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

 

 

경계에 선 목소리를 전하는 SF 작가 정소연

지난 두 번째 편지의 주인공, 토끼의 모습으로 잘 알려진 SF 작가 듀나의 세계를 사랑하는 분들이 보내 주신 이야기를 살짝 전해 드릴게요!

 

[MBTI가 궁금해]
“듀나 작가님 너무 솔직해서 재밌게 읽었네요.
궁금한 게 있는데 SF를 쓰시는 작가님들은 혹시 MBTI가 N일까? 하는 궁금증이 드네요.
MBTI 성격 테스트 N 타입은 직관형으로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하고, S 타입은 감각형으로 객관적인 사실과 정보를 잘 이용한다고 하죠.  여섯 명의 작가들 이야기를 읽어 보시면서, SF 소설을 쓰는 데 두 타입의 특성이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 찾아보셔도 재밌을 거예요!

[낯설고 새롭게]
“어떻게 하면 세상을 보는 시야를 더 넓힐 수 있을까요?”
“낯선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워지자니! 너무나도 멋진 제안이에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려면,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듀나 작가가 제안한 우리 스스로가 낯설고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의 답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SF를 읽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새로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세계는 가능하다’고 속삭이니까요.

오늘 함께할 주인공은 SF 소설가이자 번역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이분의 시간관리 비법을 듣고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죠……! 헤르미온느의 모래 시계를 갖고 있는 것 같은 작가, 정소연을 만나 보세요.
 
더 많은 이야기는 곧 나올 인터뷰집 단행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작가, 번역가, 변호사의 일을 병행하고 계시죠. 일을 하면서 공부도 하고, 꾸준히 글을 쓰고 취미활동을 하다니요. 알수록 ‘이것도 하고 계셨어요?’ 하고 놀랍니다. 시간을 관리하는 요령을 알려 주시겠어요? 계획성 없는 사람도 시도할 수 있게 구체적으로 알려 주세요. 

일상에서 뜨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요. 예를 들면 몸이 피곤해서 누워서 쉰다면, 휴대폰이나 아이패드로 사건 기록을 봐요. 이동할 때는 전자책 애플리케이션의 낭독 기능으로 소설을 들으며 책을 읽어요. 자투리 시간을 안 버리려고 하죠. 이동 시간, 기다리는 시간, 재판 때 애매하게 대기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럴 때에도 서면을 쓰면 조금이라도 더 쓸 수 있고요. 잠들기 전에는 내일 할 일을 미리 생각해요. 일어나서 이런 일을 하고, 다음에는 뭘 하고, 이렇게 일정을 미리 세웁니다. 하루에 해야 하는 일을 쭉 써 보면 많을 때는 열다섯 개 정도 나오거든요. 항상 어떤 일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같이 생각해요. 목록화하면 각각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알 수 있잖아요. 이메일 확인은 5분짜리 일이고, 의뢰인에게 메일로 기일 진행 보고를 보내는 일은 30분, 이런 식으로 시간을 확인해서 일정의 구석구석에 집어넣죠.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잖아요. 그럼 미루게 되죠. 미루면 스트레스가 더 커지고, 미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려 해도 효율이 낮아요. 정말 미루고 싶은 일일수록 먼저 들여다봐요. 진짜 하기 싫어도 일단 보기라도 하자, 열어라도 보자. 어른의 삶이죠. 대신 돌봐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해야지 해결이 되잖아요. 안 들여다봤을 때의 지옥을 내가 경험하게 되고요. 어른의 삶은 도망칠 곳이 없어요.


최근에 내신 에세이 『세계의 악당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법』에서 쓰시길, “맡은 사건으로 소설을 쓰기도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곤 하지만 자신에게 변호사의 서면과 작가의 소설은 확실히 다르다고 하셨죠. 그래도 변호사로서 여러 현장을 보시는데, 그렇게 마주치는 일을 소설로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은 없었나요? 세상에는 어떻게든 힘을 보태고 싶은 일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정말 없었어요. 내가 영어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한국어로 말하고 싶은 욕구가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서면은 법률 용어라는 일종의 외국어를 쓰는 일이에요. 소설은 훨씬 개인적이에요. 사회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일을 굳이 소설에 녹여낼 필요를 크게 느끼질 않아요. 투쟁과 활동은 현실에서 하면 돼요. 

둘은 저에겐 초반부터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이건 추출해서 소설로 쓸 일이다, 칼럼을 써야겠다, 아니면 준비서면을 쓸 일이다, 소송대리인단에 참가하겠다고 이메일을 보내야겠다. 그렇게 딱 나뉘어요.

작가, 번역가, 변호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정소연 작가

몇 년 전 미국에서 한국 SF의 특성에 관한 강연을 하셨죠. SF 연구자이자 UC 리버사이드 영문학과 교수인 셰릴 빈트의 『에스에프 에스프리』가 국내에 번역되면서 한국어판 출간 기념 인터뷰 영상이 올라왔는데, 거기에 소연 님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소연 님 강연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요. 어떤 내용이었나요?


미국의 SF는 백인 남성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요. 아이작 아시모프나 로버트 A. 하인라인을 읽지 않기가 어렵죠. 분명 여성혐오적 경향이 굉장히 강한 장르였고요. SF에 진입하려면 이를 극복해 나가면서 읽고 쓰고 연구해야 해요. 

 
그런데 꼭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읽지 않아도 되잖아요. 과거 SF를 적극적으로 배제하지 않으면서 비교적 현대적인 SF를 자연히 접하는 일이 가능해요. 한국에서는 어슐러 K. 르 귄이나 로저 젤라즈니에서 많이 시작하는 것 같아요. 아예 한국 작가로 SF 독서를 시작하시는 경우도 점점 더 많이 보이고요. 기본 인식 차이가 있어요. 
 
그로 인해 한국 독자들이 어떻게 SF를 더 진보적이고 덜 여성혐오적인 장르로 느끼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셰릴 빈트는 그런 상태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에요. 처음부터 극복할 대상이 없는, 애당초 이를 자연스레 피해가는 독자들과 작가들이 있다니, 너무 좋은 곳이라고. 그분들의 반응을 보며 이런 상황이 참 귀한 거구나 싶었어요.
 

 


주인공이 여자라서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주인공이 여자라서 쓸 수 있는 이야기는 있어요. SF답게 현실을 약간 비틀어서 소설을 쓰더라도, 우리는 여성이 젠더 권력에서 우위에 있는 사회를 실제로 겪어본 적이 없어요.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할 때 현실성이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눌린 자국이 있는 인물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떨 때는 흔적이고 어떨 때는 꽉 닫힌 모양이죠.
억눌린 지점이 있는 인물은 여성일 때 조금 더 자연스럽달까, 삶 전반에서 눌린 지점을 만들어내기가 비교적 쉬워요. 왜냐하면 그런 여성이 사회 곳곳에 있으니까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있잖아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어딜 가든 눌리는 지점이 있어요. 그런 지점을 이야기하고 싶고, 더 많이 이야기됐으면 해요.

예전에 경계에 관해 쓰고 싶다고 하신 에세이를 읽었어요. 소설에도 꾸준히 경계에 선 이들, 퀴어 커플 등이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그런데 계속 쓰다 보면 늦게서야 깨닫는 일도 있잖아요. ‘이래서 내가 이걸 하고 있었구나.’ 하고요. 2006년에 나온 퀴어 이야기 「마산앞바다」로부터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요. 계속 경계의 인물을 쓰는 이유를 찾으셨나요?
글을 쓰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목소리를 부여하는 작업이잖아요어떤 말을 할지보다 어떤 목소리를 선택할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발화의 내용보다 발화자가 중요한 면이요그런데 역시 소설로 사회 운동을 하는 건 아니니까 자연스러운 인물을 쓰고 싶거든요나에게서독자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경계 바깥의 인물이 되어버리면 몰입하기가 어려워요저도 쓰기가 어렵고요.
꽤 옛날 일인데,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분이 강의를 들으러 오셨어요. 강의가 끝나고 저에게 와서 말씀하시길 ‘사실 나는 SF를 쓰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 「마산앞바다」를 읽었는데, 그래서 자살을 안 하고 살았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강의를 검색해서 신청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럴 때마다 놀라요. 「마산앞바다」가 커밍아웃을 어려워하는 레즈비언 이야기잖아요. 학창시절이 나오고요. 저는 쓰고 싶은 글을 쓴 건데, 그 글이 독자에게는 생사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구나, 그런 힘을 가질 수도 있구나, 했어요. 그렇다면 아무래도 독자에게 힘이 되고 독자를 살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독자에게 힘이 되고 독자를 살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SF라고 하면 흔히 거대한 세계와 낯선 물체를 생각하죠. 소연 님의 SF는 일상적 상황이 많이 나오잖아요. 등장인물이 적고 관계의 범위도 좁아요. 본인과 가족, 친구, 연인 정도죠. 작은 세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마치 미시사로 세계를 읽는 듯해요. 이렇게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계를 말하기 위해서 작가가 꼭 세계 규모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작은 단위에서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사람 하나하나는 하나의 세계잖아요. 한 사람의 행동에는 세계가 반영되어 있어요. 얼마나 우주적인 존재인가요. 내가 조금 움직여도 내 그림자는 여럿이 많이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SF는 세계에 대한 사고실험을 많이 하잖아요. 큰 단위로 사고실험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사람 하나로 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SF를 통해 세계를 현실과 다르게 움직이면 그 안의 사람들도 전부 기울어져요. 그 부분을 포착하는 일도 중요하니까요. 만약 현실에서 개인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사소설이나 르포가 되겠죠. 하지만 세계가 변화하고, 그곳의 개인은 어떻게 같이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건 SF 같아요. 
 
저는 소연 님에 대한 키워드로 망설임과 미지근함을 뽑았어요. 「우주류」를 보면 지체장애인인 주인공이 장애가 있는 우주비행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로 응하지 않습니다. 우주를 향해 그렇게나 직선적으로 커리어를 쌓았던 인물인데도요. 「마산앞바다」의 주인공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면서도 오래 방황하죠. 「귀가」에서는 주인공이 미적지근하게 행동합니다. 어떤 주저함이 있어요. 이들이 망설이고 주저하는 만큼 작고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이 잘 느껴지고요.
 
그래야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도, 아무리 확고한 사람도 늘 거침없이 나갈 순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소설의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크게 확대하고 어떤 부분은 없앤 인물이고요. 
 
저는 머뭇거림과 결단이 한 세트라고 생각해요. 머뭇거리고, 그래도 하는 것, 두 가지는 필연적으로 묶여 있지 않나 싶어요. 두 가지가 붙어 있어야 ‘그래도 한다’는 부분의 현실성과 어떤 아름다움이 충분히 와닿지 않을까. 전 초인을 그리고 싶지가 않아요. 누구나 고민을 해요. 고민했지만 그래도 하거나, 아니면 고민했기 때문에 못 하거나, 이걸 반복하는 게 삶이죠. 미지근함이라는 표현을 써주신 게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사람을 보는 관점이 궁금해지는데요. 사회복지학, 철학, 법학을 공부하셨잖아요.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요? 

사회복지학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 사회 문제를 보는 관점에 영향이 컸습니다. 실습이나 봉사활동에서도 영향을 받았고요. 특히 학부 전공이니 한창 가치관이 형성될 때잖아요. 철학은 세계를 보는 눈을 얻었어요.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어떻게 해석되는가, 그런 걸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변호사 일을 하면서는 어떤 사람이든 존재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거짓말쟁이다, 그런데 거짓말이 나쁜 게 아니다, 거짓말은 그냥 존재한다는 점도요. 저는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이고, 평생 거짓말은 나쁘다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그런데 변호사가 되고 보니 사람들이 전부 다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그게 선악의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정직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거짓말이 필요한 환경에 있어 본 적이 없어서, 크게 시험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일종의 특혜라고 할까요. 이게 정말 변호사 일을 하면서 생긴 변화예요. 선악 판단을 안 하게 됐어요. 마약을 할 수도 있고 사람을 찌를 수도 있고 그게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현상이라고요.
 

학교 SF 읽어 봤어?
“뭔가, 사람은 안 다쳤지만 당장 학교는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건 있잖아. 항상 바랐어. 평소보다 더 간절히 원한 날도 있었지. 앉을 자리를 새로 정하는 날. 전날 뒤에서 ‘들려온’ 얘기에 몇 시간을 울어 눈이 퉁퉁 부은 날. 나는 알지도 못하는 아이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낄낄댄 날. 화장실에 갇힌 날. 그렇지만 그런 날에도 나는 교실 맨 앞줄, 앞문 바로 앞자리에 잘못 그은 선처럼 숨죽이고 앉아 하루를 보냈어.”

‘학교’ 하면 어떤 것들이 생각나시나요? 전 마지막 학교를 졸업한지 꽤 오래되어 왠지 아련한 느낌이 들면서도, 여전히 어떤 기억들은 너무 생생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게 되기도 해요. 오늘 소개할 책은 ‘학교’를 주제로 한 장르 앤솔로지 『교실 맨 앞줄』입니다. 오늘의 인터뷰에서 만난 정소연 작가는 표제작인 SF 단편 「교실 맨 앞줄」을 실었습니다. 이외에도 듀나, 이산화, 김성일 등 여러 작가의 장르 단편이 실려 있어요! 
 
이들의 무시와 괴롭힘에 시달리는 「교실 맨 앞줄」의 주인공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며 숨죽이고 항상 교실 맨 앞줄에 앉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에게 변화가 생기고 교실에 이상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로 인해 학교에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되고, 온라인으로 모든 수업이 대체될 것이라는 소식에 주인공은 뛸 듯이 기뻐하는데요…… 팬데믹으로 인해 이전처럼 등교하지 못하게 된 요즘 상황과 집단 따돌림이라는 사회 문제가 SF 세계관 안에서 겹치는 이 소설의 묘미는, 정소연의 특기인 작은 인물이 지닌 현실감과 SF적 상상력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통쾌함이랍니다. 

『교실 맨 앞줄』 (돌베개, 2021)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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