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이것도 중독은 아닐까?

 

 

생존과 습관 사이에서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1920년대 뉴욕 할렘을 무대로 옮겨 봐요! ‘할렘 르네상스’의 대표 작가인 넬라 라슨의 『패싱: 백인 행세하기』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건너기, 통과하기, 지나가기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 ‘패싱(passing)’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흑백 인종 간의 경계에서 백인으로 넘어간다는 것인데요.

 
의사 남편, 두 아들과 함께 번듯한 중산층 흑인 가정의 부인으로 사는 아이린은 우연히 어린 시절의 친구 클레어를 만납니다. 그리고 클레어가 어떤 식으로 패싱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죠. 아이린이 종종 헤어숍을 이용하거나 백인 전용 호텔 라운지를 갈 때처럼 사소한 기분 전환을 위해 종종 패싱을 하는 것과는 달리 클레어는 그 규모가 다릅니다. 흑인을 혐오하는 백인 인종차별주의자 남편에게 자신이 흑인인 것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거든요. 
 

“그런데 넌 내 질문에 대해 대답을 안 했어. 솔직하게 말해 봐. 한 번도 백인 행세할 생각 안 해 봤어?”
아이린은 즉시 대답했다. “아니. 내가 왜?” 그녀의 목소리와 태도가 너무 경멸적이어서 클레어의 얼굴은 달아올랐고 눈은 번쩍였다. 아이린은 서둘러 덧붙였다. “있잖아, 클레어. 난 원하는 것은 다 가지고 있어. 글쎄, 돈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것 빼고는 말이야.”
그 말에 클레어가 웃었고 번득이던 분노는 갑자기 나타난 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그렇지.” 그녀가 단언했다. “그거야 다들 원하는 거지. 좀 더 많이 버는 거. 돈이 많은 사람들조차 그래. 그리고 난 절대 그들을 비난하지 않아. 돈이 많은 건 정말로 좋은 거야. 사실 모든 것을 따져 볼 때, 르네, 내 생각에 돈이야말로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가져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어느 정도 동의했지만 그녀의 본능은 전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말할 수 없었다.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저녁 약속에 늦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 그녀가 알았던 소녀, 그리고 상당히 위험하고 끔찍한 짓을 성공적으로 해 냈으며 스스로 대단히 만족한다고 말하는 그 여자가 아이린 레드필드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게 매력적이었다.
클레어 켄드리는 여전히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다. 무늬 새겨진 의자 등받이에 그녀의 어깨가 비스듬히 닿아 있었고 마치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한 듯 확신에 찬 그러나 무심해 보이는 자세였다. 그녀에게는 예의 바르면서도 오만한 분위기가 어렴풋이 배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런 분위기를 타고난 소수의 여자들이나 부와 유명세를 거머쥔 여자들에게나 허락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백인 행세를 하면서 그런 분위기를 갖게 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아이린에게 순간 확실한 만족감을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런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녀가 언제나 그 엷은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길이를 유지하고 있는 그 금발머리는 넓은 이마 뒤로 느슨하게 빗어 넘겨진 채 한쪽은 작고 결이 고운 모자에 가려져 있었다. 눈부신 선홍색으로 칠해진 그 여자의 입술은 달콤하고 섬세하고 약간 고집스럽게 보였다. 유혹적인 입이었다. 이마와 두 뺨, 얼굴은 약간 넓적했으나 상아색 피부는 독특한 광채를 띠었고 특히 두 눈이 아름다웠다. 때때로 완전히 검은색이 되기도 하는 다갈색 두 눈은 쉴 새 없이 반짝거리며 길고 검은 속눈썹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천천히 최면을 걸듯 사로잡는 두 눈, 그 눈이 전체적으로 품고 있는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 그것은 흑인의 눈이었다! 신비스럽고도 무엇인가를 감추는. 저 금발머리 아래 저 상아색 얼굴에 박힌 눈에는 이국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 넬라 라슨, 서숙 옮김, 『패싱: 백인 행세하기』, 53~56쪽에서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즉시 현재 누리는 삶 전체가 파멸할 수 있지만, 클레어는 패싱을 멈출 생각도 없고 오히려 ‘그럴 수 있는 유형에 속하는 흑인들이 왜 더 적극적으로 패싱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죠.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 불이익이 분명한 사회에서 클레어의 이런 선택은 너무 당연한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위험을 알면서도 정체성의 가장을 지속하는 것. 이런 것도 중독일까요?

“이런 것도 중독일까요?”

아아, 갑자기 저의 닉네임이 멋쩍어지는데요. 알코올중독처럼 고전적인 중독, 실제 중독자 이야기가 아니라, ‘백인 행세하기’라는 행동에 아슬아슬 거부할 수 없이 빠져드는 그런 이야기인 거죠. 이 책 『패싱』의 카피처럼…

할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경계에 섰다면, 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저는 ‘이것도 ○○은 아닐까?’라는 문형을 좋아해서, 오늘의 문제 “이런 것도 중독일까요?”에도 “그런 것 같네요.”라고 답하겠어요.  이 소설에서 클레어와 아이린은 백인인 척하면서 백인 상류층 사회의 이익을 누리기도 하고, 또 할렘의 폭발적인 활기에 이끌려 가진 모든 걸 내던질 생각까지 품기도 하잖아요. 백인인 척하기나 흑인 문화에 빠져들기 모두 쾌락을 선사한다는 점에서는 같죠. 쾌락이란 물론 중독적이고 말이에요. 
 
‘그건 중독 맞다’라고 판단하고 나니까, 이제 클레어와 아이린이 할렘에 흐르는 음악과 시인들 사이에서 진짜 뭘 느꼈는지 궁금해져요. 할렘 르네상스의 시인인 랭스턴 휴스가 “밤은 아름답다/ 그래서 내 동포의 얼굴도 아름답다”라고 무척 단순하고 아름답게 쓸 때, 두 사람은 자신의 “동포”를 그처럼 단순하게 사랑할 수만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클레어가 “한 번도 백인 행세할 생각 안 해 봤어?”라는 질문에 아이린이 바로 “아니. 내가 왜?”라고 대답하는 것만 봐도 복잡해요. 가벼운 마음으로 종종 패싱을 해 왔던 아이린이 이렇게나 공격적인 태도로 전면 부정하는 건, 일과 술 사이의 편집자 님 말대로 패싱의 중독적 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할렘 르네상스의 화려함과 즐거움, 그리고 독특함을 그대로 담아 내고 있다는 것인데요. 클레어가 지금까지 단절되어 있던 흑인 문화의 활기에 정신없이 녹아들 때, 그에 따라 아이린이 느끼는 긴장과 불안도 점점 커져 가요. 미워하면서도 제 일처럼 마음 졸이는 이 마음도 사랑이겠지만…… 이 모든 증폭은 과연 쾌락인지 고통인지……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