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그 개혁은 왜 실패했을까?


백 년 동안의 개혁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한편》 6호와 함께 역사 여행을 떠나요. 목적지는 120여 년 전의 가을, 한반도입니다. 조선 왕조가 대한 제국으로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인데요. 왕이 황제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낡은 권위가 무너지고 새로운 권위를 세우는 과정에서 무엇이 선언되었는지, 어떤 점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함께 들여다봐요.

“짐이 누차 사양하였지만 끝내 사양할 수 없게 되어 9월 17일(양력 10월 12일) 백악산 남쪽에서 하늘과 땅에 고유하는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는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올해를 광무(光武) 원년으로 삼았으며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敎化)를 펼쳐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 하니 천하에 선포하여 모두가 들어 알게 하라.”
 
1897년 10월 13일, 조선 왕조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으로 탈바꿈했다. 중국과의 오랜 사대조공(事大朝貢) 관계를 끝내고 자주독립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황제’의 ‘제국’이어야 했을까? 이것이 그렇게도 필요한 일이었을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임금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어야 했던 나라, 심지어 대궐을 침범한 외국군의 손에 국모를 잃어야 했던 나라가 내실을 다지고 국력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비용을 써 가며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겉으로 자주 국임을 내세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대황제가 계셔야 자주독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왕국이라도 황국과 같은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지금 조선에 제일 긴요한 일은 자주독립의 권리를 남에게 잃지 않는 것”이라는 《독립신문》의 논설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동아시아 전통 질서에서 왕은 황제의 신하다. 조선의 군주가 청나라의 ‘황제’나 일본의 ‘천황’과 형식적으로라도 대등하려면 황제가 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왕의 나라’는 번국(藩國), 즉 황제에게 예속된 제후의 나라라는 것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머리에 뿌리박힌 인식이었다. 이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칭제(稱帝)’가 부득이한 일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시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겉으로 제국이 되고 황제가 되는 것보다는 부국강병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선행되었어야 한다. 이 조치가 주한 외교 사절의 비웃음을 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본의 변리 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자국 외무성에 보낸 전문을 보자.
 
“조선 국왕 측에서 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의견을 묻고 다른 외교 사절에 잘 주선해 달라고 부탁한바, 본관이 왕래 방문할 때마다 각국 사절의 의향을 살폈습니다. 대부분 이것을 논할 만한 가치가 없다며 냉정하게 평가하고 심지어 망령되어 제정신이 아닌 행동으로 여기는 형세였습니다. 이에 본관은 조선 국왕의 문의에 대하여 각국 사신의 의향과 태도를 전달하고 ‘각국에서 승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행하는 것은 무익하며, 쓸데없이 남의 치소(嗤笑)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정치를 잘하도록 힘쓰면서 국력의 발달을 기다려 서서히 행하는 것만 못합니다.’라며 아직 시기가 빠르다고 간곡히 권고하였습니다. …… 그런데도 조선 국왕은 결국 이를 결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이 황제국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기에 일본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일본은 조선의 제국 선포를 가장 먼저 인정하였는데, 프랑스 공사 콜랭 드플랑시(Collin de Plancy)에 따르면 “일본은 독립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의전 용어로 단 하나의 표현 ‘코테이(皇帝)’를 사용해 왔다. 하와이의 옛 왕도 그렇게 불렀고 오직 조선의 국왕만 지금까지 황제로 불리지 못했을 뿐이다.” 일본에게 ‘황제’는 외국 국가 원수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므로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을 황제로 부르는 것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가토 공사의 전문은 조선에 나와 있는 외국 사절들의 반응을 사실에 가깝게 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 제국은 외세의 침탈에 맞서 근대화를 이루고 국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과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갑오개혁 당시 신학문을 위주로 했던 교육 기조가 대한 제국에 들어서 동도서기(東道西器), 구본신참(舊本新參)으로 전환되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이는 전통 유교 이념의 토대 위에 서양의 문물과 학문을 수용하겠다는 것으로서, 본질을 바꾸지 않은 채 기교만 습득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종은 “공자의 도에 더욱 매진하라.”라며 전국에 유학(儒學)을 장려하는 조서를 내리고 성균관 교육을 강화하라고 명령하였는데 같은 날 서양의 신학문과 산업 전문 기술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라는 조령(詔令)도 내린다.
 
“나라에 학교를 설치하는 것은 인재의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더욱 정진하게 함으로써, 만물의 도리를 알고 일을 처리하여 성공시키며, 기물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여 재물을 풍부하게 하는 기초로 삼자는 것이다. 현재 세계 각국의 기세가 나날이 상승하여 당할 자가 없을 만큼 부강해지는 것이 어찌 다른 데에 원인이 있겠는가? 이치에 맞는 학문에 종사하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며, 정밀한 지식을 더욱 정밀하게 하고 기묘한 기계를 날이 갈수록 더 새롭게 만들어 가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이보다 앞서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인재가 외국보다 크게 못하지 않은데 다만 일상적인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인민의 식견이 열리지 못하고 농상(農商)의 공업(功業)이 진흥하지 못하여 백성의 삶이 날로 쇠락하고 나라의 재정도 갈수록 궁해 가고 있다. 한데 새로 설치 한 학교는 겨우 형식을 갖추는 데에 그치고 교육의 방도에는 어두워 5~6년 동안 조금도 진전된 성과가 없다. 상공(商工) 학교의 경우 더욱더 급선무라 할 수 있으나 지난해에 명령을 내렸는데도 아직도 개설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 이와 같게 질질 끌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개탄할 노릇이다.”
 
고종의 지시는 서로 다른 성격의 학문을 함께 진흥시키라는 것이었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 인문학과 실용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병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은 서로 이질적인 사유 구조와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융합하기 힘든 관계였다. 더욱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기존의 문화와 사유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심지어 그것을 더욱 강화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끌어낸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판단이었다. 

광무개혁이 실패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개혁의 방향을 잘못 설정한 데에 있다. 광무개혁은 황권과 국권을 동일시하여 황실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고 황제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였다. 이것으로 나라를 지키고 난국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릇 과거의 문제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문제와 마주할 경우, 기존의 프로세스와 가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조선은 열강의 침탈과 서구 과학 기술 문명의 전파라는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는 도전을 마주했다. 그러나 그에 대응하는 방법이 지배층의 권력 강화였다는 점은 전근대적인 방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서양의 계몽 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변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한 황제가 비전을 제시하고 강력한 개혁을 선도했다면 대한 제국의 황제권 강화 또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인식이 과거와 변함이 없고 지배층의 사고방식도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만 강화하는 것은 곧 기존의 논리와 방식을 더욱 고수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한 제국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에 제시된 새 국가의 비전이 오로지 황제의 강력한 통치권뿐이라는 점은 이 나라의 빈약한 상상력을 여실히 보여 준다.
        

아울러 전문 인력이 부족한 점, 개혁의 주도 세력이 구축되지 않은 점, 개혁이 일관성 있게 추진되지 못한 점도 개혁이 실패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역량을 갖춘 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광무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이전까지 한국인들이 접한 적이 없었던 국제 관계와 통상법, 영어와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 서양 의학, 과학 기술 등의 실용 학문과 철도, 전화, 전기, 광산 채굴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량을 갖춘 인력이 공급되어야 외국의 손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인 혁신에 나설 수가 있다. 대한 제국 정부도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학교를 세우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재정을 제대로 투입하지 못하여 원하던 만큼의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가의 재정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교육이 우선순위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광무개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제국’을 천명하면서까지 야심차게 시작한 광무개혁은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실패가 중첩되며 좌절했다. 외부적으로는 일본이라는 위험 요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힘의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역부족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에 대해 치밀하게 전략을 세워 대처했는가,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했는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더욱 상황이 심각했다. 개혁의 방향을 잘못 설정했고 개혁을 선도할 세력도 부재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조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특히 심각한 것은 리더십이었다.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리더의 힘을 강화하는 사례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불확실성에 대비하며 혁신을 촉진하고, 갈등을 조율하여 공동체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리더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광무개혁은 개혁을 위해 리더의 힘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리더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 개혁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앞뒤가 바뀐 것이다. 이러한 목적 전치 현상은 지금도 자주 발견되지 않는가? 개혁을 생각하고 있는 리더라면, 개혁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그 목적을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정당하게 리더십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늘 유념해야 한다.
     
─ 김준태, 『조선의 위기 대응 노트』,
24~35쪽 중에서

위기 관리라는 용어를 조선의 상황에 적용해 보니 흥미로워요. 근현대사를 배울 때 ‘광무개혁’은 여러 개혁들 사이에 스치듯 지나간 이름이었는데, 당시 고종의 조령을 직접 읽으니 리더의 답답함이 느껴지네요. 후대에 짚어 보는 실패의 원인은 그보다도 뼈아프고요. 치밀한 전략과 능동적 최선. 막상 위기 상황에서는 치밀하고도 빠른 전략 수립이 필요하고 ‘이게 최선입니까?’ 자꾸 되묻게 되는데요. 『조선의 위기 대응 노트』를 정독하면서 두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할 만한 대응 사례를 찾아봐야겠어요.

맞아요, 책 속에 성공적인 위기 대응 사례도 여럿 나오니까 일독을 권장합니다. 위기 대응의 관점에서 보는 역사는 배로 짜릿해요. ‘수차례 사양한 끝에’ 스스로 황제라고 선포하는 고종의 입장이야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지만, 광무개혁의 내용으로 꼽히는 ‘동도서기’에 관해서는 다시 눈길이 가는데요. 동도서기론으로부터 120년이 지나서도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편집자에게는 서양고전학자와 중문학자가 대화한 기록 또한 지침이 되었어요.

미증유의 재난과 위기 상황을 마주한 조선의 리더들, 그들의 역사적이고 결정적인 선택들을 분석하다! 수많은 재난, 위기, 문명의 대전환을 맞아 조선의 리더들은 어떻게 이를 성공적으로 대처하고 극복했을까? 혹은 어떤 그릇된 판단과 대처로 위기를 심화시켰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이 책은 조선의 20가지 사례(史例)로 대답을 대신한다. 저자 김준태는 그간 역사와 정치사상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저술을 통해 오늘날의 독자들의 피부에 와닿는 통찰을 전해 왔다. 전작인 『군주의 조건』에서는 꼼꼼한 실록 및 사료 고증을 바탕으로 조선의 왕들이 펼친 리더십을 정리하여, 현대의 리더가 교본으로 삼을 만한 조언들을 전한 바 있다. 이번 책에서도 조선의 리더들의 선택을 현대적인 관점과 이론을 바탕으로 심층 분석하며 위기 대응에 있어 유용한 교훈과 반면교사가 될 이야기들을 전한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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