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과로의 한가운데에서

 

 

요가를 일상에 적용하는 법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과로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맞는 리듬을 찾아나선 정우성 작가의 요가 에세이 『단정한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권위가 ‘의심하지 않고 당연히 따르는 힘’이라면, 습관처럼 반복하는 일상의 규칙과 삶의 패턴 역시 우리에게 작용하는 영향력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잠시 멈춰 서서 그 규칙들이 과연 합리적인가 의심해 보는 태도가 변화의 첫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지, 선배?”
어제 같은 야근이 오늘도 이어지는 날이었다. 둘 다 비슷한 상황이었다. 몇 년 전에도 그랬다. 우리는 같은 사무실에서 밤새 《지큐》를 만들고 있었다. 그 몇 년 사이에 참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콘텐츠 시장은 급변했다. 우리가 잡지를 읽고 사랑하고 만들던 시절과는 모든 게 달라졌다. 그 변화를 몸으로 겪어 내는 동안 나이와 경력은 피할 수 없이 쌓였다.
지금은 둘 다 각자의 회사를 갖고 있다. 아주 작은, 둘 또는 셋이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로 시작해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다. 콘텐츠 비즈니스의 속성이 그렇다. 세상에 막연한 가능성을 보고 모이는 돈은 없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 정도의 콘텐츠가 쌓이기 전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텨야 한다.
그게 매체의 힘이고 브랜드의 저력이다. 막 시작한, 우리의 작은 회사에는 그게 없었다. 하지만 가야 하는 길이라면 부단히 가는 게 옳았다. 나는 퇴사 후 ‘더파크’라는 미디어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시간이 소중한 우리를 위한 취향 공동체’라는 슬
로건으로, 《지큐》에서 다루던 다양한 오브제들을 자동차 중심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좋은 동료들과 함께 ‘뉴 미디어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이 되길 꿈꾸면서 천천히 성장하고 있다.
후배도 비슷한 입장이었는데, 최근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매달려 있던 프로젝트를 마침내 마무리한 참이었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일의 규모와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몰입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만족을 모르는 성격이기도 했다. 마침내 끝냈지만 잃은 게 너무 많았다. 후배는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좀 잔인한 수준이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불을 끄고 잔 적이 별로 없어요. 불 끄고 자면 푹 잠들어서 못 일어날까 봐. 잠은 진짜 조금 자고 다시 일해야 하니까. 그래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 그만한다고 할까?”
과로는, 어쩌면 이런 시대를 혼자서 생존해야 하는 사람의 아주 기본적인 생활 패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로에도 리듬은 필요하다.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일주일에 세 시간 정도의 요가 수련을 할 수 있는 만큼. 몸의 피로가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는 기준이 나한테는 있었다. 수년간의 대책 없는 과로를 통해 그걸 깨달았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내내 좋아하다가 마침내 일과 사랑에 빠져 버린다는 게 이렇게 위험하다.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모르고,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선뜻 잡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을 잘해 낼 수 있을 때의 희열을 알기 때문이다.
“근데 그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일은 아마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 하면 잘하겠지. 그런데 지금처럼 하면 몸이 못 버틸 거야.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무너질 거고. 나중엔 영영 불 끄고 못 자는 사람이 될 수도 있어. 그거 진짜 무섭지 않아?”
“맞아요, 이성적으로는 그만하는게 맞는데…….”
“그런데?”
“불안해요. 이 일을 안 한다고 하면 다른 일도 못하게 될까 봐. 이제 나를 찾는 일이 들어오지 않을까 봐.”
과로의 진짜 기반은 조바심일 수 있었다. 지금 들어온 이 일을 받지 않으면 다른 일이 언제 올지 몰라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제 낭만과 재미만큼이나 돈 또한 소중하고 귀하다는 걸 충분히 아는 경력이 되었으니까. 우리는 현실적일 필요가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때? 한 2~3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어?”
“네, 그 정도는. 어쨌든 일이 아주 없는 상태는 아니에요.”
“그럼 한숨 돌린다고 생각하는게 어때? 이럴 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좋은데, 지금의 우선순위는 일단 건강. 먼저 잠을 좀 잘 수 있는 환경으로 돌려 놓고, 잠을 잘 수 있으면 생각도 차분하게 할 수 있으니까. 3개월 안에는 분명히 더 좋은 일이 들어와. 컨디션을 회복하고 나면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겠지. 그건 그냥 그렇게 믿고.”
“그렇죠? 역시 그래야겠지?”
후배는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이튿날에는 일을 고사하는 메일을 써서 보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잘했다.”고 짧게 답장했다.

 

고민의 근본은 대개 비슷했다. 나를 위하는 일과 해하는 일을 구별하지 않으면 그대로 악화 일로였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과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일을 구분하지 못하면 곧 미궁에 빠졌다.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고 몸을 혹사하기 시작하면 더 깊은 구덩이를 파는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내 운명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요가를 알기 전에는 나를 위하는 것과 해하는 것의 기준 자체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만 있었다. 그럴 땐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라는 조언을 삶의 기준처럼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만…… 하고 싶은 일 중에도 나를 해하는 일이 있었다. 해야 하는 일들이 나를 위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채 닥치는 대로 바쁘게만 살았다. 멈추는 방법도 몰랐고 나를 아끼는 방법도 몰랐다.
요가는 삶도 수련도 그렇게 무턱대고 하면 안 된다고 지속적으로 권하는 목소리였다. 한 시간 남짓의 수련 시간 안에 이 모든 고민과 방황과 결정의 드라마가 다 녹아 있었다. 도무지 안 되는 아사나를 만났을 땐 절대 무리해선 안 된다. 최선을 다하되 몸을 살펴 가며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럴 때 들리는 선생님의 조언은 예외 없이 “호흡이 이어지는 곳에 머무세요.”였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과 안도가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보통 ‘숨 가쁘게’ 살아가니까. ‘바쁘면 다행이지’라는 말을 인사처럼 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흡’ 하고 호흡이 멈추거나 가빠진다는 건 아직 몸이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다. 호흡이 달라지기 직전의 상황에서 더 머물러야 한다는 신호다.
도전하고 시도하되 내 몸을 살피는 방법을 그 모든 순간에 배웠다. 그때부터 내 몸이 자아를 갖기 시작했다. 몰랐을 땐 살피지 않았던 몸. 무시하고 무리했던 몸. 살피지 않았으니 망가지는 것도 몰랐고, 딱히 아프지 않으면 아끼지도 않았던 내 몸.
 

의식하기 시작했더니 차차 나아졌다. 수련을 이어 가자 평소에는 움직일 수 없었던 각도가 열렸다. 없던 근육과 힘이 생겼다. ‘흡’ 하고 호흡이 멈췄던 자세를 즐기게 되는 순간도 만나게 됐다. 숨 쉴 수 있는 곳에 머무는 것. 그것이 첫 번째 기준이었다.
두 번째 기준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어쩔 수 없는 일의 구분이었다. 일을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은 대체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다. 하지만 일단 하기로 하면 많은 것들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일이 그런 식이었다. 선택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 이후에는 썩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타협해야 성취할 수 있었다. 시간과 노력과 스트레스를 주고 경험과 돈을 얻는다. 피할 수 없는 교환의 법칙이었다.
내 경우, 새로운 경험은 대체로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위급할 때, 그러니까 몸이 명백히 망가지기 시작할 땐 모든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는 편이 경험상 좋았다. 퇴사 이후의 나는 꽤 단호하게 그 기준을 지키고 있는 편이다. 적어도 하루 여섯 시간의 잠을 확보한다. 수련을 못 한 날은 혼자서라도 플로우를 만들어 수련한다. 그럴 여유조차 없는 날에는 산책이라도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마음껏 먹지만 평일의 식사는 되도록 가볍게 하려고 한다.
이런 기준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일상에는 꽤 큰 차이가 있다. 몸을 통제할 수 있으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고, 마음이 차분하면 하루를 유연하게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쯤 지킬 수 없는 날이 있어도 괜찮다. 가끔은 강박 그 자체가 더 해롭다. 게다가 이건 결과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니까……. 하루를 조절하는 데 익숙해지면 일주일을 통제할 수 있다. 지금은 그렇게 한 달을, 꾸준히 1년을 좋은 리듬으로 살고 싶어서 순간순간 노력한다. 자주 실패하고 매번 망가지지만 매일 도전하는 중이다.
수련이 꼭 그렇다. 몸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몸은 준비가 안 됐는데 범위를 벗어나려고 억지를 쓰면 다친다. 오늘은 괜찮아도 내일 아프다. 인간의 몸은 놀라운 능력으로 한계를 뛰어넘지만, 욕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 내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오로지 최선이어야 한다. 그 범위를 스스로 알고 알아서 통제해야 안전하고 효율적인 수련이 가능하다. 그렇게 점점 넓혀 가는 것이다. 차근차근 깊어지는 일이다. 수련을 반복하고 유지할 때마다 이런 태도가 몸에 새겨져서 이제는 좋은 습관, 삶의 태도가 된 것 같았다. 일상의 순간순간, 그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서 요가를 떠올릴 만큼. 요가에서 배운 요령들을 삶에 응용할 수 있을 정도로.
─ 정우성, 『단정한 실패』, 93~103쪽에서

혼란한 실패를 겪고 있는 가운데 단정한 편지를 받은 느낌이에요. “과로에도 리듬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에서 눈이 번쩍. 《한편》 5호 ‘일’에서부터 고민했던 과로 문제에 관해서 음악적인 해법을 얻은 것만 같아요. “콘텐츠 비즈니스” 속에서 마감하기 위해서나 기획하기 위해서 간혹 과로하더라도 “내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는 거죠. 마음과 몸을 느긋하게, 느슨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다 결국 과로의 수렁에 빠져 버리는 상황은 ‘일’호 출간 이후의 세미나 ‘혹시 나 과로하고 있을까?’에서도 다뤘던 문제였네요. ‘이성적으로는’ 그만하는 게 맞지만 불안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로하는 상황. 저 역시 불안할수록 익숙한 규칙과 질서에 더 매달리게 되는 것 같아요. 『단정한 실패』에 등장하는 요가 자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혼란의 와중에 리듬을 찾아봐야겠어요.

“무리해 왔고, 무리하고 있다.” 대책 없는 과로로 혹사당하던 몸이 어느 날부터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신호는 신호일 뿐. 피로에마저 중독된 몸이 신호를 무시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신호가 증상이 되고 증상이 병증이 되면 그제서야 무모하고 맹목적인 레이스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미 몸은 폐허가 된 지 오래. 이 책의 저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모두가 짐작하듯 그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자기 몸을 해하면서까지 열심히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요가는 물론 운동이지만 어째서인지 운동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조용하고 단호한 차단”이고 “선한 에너지”이며 “좋은 흐름”이자 “좋은 리듬”. 아프지 않으면 쉬지도 못하던 한 워커홀릭이 스스로에게 내린 극약 처방으로 시작된 요가이지만 요가는 알면 알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하나의 세계였다. “영원한 세계에만 기대할 수 있는 막연한 평화가” 그 안에 있었다. “극심한 긴장과 달콤한 이완 사이”를 즐기며 천천히 요가인이 되어 간 한 사람. 처음엔 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이젠 “좋은 리듬으로 살고 싶어” 오늘도 요가하는 한 사람. 그 리듬을 나누고 싶어 수련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글이 모여 『단정한 실패』가 되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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