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검열 전『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년 영국을 뒤흔든 《월간 리핀콧》 판본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지난 주 편지에서 리트리버 편집자님이 추천한 ‘콘텐츠’ 호의 한 편, 한문학자 장유승 선생님의 「조선 사람이 선택한 콘텐츠」의 한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해 봐요. “통속물이 상업 출판의 발전을 견인한 것처럼, 웹의 시대를 견인한 것도 통속물이다. 전근대의 통속서는 독서 인구 확대에 기여했으며, 그중 일부는 오늘날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이다.”
국가의 통제에도 소비자의 욕망에 따라 통속소설이 제작, 유통되었던 17세기의 조선. 이번에는 19세기의 영국으로 가 봐요. 검열과 통제 아래 어떤 출판물은 비판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정을 거친 채로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도 했는데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1891년 대대적인 수정과 편집을 거치기 전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예요.
지금까지 읽었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1980년 《월간 리핀콧》에 게재된 원고에서 대대적인 수정을 거친 1981년 판이에요. 심지어 《월간 리핀콧》 판본조차 “아주 까다로운 독자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담당 편집자에 의해 500단어 정도가 수정된 버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발표된 영국 사회의 즉시 거대한 스캔들로 이어졌고, 논란과 비판 속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1년 뒤 작품을 대폭 수정해 출간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에 출간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980』은 오스카 와일드가 잡지에 보낸 최초의 원고를 번역한 책이에요. 화가인 바질 홀워드가 자신의 모델인 도리언 그레이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최초의 판본으로 한번 읽어 볼까요?
해리! 해리! 도리언 그레이가 내게 무슨 뜻인지 네가 이해한다면 좋을 텐데! 내가 그렸던 풍경화 기억해? 애그뉴가 비싸게 쳐주겠다고 했는데도 팔지 않은 풍경화? 내가 작업했던 것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지. 왜 그런지 알아? 그걸 그리는 동안 도리언 그레이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바질, 정말 굉장한데! 이 도리언 그레이라는 친구를 꼭 만나 봐야겠어.”
홀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였다. 한참을 그러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아, 해리.” 그가 말했다. “도리언 그레이는 내게 단지 창작의 모티브일 뿐이야. 내 작품에 그의 모습이 없을 때야말로 그 존재감이 가장 두드러지지. 아까 말했듯이 그는 오직 내게 새로운 방식의 예술을 알려 준 존재일 따름이라고. 어떤 곡선의 굽이 속에서, 어떤 색깔의 어여쁨과 미묘함 속에서 그를 발견하지. 그게 다야.”
“그러면 왜 초상화를 전시하지 않으려는 건데?”
“그림에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전부 쏟아부었거든. 물론 도리언에게 절대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이지. 그는 아무것도 몰라. 앞으로도 몰라야 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추측할 수도 있잖아. 난 세속적이고 더러운 호기심으로 가득한 세상 사람들에게 내 영혼을 던져 줄 생각이 없어. 그들의 현미경에 내 심장을 올려놓지 않을 거야. 이 그림에는 나 자신이 너무 많아, 해리, 내가 너무 많다고!”
“시인들은 너만큼 자기방어에 철저하지 않던데. 그 사람들은 사랑이 책 팔기에 유용한 소재라는 걸 알지. 요즘에는 실연 이야기라면 2쇄, 3쇄, 계속 찍어.”
“난 그래서 시인들이 싫어. 예술가는 아름다운 걸 창조해야 하는 법이지, 작품에 자기 인생을 쏟아부어서는 안 돼. 우리는 예술을 일종의 자서전으로 간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뭔지 아무도 모른다니까. 앞으로 내가 세상에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줄 거야. 그런 이유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는 공개하지 않을 거고.”
― 오스카 와일드, 임슬애 옮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980』 중에서
바질의 말에서 도리언에 대한 사랑을 친구에게 알려 주고 싶고, 그걸 도리언에게 들키고 싶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담은 작품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없는 바질의 고양감과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지네요.
최초 원고와 수정 후 출간된 판본이 어떻게 다른지는 책 마지막에 실린 번역가 임슬애의 글 「어쩌면 다른 시대에」에서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데요. 위의 글에서 바질의 말 “그림에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전부 쏟아부었거든.(I have put into it all the extraordinary romance.)”은 출간된 책에서 이렇게 수정되었다고 해요. “그림에 이상한 예술적 숭배를 표현해서 넣었거든.(I have put into some expression of all this curious artistic idolatry.)”
오스카 와일드는 수정한 원고를 출판하면서 서문을 통해 ‘예술가와 예술가의 작품을 구분해 달라고’ 호소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1895년 ‘중대 외설죄’로 강제 노동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이런 사연이 담겨 있을 줄이야!1880년대 말 영국 예술계의 총아였던 와일드는 자신의 재능과 예술관을 종합하겠다는 야심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런 열렬함을 쏟아부은 작품이 “응당 갖춰야 할 올바름”이 필요한 할 문제작으로 취급받았으니, 와일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꼭 소설이 아니더라도, 요즘에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가 진정성이라는 가치로 좋은 평가를 받곤 합니다. 진정성 자체를 지향하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도 많고요. 와일드가 남긴, “이 그림에는 나 자신이 너무 많아”서 감히 남들 앞에 보이지 못하겠다고 한 인물상과 “예술을 보여 주고 예술가는 숨기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라는 수정 판본 서문의 한 대목을 숨 참고 다시 보게 됩니다. 물론 진정성으로 평가되는 오늘날 콘텐츠에도 동시대 사람은 알기 어려운 사연이 있을지 모를 일이네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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