책 독서 모임』을 읽어나가고 있는데요. (독서 모임 모집은 7월 초에 시작할 예정이에요!) 목차를 먼저 확인하고 제가 읽었던 철학책 파트를 찾아 뒤죽박죽으로 읽는 중이에요. 한 권을 온전하게 완독하는 것도 좋지만, 듬성듬성 관심 있는 주제부터 읽으며 해당 주제와 관련된 다른 책들을 엮어가며 탐구해 나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얼른 독서 모임 날이 되어서 각자의 탐구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오늘 아침 빽빽하고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을 펼쳐 읽었습니다. 출근길에 책을 펼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까지 제게 허락되는 공간은 너무도 작아서 핸드폰도 겨우 들 수 있을 정도니까요. 작은 가방에도 넣어 다닐 수 있고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기에도 편한 책이라 엄두를 내 보았는데 성공했어요!
작지만 단단하고 눈에 띄는 이 빨간 책은 탐구 시리즈의 지향점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간결하지만 저자의 주장이 알차게 담긴,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읽히기에 좋은 내용이라는 점이 말이죠. 학문적, 이론적 통찰을 친근하게 제안하는 탐구 시리즈와 함께 일상의 작은 의문들에 답을 내리고 삶을 공부하는 일,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하면 어떨까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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