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혼이 끊어질 것만 같아

 

 

당시 읽는 봄날
$%name%$ 님, 《한편》 7호와 함께 중독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온 지도 네 달째네요! 그동안 동서양의 문헌을 가로지르면서 여러 글을 읽었는데요. 중독에 관한 생각, 고민을 어떻게 엮어 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한편》 학습지인 ‘기록하는 한편’과 함께 돌아보아도 좋죠. 모두 10회로 구성된 학습지의 마지막 회를 채우며…….
나의 중독, 욕망, 반복, 고통, 일상, 견디기……에 관해서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된 게 일보전진이었다면, 멀리서 보았을 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는 게 이보후퇴입니다. 이럴 때 시를 읽으면 좋겠죠. 막 출간된 아름다운 장정의 당시 선집, 『조선 사람이 좋아한 당시』예요.
두목, 청명절
청명 시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길 가는 사람은 넋을 잃을 듯하네.
술집이 어느 곳에 있는지 물었더니
목동이 멀리 살구꽃 마을 가리키네.
淸明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평설] 24절기의 하나인 청명절에 지은 작품이다. 청명은 가족들이 모여 답청(踏靑)을 하기도 하고 성묘를 하기도 하는 큰 명절이다. 청명을 맞지만 날이 청명하지 않고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이 때문에 객지를 떠도는 나그네는 마음이 처절하다. 단혼(斷魂)은 넋이 빠질 정도로 마음이 경도되거나 상심한다는 뜻이다. 쌀쌀한 봄 추위에 몸을 녹일까 하여 주막을 물었다. 지나는 소 치는 아이가 손가락을 가리키는데 그 앞에 살구꽃 핀 마을이 보인다. 그곳에 술집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살구꽃 핀 마을 행화촌이 술집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음침한 분위기가 여기서 환하게 바뀌는 것이 이 시의 묘미다.
성해응의 「정미전신록(丁未傳信錄)」에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이 시를 “청과 명의 시절 또 어지러우니, 난리 통에 행인은 애간장을 끊는구나. 묻노니 술집은 어디에 있는가? 목동은 멀리 향화촌을 가리키네.(淸明時節又紛紛 亂離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向化村)”로 바꾸었다고 하는 기사가 있는데, 마지막 향화촌은 오랑캐가 조선에 항복해 와서 거주하는 마을을 이르는 말이라 한다. 김팔원(金八元)과 조면호가 1구를 사용하여 시를 지은 바 있고 박제가가 4구를 가지고 장편 고시를 지은 바 있다. 고종 연간 화원을 뽑을 때 이 시로 속화를 그리게 했다.
─ 이종묵 평역, 『조선 사람이 좋아한 당시』
672~673쪽
 
지난 4월 5일이 청명이었죠. 1000년 전의 이즈음에 “길 가는 사람은 넋을 잃을 듯하네(路上行人欲斷魂)”라고 쓴 시가 마음에 꼭 와닿네요. 시도 아름답지만 “음침한 분위기가 여기서 환하게 바뀐다”라고 짚는 이종묵 교수님 평설도 근사한데요. 행화촌 즉 술집이 등장하면서 환해지는 분위기라니, 옛사람의 술 사랑은 못 배겨요. 봄과 술 시 한 편 더 읽어요.
두보, 강가에서 홀로 거닐면서 꽃을 찾다
강이 깊고 대숲이 고요한 곳 두세 채 집
헌사할손, 붉은 꽃 사이 흰 꽃이 어리비치네.
봄빛에 보답할 데가 어디인지 내 아노니
모름지기 좋은 술로 인생을 보낼지어다.
江深竹靜兩三家 多事紅花映白花
報答春光知有處 應須美酒送生涯
[평설] 760년 성도(成都)의 초당에 머물 때 지은 작품이다. 강변의 으슥한 대숲 곁에 인가가 몇 채 있는데 붉은 꽃과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서로 어린다. 이런 좋은 봄 풍경에 답하는 것은 좋은 술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이런 뜻을 말하였다.
─ 이종묵 평역, 『조선 사람이 좋아한 당시』
426~427쪽에서
 
시를 읽고 나니 다시 일보전진 한 것만 같은데요! 혼이 끊어질 것처럼 처절한 와중에 손가락 따라간 시선 끝에 환하게 핀 살구꽃, 이렇게 귀한 것이라뇨.
봄날의 시 두 편을 읽고 나니 꽃이 아름답게 핀 봄을 배경으로 하는 배삼식의 희곡 『화전가』가 생각나요. 작품의 배경은 1950년 4월 경북의 어느 마을이에요. 살구꽃, 복사꽃, 사과꽃이 만개했는데 분위기는 뒤숭숭해요. 전운이 감돌고, 남자들은 옥에 갇혔거나 실종되어 자리에 없어요. 수상한 시절이지만 김씨의 환갑을 맞아 모인 여자들은 기왕 잔치를 벌이는 김에 화전을 부쳐 화전놀이를 가기로 합니다.
김씨 야야, 우리 이래 하자.
금실이 머를 또?
김씨 잔치를 하기는 하는데.
박실이 하는데?
김씨 기왕에 할 게믄 자미나게 해 보자.
봉아어애?
김씨 날도 이래 좋고 꽃도 이래 좋은데, 답답하이 집 안에만 있지 마고.
권씨 예아?
김씨 내일은 우리 마캐 화전놀이나 한분 가자.
여인들, 어리둥절하다.
박실이 화전놀이?
김씨 그래. 머 이래 우리 말고는 새로 올 사램도 없잖나.
권씨 하하, 형님도 참 빌나시더. 환갑잔치로 화전놀이?
김씨 와 모할 거 있소?
권씨 모할 거는 없지만도. 화전놀이라……
독골할매 화전놀이라…… 허, 얼매 만에 들어보는 소리고.
봉아 그기 뭐꼬?
금실이 니는 그것도 모리나?
봉아 해 밨으야 알제.
금실이 여자들끼리 놀러가는 기다.
봉아 언니는 해 밨나?
금실이 아이, 난도 말로만 들었다.
봉아 모르만서 머.
독골할매 봄에, 삼짇날 지내고 딱 요만 때시더. 음석도 장만하고 술도 장만하고, 그륵도 싸들고 해가, 경개 존데로 나가니더. 집안 어른들, 액씨들, 동기간에 시집간 액씨들꺼정 다 모이가 이삐게 단장허고, 꽃매이 채리입고 나가니더. 나가가 바람도 시컨 쎄고 꽃도 보고 꽃지지미도 부치가 농가 먹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꼬, 그래 일 년에 딱 하루 놀다 오는 게래요…….
권씨 하이고, 언제 적 일이고…… 까마득하이 옛날 일이라. 시집가든 해 봄이이께네, 내 열일곱 시절이고 나라 망하던 해라…… 머 그때도 몬 간다는 거를 우리 할매가 섭섭타꼬, 내 보내기 전에 한분 가자꼬, 그래가 갔던 기 마지막이래. 형님은그때근친가셌었지요?
김씨 으응, 내는 봉화 친정 가가 화전놀이 갔었니더.
권씨 그때는 난도 처네고 형님은 새액씨고.
독골할매 참 다들 곱으셌지요…… 꽃겉이 곱으셌지요.
권씨 그래 모이 노다가 헤어지가주고 영 몬 보게 된 이들이 또 및일로?
─ 배삼식, 『화전가』
67~69쪽에서
“봄빛에 보답할 데가 어디인지 내 아노니/ 모름지기 좋은 술로 인생을 보낼지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벚꽃이 핀 남산을 산책하고 맥주 한 잔을 들이켰던 지난 주말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는데요. 『화전가』를 읽고 다시 보니 이 구절이 어쩐지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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