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내가 하는 일이 아무 의미도 없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직업

$%name%$ 님, 한편을 함께 읽어요! 오늘은 《한편》 5호 ‘일’의 서문에도 인용했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새 책 『불쉿 잡』의 한 대목을 소개 드려요! 나의 직업이 그저 ‘일을 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느낀 적 있나요? 내가 이 일을 한들 세상에 (좋든 나쁘든) 어떤 변화가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은요? 전 세계의 여러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그레이버는 일하는 사람 자신조차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는 직업을 ‘불쉿 직업’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며, 이러한 현상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영혼에 남은 상처이자 정신적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주에 모든 서점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2013년 봄에 나는 의도치 않게 아주 사소한 국제적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 글은 어떤 직감에 기초한 글이었다. 다들 익히 알겠지만, 외부인이 보기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은 일자리가 있다. 인사 관리 컨설턴트,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 금융 전략가, 기업 법무팀 변호사, 또는 불필요한 위원회의 문제를 처리할 직원 위원회에 참석하는 것을 일상 업무로 하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런 일자리의 목록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궁금해졌다. 이런 종류의 일자리가 정말로 쓸모가 없을까? 또는 이런 일자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가능성은 있었지만 확실하게 알지 못했기에, 어떤 면에서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이 실험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고 싶어진 것이다.
1930년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20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기술이 발전하여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 주당 15시간 근로라는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말이 옳다고 믿을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 수준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술은 우리 모두가 더 많이 일하게 할 방법을 강구해 내기 위해 소집되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실상 무의미한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했다. 특히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직장 생활 내내 내심으로는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업무를 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이런 상황이 유발한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피해는 매우 깊다. 그것은 우리 공통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다. 그런데도 그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
 케인스가 약속한 유토피아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열렬하게 고대하던 것인데) 왜 실현되지 못했을까? 오늘날 그 의문에 주어지는 모범답안은 그가 소비주의의 엄청난 증가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적게 일할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놀잇감과 유흥을 원하는지의 선택지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함께 후자를 선택했다. 이는 근사한 도덕적 우화는 되겠지만 잠깐만 다시 생각해 봐도 진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1920년대 이후 무수히 많은 새 일자리와 산업이 창조되는 것을 보아 왔지만, 그중에서 스시나 아이폰이나 고급 운동화의 생산과 분배에 관련된 일자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새 일자리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1910년에서 2000년 사이 미국의 고용 상황(영국의 상황도 거의 같다.)을 비교하는 최근의 한 보고서에 그 대답이 명료하게 나와 있다. 지난 세기 동안 집안 하인, 생산업, 농업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는 대폭 줄어들었다. 동시에 “전문직, 경영, 회계, 영업, 서비스업 노동자”의 수는 세 배로 늘었고, “전체 고용의 4분의 1에서 4분의 3으로” 증가했다. 다른 말로 하면 생산 직업의 큰 부분이 예견된 대로 업무의 자동화 추세에 따라 사라졌다는 말이다.(인도와 중국에서 고생하는 엄청난 무리를 포함해 전 세계 생산업 노동자를 셈에 넣는다 해도, 그런 노동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전 세계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노동 시간이 대폭 줄어들어 세계 인구가 각자의 기획과 오락과 꿈과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추구할 여유가 생기지는 않았다. 서비스업 부문도 별로 커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행정 부문만 팽창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니까 금융 서비스나 텔레마케팅처럼 완전히 새로운 산업이 만들어지거나, 기업 법률, 학술, 건강 관리, 인사관리, 홍보 같은 부문이 전례 없이 커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증가율에는 이런 산업을 위한 행정적, 기술적 지원, 또는 보안 지원을 담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오로지 사람들이 온갖 다른 업무를 수행하느라 시간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수많은 부수적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개 목욕시키는 사람, 야간 피자 배달원)은 아직 반영하지조차 않았다.
이런 직업들을 나는 ‘불쉿 직업’이라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는 마치 오로지 모든 인간을 일하게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의미도 없는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 자본주의하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물론 소련같은 비효율적인 구식 국가에서, 고용이 권리인 동시에 신성한 임무로 간주되던 그런 곳에서 체제는 오로지 그래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소련의 백화점에서 고기 한 토막을 파는 데 점원 세 명이 할당되었던 이유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시장 경쟁이 자연스럽게 해결해 줄 것으로 예상되는 종류의 문제다. 적어도 경제 이론에 따르면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기업은 절대로 고용할 필요가 없는 노동자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기업체들이 구조 조정을 무자비하게 실행할 때, 해고와 효율성 제고가 행해지는 대상은 언제나 물건을 실제로 만들고 옮기고 고치고 유지 관리하는 사람들 계급이다.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이상한 연금술을 통해 결국은 사무직원의 수가 늘어나는 것 같고, (사실상 소련의 노동자들과도 다르지 않은) 고용인들이 서류상으로는 매주 40~50시간씩 일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노동시간은 케인스가 예견한 것처럼 15시간에 불과한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다. 그들의 실제 노동시간 외의 공백은 동기부여 세미나를 기획하고 참가하거나, 페이스북 프로필을 갱신하거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데 소모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경제적인 데 있지 않다. 그 대답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지배계급은 행복하고 생산적이며 여유 시간도 누리는 인구가 자신들에게 치명적으로 위험한 존재임을 알았다.(이런 상황에 근접하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1960년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 보라.) 다른 한편으로, 노동 그 자체에 도덕적 가치가 있다는 느낌, 그리고 눈 뜨고 있는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어떤 종류든 치열한 노동에 몸을 바치려는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느낌은 그들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
영국의 학계에서 행정적 책임 소관이 끝도 없이 커지는 꼴을 보니, 지옥의 모습이 곧 이럴 듯했다.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집단이 곧 지옥이다. 훌륭한 가구 장인이기 때문에 고용되었는데, 알고 보니 허구한 날 생선 튀기는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이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니라고 하자. 아니면 튀겨야 할 생선이 많은 것도 아니라고 하자. 그런데 어쩌다 동료들 가운데 가구 제작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쏟고, 그러느라 할당받은 생선 분량을 제대로 튀겨 내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다들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선 튀기는 작업까지 엉망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실상 계속 생선만 튀기고 있다. 나는 이것이 우리 경제의 도덕적 역학에 대한 아주 정확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장이 즉각 반박당하리라는 것도 안다. “어떤 일자리가 정말 ‘필요’한지 당신은 어떻게 판단하는가? ‘필요하다’는 게 도대체 뭔가? 당신은 인류학 교수인데, 그 직업은 왜 ‘필요’한가?”(그리고 정말로 황색 신문 독자들은 내 직업이야말로 쓸모없는 사회적 낭비의 정의라고 여길 것이다.) 어느 차원에서 보면 이 반박이 명백히 옳다.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는 객관적 척도는 없다.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이 무의미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 얼마 전 나는 열다섯 살 이후 보지 못했던 학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사이 그는 처음에는 시인이었다가, 그다음에는 인디 록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나는 그 밴드의 노래 몇 곡을 라디오에서 들으면서도 그 가수가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분명히 뛰어난 가수였고 혁신적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밝혀 주고 더 낫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앨범 몇 장이 실패하자 그는 계약을 이어 가지 못했고, 빚을 진 채 갓난아이 딸을 키우다 결국은 “방향 없는 수많은 족속들의 기본 선택지”인 로스쿨에 진학했다. 이제 그는 뉴욕 어느 저명한 로펌의 기업 변호사가 되어 있다. 그는 내가 만난 자신의 직업이 완전히 무의미하고, 세상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며, 스스로 평가하자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인정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여기서 여러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선 재능 있는 시인이자 음악가에 대한 수요가 지극히 한정된 데 비해 회사법 전문가에 대한 수요는 무한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어떤 점을 이야기해 주는가?(대답: 만약 처분 가능한 부의 대부분을 인구 중 1퍼센트가 장악한다면, 우리가 시장이라 부르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들이 생각하기에 쓸모있거나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반영한다.) 게다가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나는 자신의 직업이 불쉿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기업 변호사를 만난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위에서 언급한 새 산업 거의 모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파티에서 만난 유급 전문직 종사자들 가운데 당신이 뭔가 흥미롭게 여겨질 만한 일을 한다고(예를 들면 인류학자라고) 밝혔을 때 자신의 직업은 어떤 계열인지 언급 자체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술을 몇 잔 건네 보라. 그러면 자기들 직업이 실제로는 얼마나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지, 열화같이 불평을 쏟아 낼 것이다.

이것은 뿌리 깊은 정신적 폭력이다. 내심으로는 자기 직업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어떻게 노동의 존엄성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어찌 깊은 분노와 원망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의 특이한 속성 가운데 하나는 사회 지배층의 분노 조종 방법이다. 그들은 앞에서 생선 튀기는 사람들처럼 의미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분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정조준되도록 방법을 궁리해 낸다. 예를 들면, 우리 사회에는 어떤 직업이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확실할수록 정당한 보수를 받을 확률은 더 낮아진다는 일반 원칙이 있는 것 같다. 여기서도 객관적 척도는 찾기 힘들지만, 쉽게 알아내려면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 된다. 그 직업 계급이 통째로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간호사, 쓰레기 수거 요원, 정비공 같은 직종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들이 만약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그 영향은 즉각적이고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세상에 교사나 항만 노동자가 없어지면 금방 난관에 봉착할 것이고, SF 소설가나 스카 음악가(ska music, 레게 음악의 영향으로 자메이카에서 시작되었지만 1980년대에 영국에서 인기를 끌면서 재탄생한 장르 — 옮긴이)가 없는 세상은 확실히 더 나쁜 세상일 것이다. 그런데 사모펀드 CEO나 광고 조사원, 보험 설계사, 텔레마케터, 집행관, 법률컨설턴트 등이 몽땅 사라진다 해서 앞의 경우와 비슷하게 세상이 나빠질지는 분명치 않다.(훨씬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 몇 가지(의사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위의 법칙은 놀랄 만큼 잘 들어맞는다.
더 괴상한 건 세상이 이래야 한다는 게 일반적 견해가 된 것 같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익 포퓰리즘이 가진 비밀의 힘 가운데 하나다.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을 두고 그들이 런던을 마비시킨다는 불만을 부추기는 것이 그런 사례다. 지하철 노동자들이 런던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들의 일이 실제로 필수적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이 사람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이 점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미국 공화당은 소위 부풀려진 임금과 이권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교사나 자동차 노동자들에게(실제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학교 경영자들이나 자동차 회사 경영진이 아니라)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큰 성공을 거두어 왔다. 마치 그들에게 “당신들은 아이들을 가르치잖아! 아니면 자동차를 만들잖아! 진짜 일을 하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들은 중산층의 연금과 의료보험도 기대할 수 있잖아!”라는 비난을 던지는 것 같다.
금융자본의 권력 유지에 완벽하게 적합한 노동 체제를 누가 설계했는지 모르지만, 더할 나위 없는 솜씨다. 진짜 노동자, 생산적 노동자는 가차 없이 압력을 받고 수탈당한다. 그 외 나머지는 전반적으로 욕을 먹는 실직자층과 기본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봉급을 받는 더 큰 층으로 나뉜다. 후자는 그들 스스로 지배계급(특히 그들의 금융 대리인들)의 시각이나 감수성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만든 지위(관리자, 경영자 등)를 차지하고 있는 동시에, 명료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원한을 갖게 된다. 이런 시스템이 의식적으로 설계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거의 한 세기에 달하는 시행착오를 거쳐 형성된 것이니까. 하지만 이 시스템은 왜 우리가 기술적으로는 그럴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서너 시간만 일하는 형편이 되지 못하는지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다.
─ 데이비드 그레이버, 김병화 옮김, 『불쉿 잡』, 13~20쪽에서

주당 15시간 근로라니……52시간을 논하는 와중에 꿈 같은 이야기예요. 저도 가끔 ‘일을 위한 일’이 무한정 늘어나는 것만 같은 “이상한 연금술”을 목격할 때가 있는데요. 제발 저린(?) 인류학자가 ‘진짜 일’과 ‘가짜 일’, ‘의미 있는 일’과 ‘쓸모 없는 일’을 어떻게 구분할 건가?라는 반박을 미리 제기하고 있지만 스스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불쉿 잡’으로 정의하고 들여다보는 일은 재미있고 신선했어요. 필수노동의 예시로 등장한 간호사, 쓰레기 수거 요원, 정비공……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아찔하고요. ‘불쉿 잡’이 계속해서 양산되는 이 요상한 상황에 대해서 이 책이 이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네요!

이 제목, 그 의미를 채 알기 전부터 “불쉿 잡” 세 글자를 듣자마자 단번에 꽂히는 데가 있어요.(눈물부터 닦을게요.) 금융, 경영, 행정 등 흔히 선호되는 일자리를 대표적인 불쉿잡으로 분류할 때, 현재 우리의 일과 노동에 관한 새로운 문제의식이 만들어지네요. 오늘 레터를 읽으면서 소위 고연봉을 받고 있는 변리사, 대기업 마케터, 펀드매니저 친구들이 만나면 불평을 한참 하다가, 조용히 있는 저를 보며 “그래도 넌 하고 싶은 일 하지?”라고 묻던 장면을 다른 관점에서 복기해볼 수 있었어요. 마찬가지로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 교사들의 파업에 대한 비난과 분노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도덕과 정치의 핵심은 감정인 걸까요? 이 책을 진짜 일/의미 있는 일과 쓸모없는 일의 경계에서 고민하고 있는 친구·동료들과 함께 읽고 싶어요.

“당신의 직업은 세상에 의미있는 기여를 하는가?”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직업이라는 현상에 관하여”라는 장난스럽고도 도발적인 제목의 기고문에서 이 질문을 던졌다. 이 글이 17개 국어로 번역되고 1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뒤에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둘러싸고 아직도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불쉿 직업이란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 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로, 종사자는 그런 직업이 아닌 척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낀다.” 케인스는 20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기술이 발전하여 충분히 주당 15시간 노동여건을 달성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그가 옳을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아직 수백만 노동자들은 주 40시간 이상을 자신들이 싫어하는 직업에 소모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는 이 책에서 불쉿 직업의 다섯가지 유형을 구분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한 사회의 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을 때, 어떤 직업이 “유용”하고 “중요”한지에 대한 결정권은 그들의 손에 있다. 그레이버는 전 세계의 노동자들로부터 얻은 시야를 넓혀주는 증언들을 보기로 삼아 자신의 논점을 전개한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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