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서 하는 일

 

 

나에 대해 쓰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편》 5호를 만들면서 편집부에서는 ‘과연 (    )은 일인가?’라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   ) 안에 들어가는 것은 주식 투자, 일할 체력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 자기 개발을 위한 독서, SNS에서 ‘나’를 드러내기…… 목록이 한없이 길어졌는데요. 특히 나에 대해 쓰고 말하는 일은 현대인의 필수 덕목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꼭 인플루언서가 아니더라도요. ‘나에 대해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 책 『자서전』의 서문을 함께 읽어 봐요!

자서전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 간다. 그가 성공 가도를 달음질쳐 왔든, 세상과 권력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든 상관없다. 삶을 이야기로 풀어낼 때 그는 이야기라고 하는 무대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에는 삶을 넘어서는 부분 또는 삶을 압도하는 부분이 있다. 지나간 과거를 복구하기 위해 암중모색하는 과정에서 과거가 그의 탐색에 저항하면 할수록 과거를 탐색하고자 하는 욕망은 집요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삶의 무게가 이야기의 무게로 바뀌는 순간, 삶은 드디어 깊이를 획득한다. 그 깊이는 어쩌면 경험의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텍스트에 쓰여진 삶이 자신이 만들어 간 과거의 기록이면서 경험된 과거의 사실을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다. 인생의 의미를 정리하면서 파편화된 과거에 통일성을 부여하고자 할 때, 그는 실현하지 못할 미래의 전망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흔히 자서전은 허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서전은 소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독서법을 필요로 한다. 자서전에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진실의 담론’과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정당화의 담론’이 서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뒤엉켜 있다. 사실 한 작가의 문학적인 기획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관계는 어떤 글쓰기를 선택했는가에 반영되어 있다. 
18세기 중엽, 루소가 자서전을 쓰던 당시, 프랑스 사회는 정치・경제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한 인간을 계층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규정하기보다는 그가 갖고 있는 독특한 심리 상태에 따라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처음으로 생겨났고, 어린이는 관찰과 교육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전 세대에 유행했던 좌충우돌형 모험 소설을 대신하여 주인공이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성장 소설이 문학사에 새롭게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소는 자신의 삶에 대한 독창성을 자각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기 정당화의 글쓰기가 자기 성찰의 글쓰기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 다시 말해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소 덕분에 프랑스의 자서전 역사가 새롭게 쓰이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에게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루소 이후에도 프랑스 자서전 작가들은 마치 거대한 산맥처럼 이어져 내려왔고 자서전 장르를 갱신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장르의 역사는 그 장르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의 역사이며 동시에 그 작품이 놓여 있는 문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은 편지, 회고록, 일기, 자전적 소설 등과 함께 ‘자기에 대한 글쓰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장르다. 그러나 대중적 인기와 상관없이 문학 연구가들 사이에서 자서전은 소설이나 시 또는 연극과 같은 주류 문학에 속하지 못하고 ‘하위 문학’으로 평가 절하되어 왔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서전은 여전히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를 비롯하여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 기업인 등 사회적 명성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를 얻게 되었고, 자신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일반화되었다. 이제는 작가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도 SNS나 홈페이지, 블로그 등에 자신의 사진을 공개하고 생각과 일상을 익명의 독자들과 기꺼이 나누고 있다. 현대인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간, 공적인 시선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자기 과시적인 인간으로 보일 정도다.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 덕분에 자기에 대한 글쓰기뿐 아니라 문학 일반에 대해 새로운 성찰의 가능성이 제시된 것도 사실이다. 블로그에 올라온 ‘의견’에 대해 독자들이 실시간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보임에 따라 작가와 독자의 상호성에 대해 새로운 관점이 요구되었고, 인터넷이라는 물질적 제약이 내면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글쓰기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또 인터넷을 이용한 글쓰기가 책이라는 전통적인 매체와 긴장 관계에 있는지 아니면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지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자서전을 비롯하여 자기에 대한 글쓰기 속에 자아의 형성 과정과 변모 과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이러한 현상을 사회학자들은 사회 분화에 따른 개인주의의 발달과 연결시킨다. 20세기 전반부에 생산 중심주의와 더불어 합리성이 강화되면서 집단 속에 개인이 용해되고 사라져 가는 경향이 심화되었다면, 후반부에는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분리되고,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었다. 타인과 구별되는 차이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자율성 확대가 차이 정체성에 대한 요구로 드러나면서 자기에 대한 글쓰기는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방식으로, 특히 개인성을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글쓰기는 자신의 삶을 소유하는 방식이면서, 자칫 잊힐 수도 있었던 그 삶을 죽음으로부터 지켜 내는 주체적인 행위, 그리고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 다시 말해 자신을 독서의 대상으로 만드는 행위가 되었다.

개인의식이 고양되면서 자서전이 발전하게 된 역사적 문맥을 고려하면 자서전은 근대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주체의 분화, 작가 신분의 민주화, 사적 영역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서전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주체의 분화를 잘 보여 주는 장르다. 자서전 작가는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의 자기 자신이 어떠했는지를 회고적으로 기술한다. 그 과정에서 자서전 작가는 자신을 글쓰기의 주체이자 글쓰기의 대상으로 분화시킨다. 나탈리 사로트가 자신의 자서전 『어린 시절』을 어른과 아이, 두 명의 화자가 나누는 대화 형식으로 구성한 것은 자서전의 장르적 특성을 문학적 독창성으로 형상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이–화자는 과거의 시점에서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사실을 서술하며, 어른–화자는 그렇게 서술된 과거가 지닌 주관성의 함정을 지적하고 현재의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최대한 객관적인 글쓰기가 되도록 길잡이 노릇을 한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보면, E. H. 카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 것을 자서전 기술에도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다. 자서전은 경험의 과거와 글 쓰는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주체이자 대상으로 분화되는 이와 같은 특성을 통해 자서전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라고 하는 시간의 문제가 장르의 특성으로 제기된다.
자서전은 작가나 독자들의 관심 영역이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장르라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근대 이전에는 자기에 대한 글쓰기가 주로 공적 생활을 거론하는 전기에 한정되었다. 반면, 자서전은 인간의 내적 공간을 탐구함으로써 프랑스 근대 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심리 소설의 탄생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자서전은 문학 공간이 나르키소스적 체험 공간으로 변화하는 상황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르인 셈이다. 현대에 들어서 이러한 현상은 좀 더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자서전은 평범하고 심지어는 진부하기까지 한 일상성을 드러내는 탁월한 장르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자서전에 기록되는 순간, 일상성은 진부함을 벗어 던지고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성스러움이 드러난다. 자서전적인 성찰의 글쓰기는 표면에서 깊이를 발견하고, 텅 비어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충만함을 탐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자서전이 총체적이고 논리 정연하며 지속적인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자서전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의 통일성과 정체성을 구축하는” 프로그램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에서 잘 알 수 있듯, 자서전은 경험의 장을 구조화함으로써 삶에 결정적인 양태를 부과하는 자기 인식의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다. 자서전이 자기 인식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자율성과 통일성을 지닌 ‘자아’라는 개념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 개인의 모순된 경험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함으로써 인간은 통합적이고 자족적인 개 성을 지닌 자, 즉 집단과는 구별되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자로 받아들여진다. 자아를 인식하는 방식이 바뀌면서, ‘나’는 단순히 글을 쓰는 자가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차이를 인식하고 자신을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는 자로 존재하게 된다. 인식의 주요 대상이자 해석되어야 하고 기록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자서전적 자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서전적인 글쓰기의 관점에서 볼 때 낭만주의적 자아의 발견은 개인적인 삶도 이야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개성 속에 내재된 이야기성의 발견”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왜 자서전이 18세기에 이르러 현대적인 자기 표현의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18세기야말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극도로 고조되어 인간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글쓰기가 요구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성찰의 형식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흔히 파편화된 자아 인식, 혼종적 장르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한 현대적인 현상과는 대립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대에 들어,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데카르트적 주체 의식은 하나의 유령으로 취급받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자서전의 토대가 되었던 자의식 탐구, 작중 인물, 이야기 또는 줄거리 등의 개념으로는 현대인의 심성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비판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연대기적으로 구성된 선적 구성물로서의 텍스트를 대신하여 파편화된 텍스트가 유행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아가 자율적인 총체가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며,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복수의 현실을 보여 주는 텍스트가 더욱 각광받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제각기 다른 경향을 표방하던 작가들이 앞 다투어 자서전을 쓰고 있고 또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누보로망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이야기의 죽음’과 후에 푸코가 철학적으로 선언하게 될 ‘주체의 죽음’이라는 위기 상황이 오히려 자서전이 발전할 수 있는 풍요로운 토양을 제공한 것일까? 

누보로망을 대표하던 소설가였던 알랭 로브그리예가 1986년에 「나는 나 이외의 어떤 것도 결코 말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행한 한 강연은 그가 자서전적인 글쓰기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다소 도발적인 이 강연을 통해 그가 누보로망의 글쓰기를 포함하여 그동안 추구해 왔던 자신의 문학적 이상이 실패했음을 고백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개인 체험의 회복을 통해 작가라는 개념으로, 나만의 삶으로, 결국은 자서전적인 효과로의 ‘회귀’를 선언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이 강연은 현대 프랑스 문학이 처한 특별한 양상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문학의 가능성을 글 쓰는 자의 삶의 가능성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는 자서전 장르의 문학사적 의미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미레이유 칼-그뤼베르는 자서전이 1960년대에 제기된 문학적 탐색을 위한 특권적인 장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서전은 문학에 관한 질문들뿐 아니라 문학이 문학에 대해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 말하자면 문학의 존재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모순을 구체화시켜 보여 주고 있다.
이 예문은 왜 자서전이 새로운 유형의 글쓰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잘 요약하고 있다. 자서전은 한 작가가 자신의 삶에 대한 탐색의 결과를 조리 있게 요약하여 제시하는 개인적인 표현 방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 문학 자체에 대해 사유하는 열린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자서전 작가가 주체이자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마이클 셰링엄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자서전의 주체가 혼성(hybrid), 즉 과거와 현재, 자기와 타자, 자료와 욕망, 현실 참조적인 것과 텍스트적인 것, 발화된 것과 발화되고 있는 것의 결합”을 이루 어 내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는 극히 현대적인 주체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유호식, 『자서전』에서

진실의 담론vs정당화의 담론. 저는 아무도 안 볼 글을 쓸 때조차 정당화를 해 버리고야 마는데……진실이 밝혀질까 봐 나에 대해 쓰기가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어요. 글쓰기는 ‘이상자아’를 향한 행위라는 철학자의 강의도 떠오르네요. 나에 대해 쓰면서 나를 생각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여겨지면서도, 자아를 드러내야 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는 상황이 버겁다 느껴지기도 해요. 현대인 되기란 왜 이렇게 어려운지.

18세기 개인의 발견과 함께 자서전이라는 형식이 공식적인 문학의 형태로 자리잡은 이후 지금까지,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점점 더 확대되고 그 삶의 모습이 다양해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최근 읽은 훌륭한 논픽션들이 작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닫네요. “어린아이로서, 한때는 학생으로서, 비평가로서, 그리고 마침내는 작가로서 SF와 다소 복잡하게 얽혀온 나의 개인사에 관한 책.“을 쓴 디스토피아 소설가, 학부 시절 나는 교재로 채택될 만큼 훌륭한 책을 쓰는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그런 꿈을 이루어 준 책이 ‘이상심리’ 수업에 쓰이는 회고록이 될 줄은 몰다.”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의 유머 감각을 여전히 갖고 있는 우울증 환자, ”다른 ADHD들도 나처럼 새하얀 밤과 깜깜한 낮을 보내는지 궁금했다. 친근하고 정중하게 안부를 묻기 위하여, 일단 나의 이야기를 썼다.”라고 진솔한 인사를 건네는 젊은 한국 여성 등이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만큼 감동적인 이야기는 없다. ‘자기에 대한 글쓰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랜 세월 동안 우리와 함께해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어째서 인간은 ‘자기에 대한 글쓰기’를 계속하는 것일까? 특히 현대는 각종 SNS, 개인 홈페이지, 블로그 등 정보화 서비스에 힘입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자기에 대한 글쓰기’가 빈번히 행해지고 있는 시대다. 저자 유호식은 오늘날 더욱 급증하고 있는 자기표현의 글쓰기가 지닌 진정한 의미와 위상을 새로이 정립하기 위해 지난 수천 년간 역사 속에 등장해 온 ‘위대한 자서전’을 찾아 기나긴 여정에 오른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서전이 ‘읽어야 하는 하나의 텍스트’인 동시에 인간으로서 역사에 족적을 남기는 ‘하나의 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파악하게 될 것이다. 결국 ‘자기에 대한 글쓰기’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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