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을 때 형이 강도(江都)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 보니, 내가 벼슬 잃은 것을 위로한 내용이었소. 이때 나는 이미 수레를 채비해서 도성 문을 나선 참이라, 심부름 온 하인이 두고 가겠다고 하기에 경황없는 중에 답장을 미처 하지 못했소. 게을리 늑장을 부린 죄를 어찌 피하겠소.
집을 떠난 지 이틀 만에 김정경(金正卿)의 영평(永平) 별장에 도착했소. 시내와 골짜기와 산의 아름다움은 예전 못지않았지만, 안타까운 것은 허물어진 건물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않은 점이었소. 방으로 들어서자 진한 술이 동이에 가득한데 향의(香蟻, 술독 위에 뜬 쌀알을 벌레에 비유한 표현)가 굼실굼실해서, 형을 데려다가 큰 술잔으로 권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다오.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군침을 흘리겠지요. 지금까지도 성벽에는 최경창(崔慶昌)과 허봉(許篈)의 시가 남아 있는데 맑고도 상큼해서 읊조릴 만했소. 또 이안눌(李安訥)의 시도 있더군요. 하지만 길이 바빠 화운하지는 못했소.
비를 만나 통구(通溝)에서 자고 단발령(斷髮嶺)을 넘었지요. 멀리 일만 이천 봉을 바라보니, 에워싼 봉우리들이 손을 모아 읍하며 마치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듯하여 유람의 흥취가 절로 솟구침을 금할 수가 없었다오. 말을 재촉해서 장안사(長安寺)로 들어가니 날은 이미 저물고 말았소.
승려 도관(道觀)이 호남에서 왔다는데, 자못 글을 아는지라 함께 대화하기가 아주 좋았소. 이튿날 아침 일찍 그를 데리고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으로 들어갔소. 가파른 바위는 삐죽 솟고 땅은 온통 돌인 데다, 물은 솟구쳐 쏟아져 부딪치고 단풍과 노송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빼곡하였소. 십오 리를 가서야 영원(靈源)에 당도하여 거기서 하루를 묵었소.
새벽에 망고대(望高臺)를 향하는데, 골짜기는 좁고 벼랑은 깎아지른 듯해서 쇠줄을 더위잡고서야 겨우 오를 수 있었소. 송라(松蘿) 그늘 아래서 잠깐 쉬다가 마침내 만폭동으로 들어갔다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여덟 자의 큰 글씨를 감상하니, 붓의 기세가 마치 날고 뛰는 것만 같아서 이 산과 더불어 자웅을 다툴 만했소. 되돌아 명연(鳴淵)에 이르고, 저녁에는 표훈사(表訓寺)에서 쉬었는데, 주지인 담유(曇裕)가 자리와 음식상을 차려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이튿날은 진헐대(眞歇臺)에 올랐소. 남여(藍輿)를 버리고 걸어서 개심대(開心臺)로 올라갔지요. 일만의 봉우리가 눈 아래 빼곡한 모습을 뭐라 형용할 수가 없었소. 우뚝 솟아 하늘을 우러르는 모습은 그대가 빼어난 자태로 홀로 서 있는 것만 같았고, 비스듬히 기울어 무너질 듯한 모양은 그대가 술에 취해 옥산(玉山)이 무너지는 듯한 모습과 방불했다오. 이것을 마주하고서야 내 마음을 위로할 수 있었지요. 이날은 열이레 밤이어서, 정양루(正陽樓)의 동편에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더랬소. (중략)
인하여 예전에 머물던 낙산(洛山)을 찾아가자 그 고장의 원로들이 모두 술병을 가지고 와서 다리를 덥혀 주고, 태수는 또 기생과 악공으로 호사를 더해 주니, 거나하여 왕안석(王安石)이 동산(東山)에서 노닐던 흥취가 있었소. 말이 발을 저는 바람에 닷새를 붙들렸다가 강릉 외갓집으로 돌아오니, 내가 이곳을 찾아뵙지 않은 지가 어느덧 여덟 해나 되어 서리 이슬의 서글픈 감회가 배나 절절하더이다. 고을 동편에 작은 서당이 있어 학생 대여섯과 함께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으며 남은 해를 마치고 싶은데, 하늘이 사람의 욕심을 따라 줄지 모르겠소이다.
바다와 산의 장쾌한 유람이 대략 이와 같았소. 이때 만약 그대가 함께 있었다면 이 사이에 지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시 주머니 속에 마땅히 많았을 것이오. 형께서 이 말을 듣는다면 반드시 크게 유쾌해하고 또한 크게 안타까워할 것이오.
벼슬길을 향한 마음은 식은 재처럼 싸늘하고, 세상 사는 맛은 씀바귀인 양 쓰구려. 조용히 지내는 즐거움이 화려한 벼슬살이보다 낫거늘, 어찌 즐겨 나의 편안함을 버리고 남을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쓴단 말이오. 다만 먼 데 벗을 향한 생각이 속마음에 얽혔어도 땅이 멀어 만나기가 어려운지라 회포를 다 풀 수가 없구려. 가을 날씨가 점점 차지니 양친을 잘 모시고 양지(養志)를 다하기 바라오.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하오. 이만 줄이오.
─ 허균, 이종묵, 장유승, 정민, 이홍식, 안대회, 이현일 옮김,
「금강산 유람길에서」, 『팔도 유람기』, 66~70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