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낯선 행성에 떨어진 과학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미지의 행성을 배경으로 하는 SF 소설을 소개해 드려요. 여러 차례 영화로도 만들어진 『솔라리스』입니다.  
‘중독’을 만들면서 《한편》 3호 ‘환상’을 자주 떠올렸어요. 꿈, 상상, 이야기 같은 환상들은 고단한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요. 하지만 현실과 환상, 실제와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환상이란 무척 위험하기도 하죠. 중독 역시 무언가에 깊게 빠진 필멸자가 ‘불멸에 이르는 길’이면서,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영생을 꿈꾸며 독을 들이켠 중국의 황제나,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학자들의 사례에서 보듯이요.

 

그런데 어디서부터 중독인가? 선 긋기 어려운 것처럼 환상과 현실의 구분도 모호해지곤 해요. 내가 환상 속에 있는지 아니면 현실에 있는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죠. 그럴 때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환상인지 현실인지를 고민하는 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다면요?
폴란드의 SF 거장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는 ‘솔라리스’라는 행성을 배경으로 이 상황을 그리고 있어요. 소설은 주인공인 크리스 켈빈이 솔라리스로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준비됐나, 켈빈?”
“준비됐어, 모다르드.” 내가 대답했다.
“아무 걱정 말게. 정거장에서 자네를 잘 맞아 줄 테니. 잘 다녀오게나.”
미처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위쪽에서 뭔가를 가는 듯한 드르륵 소리가 나더니 캡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근육이 본능적으로 긴장되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언제 발사되는 거야?”
모다르드에게 묻는 순간, 고운 모래 알갱이들이 우주선의 겉면으로 와르르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켈빈, 지금 막 출발했어. 몸조심하게나!”
모다르드의 목소리가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깝게 들렸다. 그 말의 의미를 미처 실감하기도 전에 선체의 내벽에 넓은 틈새가 벌어지더니, 그 사이로 별들이 보였다. 프로메테우스 우주선이 현재 궤도 비행 중인 물병자리의 알파성을 찾아보려 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은하계에서도 이쪽 구역은 내게 낯선 곳이었다. 아는 성좌도 없었고, 방향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좁은 창문 너머로 점점이 반짝이는 먼지 같은 별무리만 보였다. 나는 그 무리 속에서 하나의 별이라도 선명하게 빛을 내며 눈에 들어오길 바랐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별들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불그스름한
배경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대기층의 성층권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나는 에어쿠션에 눌려 꼼짝도 못 한 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평선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비행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날고 또 날았다.
─ 스타니스와프 렘, 최성은 옮김,
『솔라리스』, 12~13쪽에서

크리스 켈빈은 이렇게 솔라리스 우주 정거장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아무도 자신을 맞아 주지 않고, 동료 과학자는 크리스를 무척 경계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를 만난다면 아무 짓도 하지 말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경고대로 크리스는 낯선 존재를 마주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익숙하기도 해요. 바로 10년 전 자살한 연인 하레이예요.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레이를 크리스는 두려움과 안타까움, 죄책감과 애정이 뒤섞인 감정으로 마주합니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는 하레이는 그런 크리스의 감정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하죠.

 

결국 자신이 크리스가 사랑했던 하레이와는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된 하레이는 크리스에게 ‘기억 속 하레이가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게 맞느냐’고 묻습니다.

 

“크리스,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어요…… 내가…… 당신의 그녀와…… 진짜로 닮았나요?”

 

“정말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지금은 잘 모르겠어.” 내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녀가 바닥에서 일어서며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마주 보았다.

 

“당신의 모습에 가려지고 난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나거든.”

 

“그런데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게, 그 여자가 아니고…… 나라는 걸…… 확신해요?”

 

“물론이지, 나는 당신을 사랑해. 만약 당신이 본래의 그녀였다면, 사랑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 스타니스와프 렘, 최성은 옮김,
『솔라리스』, 322~323쪽에서

하레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죽은 하레이를 보는 크리스는 환상 속에 있는 걸까요?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와중에 가장 거대한 불확실로 남는 것은 ‘솔라리스’라는 행성 자체입니다. 인간의 기억 속에서 길어 낸,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들을 만들어 내니까요.

 

지구에는 솔라리스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연구물들이 가득해서 ‘솔라리스학’이 따로 있을 정도지만 지구의 인간은 솔라리스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솔라리스가 행성에 착륙한 지구인들에게 ‘당신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어떻게 알지?’라는 질문을 던지죠.

윽, 크리스와 하레이의 대화 너무 낭만적이에요……. “만약 당신이 본래의 그녀였다면, 사랑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너무 공포스럽기도 하네요.
솔라리스학에 철학자가 참여한다면 어떨까요. “내가 환상 속에 있는지, 현실 속에 있는지” 헷갈린다는 이야기를 하시니 사르트르가 떠오르는데요. 이 ‘나’라는 게 도대체 뭔가요?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적절하기는 한가요? 아니면 솔라리스로 떠났을 때처럼 ‘나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게 유학생 시절 사르트르의 질문이었는데요. 사르트르의 첫 번째 논문 《자아의 초월성》의 첫 문단도 같이 읽어요.
대부분의 철학자들에게 자아(Ego)는 의식의 “거주자(habitant)”이다. 어떤 이들은 통일의 텅 빈 원리로서 “체험(Erlebnis)” 가운데 있는 자아의 형식적인(formelle) 현존을 단언한다. 또 어떤 이들은, 대부분 심리학자들인데, 우리의 심리적인 삶의 매 순간에 욕망들과 행위들의 중심으로서 자아의 질료적인(matérielle) 현존이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자아가 형식적으로도 질료적으로도 의식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자아는 [의식의] 바깥에, ‘세계 안에’ 있다. 타인의 자아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세계의 한 존재이다.
─ 장폴 사르트르, 현대유럽사상연구회 옮김,
『자아의 초월성』, 17~18쪽에서
철학 논문이라 외국어도 많고 낯선 말도 많지만 “자아는 의식의 바깥에, 세계 안에 있다.”라는 문장만 들여다볼까요? 이 주장을 설명하는 예로 사르트르는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다음처럼 묘사합니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책에 ‘대한’ 의식이 있었고 소설의 주인공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의식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의식은 오직 대상에 관한 의식이었으며 그 자신에 관한 비정립적인 의식이었다. 이제 나는 비명제적으로 파악된 이 결과들을 명제의 대상으로 만들어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다. 비반성된 의식 안에는 어떠한 ‘나’도 없었다고 말이다.”(『자아의 초월성』, 45~46쪽) 
이 설명대로라면 진짜 크리스, 진짜 하레이는 없는 거겠죠? 다만 크리스가 하레이를 보는 동안, 하레이에 대한 의식이 있었고, 의식은 오직 하레이에 관한 의식이었으며, 그 밖에 어떠한 ‘나=크리스’도 없었다……. 철학책을 볼 때면 늘 그렇듯이 배가 고파진다니까요.(도망)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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