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님, 한편을 함께 읽어요. 지난 주에 이어 《한편》 5호 ‘일’ 독자 수기 공모로 뽑힌 이야기를 보내 드립니다.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 바로 ‘일잘러’의 이야기예요. 꼼꼼한 성격 탓에 모든 일을 완벽히 해내다 보니 나는 어느새 ‘일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고, 일이 주는 보람과 인정은 내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고 역할이 달라지면서 점점 늘어가는 일은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데요. 스스로 과로하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의 보람과 고통을 보여 주는 한 편의 글을 함께 읽어 봐요.
나는 늘 일복 많은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 후 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데, 항상 일이 많았다. 다양한 일을 했지만 일이 많다고 해서 보수가 늘거나 다른 보상이 주어지는 일들은 아니었다. 정해진 월급 안에서 그저 나만 유독 일이 많았을 뿐이다.
예전에는 단순히 내가 일을 잘해서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 되었다. 맡은 일은 책임을 지고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성격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듣기 좋았으니까.
점점 내가 하는 일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사람들은 나에게 일을 맡기면 안심했고 누군가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오는 ‘일 잘하고 꼼꼼하다’라는 소리가 굉장한 칭찬처럼 들렸다. 그건 나의 자부심이 됐다. 나를 나타내는 특성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저 일을 잘해서 일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같은 급여를 받는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일을 잘했고, 일이 많더라도 별다른 군소리도 없었다. 묵묵히 맡은 일뿐 아니라 때론 그 이상의 일까지도 해내는 사람, 그게 나였던 것이다. 신속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면서 결과까지 좋았다. 그러면서 불평불만도 없었다.
관리자 입장에서 일을 시켜도 손이 많이 가고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부리기 좋고 다루기도 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계속 일을 몰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반 사원에서 관리자에 준하는 위치로 이동하면서 이런 성향은 나의 발목을 잡는 요소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일을 좀처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됐다. 내가 아닌 그 누구에게 맡겨도 나만큼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지나친 자만심일 수도 있는데, 몇 번 비슷한 일들을 겪고 내가 그 뒤처리를 맡게 되면서 그 생각이 기우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자리에 따라 해야 할 일과 요구되는 자세가 달라지는 법이다. 시간에 엄청 쫓기면서도 내가 직접 일을 해야만 안심이 되어서 스트레스를 있는 대로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일 계속됐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나란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가끔씩 이 회사는 내가 아니면 안 굴러 가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쉬는 동안에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에 응대하면서 마음 한편에는 점점 불만이 쌓여 갔다. 휴가 때도 마음 놓고 쉴 수 없었다. 항상 전화기를 곁에 두고 확인해야 했다. 이렇게만 보면 내가 마치 한 기업의 총수나 CEO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니 더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나는 회사 내 모든 과를 아우르는 전천후 만능 인간이었다.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여기저기서 나만 찾아 대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출근하는 게 싫었던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출근하기가 싫었다. 한번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자 이 마음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커졌다.
사실 나는 일하는 게 싫지 않다. 가능하다면 나이 들어서도 오래오래 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렇게 있다간 내가 먼저 탈이 날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번아웃에 관한 글을 읽게 됐는데, 마치 누군가 나를 관찰하고 쓴 것 같았다. 나는 처음에는 가벼운 일 중독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번아웃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번아웃에 특별한 치료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 스스로가 먼저 달라지려고 노력해야 했다. 내가 아니어도 이 일은 누군가가 할 수 있고 회사는 나 없이도 잘 굴러간다는 것을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약간 거리를 두고 지켜봤다. 내가 하면 단시간에 한 번에 할 일도 버벅대고 잦은 실수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일은 마무리됐다.
나는 뭐가 그리 불안했을까. 아무래도 나는 일을 통해 인정받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의 가치를 찾으려고 했나 보다. 존재와 삶의 이유를 일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냥 나라는 사람 자체로 있어도 되는 건데, 항상 어딘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걸 마음의 안식으로 삼았다. 문득 내가 일을 하는 만큼 보상이 뒤따랐다면 과연 번아웃이 오지 않았을까 자문해 본다.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의 성향상 어떤 경우였더라도 번아웃은 반드시 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다만 예전만큼 혼자 아등바등하지는 않는다. 내가 아니면 누군가가 할 것이고, 내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는 걸 받아들이려고 한다. 더 이상 일에서 나의 존재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일이 많은 건 복이 아니라 독이다. 일은 내가 살아가는 여러 방편 중 하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일하는 나의 모습은 너무 좋기 때문에 계속 일은 할 것이다.
─ 독자 티니안 님의 수기
과로의 기준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실제 일을 하면서 자신이 과로하고 있음을 깨닫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다들 ‘조금만 더…남들도 하고 있는데…’라고 생각하다 어느새 훌쩍 과로의 길로 가 버리는 것은 아닐지요. 이 글에서 보여 주듯이 일이 고되지만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는 점 역시 판단을 더 어렵게 하고요.
마침 이 글과 꼭 어울리는 세미나가 준비되어 있는데요. 《한편》 5호에 「과로죽음에 이르지 않도록」을 쓰신 강민정 연구자와 함께하는 ‘일’ 호의 두 번째 세미나는 바로 ‘혹시 나 과로하고 있을까?’입니다. 나의 노동 시간과 양, 업무환경은 괜찮은가? 고민 되는 분들은 사연을 보내 주세요. 세미나 신청과 사연 접수는 여기에서!
한편 팀의 일잘러인 책과 퇴근이 좋은 편집자 님이 이 글을 선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이 연사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지켜본바 번아웃은 스스로 깨닫기까지도, 그로부터 회복되기까지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기에 이 짧은 글 속에 그 모든 과정이 있다는 데 안도하며 읽었어요. “일이 많은 건 복이 아니라 독이다.”라는 라임 맞는 간명한 정의에 밑줄 그으며(물론 《한편》 7호 ‘중독’을 떠올리며) 과로 문제는 스스로만이 아니라 동료, 가족이 알아야 하고, 조직 안에서 풀어야 한다는 점을 주석으로 달고 싶어요.
일에 관한 이야기가 정말 많다. 스마트하게 직장생활 하는 법, 당장 퇴사해도 되는 커리어 만드는 법,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또는 창조성을 발휘하며 만족스럽게 일하는 법 등등.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의 흐름이다. 한편 일에 대한 이야기가 여전히 적다. 과중한 업무량, 위험한 업무 환경, 낮은 임금, 부족한 일자리에 대한 대책까지.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린다. 한참 ‘코인 열풍’이 불고 있는 2021년. 이제 와서 일이란 무엇일까? 일하는 보람을 향한 열망과 벗어날 수 없는 노동의 굴레 사이에서 인문잡지 《한편》 5호는 ‘일’을 탐구한다. 한국을 휩쓸고 있는 투자 열풍 진단에서 출발해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여성학, 심리학, 철학, 교육학, 예술학 등 열 편의 글을 실었다. 개별적인 경험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가운데, 내가 성장할 길 또는 사회 변화의 길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