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백 년의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 함께 읽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올해는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독재 정권 시기에 시와 시론을 발표했던 김수영은 잘 알려진 대로 권위에 저항한 참여시인이었는데요, 문학평론가 김현이 말했듯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무엇보다 ‘자유’였습니다. 특정한 가치를 대변하기보다 오직 정치적, 시적 자유를 쓰고 살고자 했던 김수영의 시에는 자유가 좌절된 데서 온 생활의 비애와 그럼에도 부단히 자유로운 사회를 향해 가는 사랑과 혁명이 녹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현대에도 김수영이 계속 읽히고 연구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어요. 2주에 걸쳐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소개해 드려요.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비가 그친 후 어느 날— 
나의 방 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 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뜨리는 것 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 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으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 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 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 자루의 부채—그러나 그것은 보일락 말락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것—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 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 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 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 보려 하는가

조용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랑이 생기었다
굵다란 사랑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우스운 이야깃거리다
다리 밑에 물이 흐르고
나의 시절은 좁다
사랑은 고독이라고 내가 나에게 재긍정하는 것이
또한 우스운 일일 것이다
조용한 시절 대신 나의 백골이 생기었다
생활의 백골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무서운 이야깃거리다
다리 밑에 물이 마르고
나의 몸도 없어지고
나의 그림자도 달아난다
나는 나에게 대답할 것이 없어져도 쓸쓸하지 않았다
생활무한(生活無限)
고난돌기(苦難突起)
백골의복(白骨衣服)
삼복염천거래(三伏炎天去來)
나의 시절은 태양 속에
나의 사랑도 태양 속에 일식(日蝕)을 하고
첩첩이 무서운 주야(晝夜)
애정은 나뭇잎처럼 기어코 떨어졌으면서
나의 손 위에서 신음한다
가야만 하는 사람의 이별을 기다리는 것처럼
생활은 열도(熱度)를 측량할 수 없고
나의 노래는 물방울처럼 땅속으로 향하여 들어갈 것
애정지둔
―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1: 시』에서
  
 
 

지난 11월 27일은 김수영 시인의 생일이었어요. 탄생 100주년 기념 낭독회가 김수영 문학관에서 열렸답니다. 저도 김수영 문학관에 처음 가 봤는데요. 시인의 사진, 육필원고 등과 함께 전시된 김수영 연구 논문들, 올해 40회를 맞은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들이 특히 눈에 띄었어요.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선집을 엮은 서동욱 시인·평론가는 수상 시집들이 “현대 시사의 사초”라고 평하기도 했는데요. “한 시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문학상이 그런 보편적 사초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묻고 답한 대로, 그만큼 김수영 시인의 시적 지평이 넓다는 점에 더해 김수영의 시적 화두를 후배 시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 지금 김수영 문학상의 권위를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권위에 저항하는 김수영, 그런 김수영의 권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권위에 저항하는 문학, 그런 문학이 가지는 권위. 권위에 저항하는 책, 그런 책이 등에 업는 권위. 권위에 저항하는 청년, 그런 청년이 획득하게 될 권위…… ‘권위’ 호를 마감할 때쯤은 역사란 이런 권위의 사슬일 따름인가 싶어서 뭔가 맥빠졌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런 맥빠진 기분으로 「달나라의 장난」을 읽으니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으로 “수천 년 전의 성인” 같은 팽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게 신경 쓰이네요. 돌고 있는 팽이를 보면서 “집주인” 곧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은 잊어버렸다며 혼자 울려다가 말다가 하는 게요. 위의 초기작 세 편에서 시인은 “홀로이” 팽이든 성인이든 책을 “지둔”한 사랑으로 건너다보고 있을 따름인데요. 지둔(遲鈍)이란 인(仁)이란 도대체 뭘까 생각하면서 2000년 전에 단 주석에 따르면 굼뜨고 미련하다, 어눌(訥)하다는 뜻이니 예나 지금이나 뭔가 제대로 보려면 그렇게나 느릴 수밖에 없나 봐요.

『김수영 전집』 세 번째 개정판은 김수영 시인의 동생이자 현대문학 편집장이었던 김수명 선생이 편집한 1981년판과 2003년판 전집, 엮은이인 이영준 교수가 2009년 펴낸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시인 생전에 발간된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비롯해 오랜 시간 김수영 연구자들이 밝혀낸 새로운 사실들을 반영하여 정본 확정 작업을 진행했다. 2003년 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들을 바로잡았고 지금까지 발굴된 작품을 수록했음은 물론 시인이 공개하지 않은 미발표 시와 미완성 초고 시까지 더해 김수영 작품을 총망라했다. 전반적인 편집 체제를 수정하고 시각적 자료를 풍성히 하여 독자들에게 보다 생동감 있고 편리한 독서를 제공하게 된 것도 기존 판본과 달라진 점이다.
1981년 초판 출간 이후 각각 63쇄(시), 47쇄(산문)를 중쇄하며 문학 전집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김수영 전집』은 전집 출간과 같은 해 제정되어 젊은 시인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는〈김수영 문학상〉과 함께 한국 현대시사의 기념비로 자리 잡았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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