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안녕하세요? Are you in peace?

 

 

『초급 한국어』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name%$ 님, 오늘은 한국어 공부에 관한 두 편을 가져왔어요. 문지혁 소설가의 『초급 한국어』에서 주인공인 뉴욕의 한국어 강사 ‘문지혁’은 익숙했던 언어를 낯설게 보는 경험을 합니다. 동시에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처지를 깨닫기도 하고요. 《한편》 5호의 마지막 글인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역시 외국인 학생들을 통해 한국어를 새로이 보는 동시에 한국어 가르치는 일의 노동 조건에 대해 고민하는 한국어 강사의 이야기예요. 초록색 『초급 한국어』와 《한편》 속 한 편을 함께 읽어요!

9
수업에 들어온 학생은 모두 스무 명이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지만 예상대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1교시인 데다 학기가 시작하는 첫 월요일이어서인지 학생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게다가 말 그대로 초급 수업이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준비해 온 수업 슬라이드를 띄우고, 칠판에 크게 내 이름을 영자와 한글로 적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오는 게 느껴졌다.

 

Ji Hyuck Moon
문지혁

 

그리고 옆에 오늘 배울 인사말을 적었다.

 

Welcome!
안녕하세요. Annyeonghaseyo.

 

Nice to meet you.
반가워요. Bangawoyo.

 

반갑습니다. Bangabseubnida.
만나서 반가워요. Mannaseo Bangawoyo.


이제 일주일에 네 번, 월화수목 오전 8시부터 9시 15분까지 이 학생들은 한 사람당 하루에 약 75달러를 내고 한글과 한국어를 공부할 것이다. 2주 후에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모두 외우게 될 것이고, 인사말과 자기소개를 하게 될 것이며, 학기가 끝날 즈음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말하고 읽고 쓰게 될 것이다.


여기서 광화문까지 어떻게 가요?

10
코리안 헤리티지를 가진 학생, 그러니까 부모가 한국인이거나 가족 중에 한국계가 있는 학생은 전체의 3분의 1 정도였다. 이름은 다양해도 성을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일본이나 중국 배경의 학생들도 있었다. 역시 이해 가능했다. 궁금한 건 나머지 학생들이었다. 이름도 외모도 배경도 한국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이들. 그들은 여기 왜 왔을까?

11
첫 수업의 목표는 가장 기본적인 인사말을 가르치는 거였다. 나는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부분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안녕하세요’만 제대로 알려 줄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이것도 제대로 사용하려면 세 가지 표현을 알아야 했다.

 

안녕하세요? Annyeonghaseyo?
안녕히 계세요. Annyeonghi Gyeseyo.
안녕히 가세요. Annyeonghi Gaseyo.


발음을 몇 번씩 따라 하게 한 다음에 학생들에게 영어로 뜻을 설명해 주었다. ‘안녕하세요’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인사예요. 누군가를 만나면 하루 중 언제라도 쓸 수 있지요. 하지만 헤어질 때는 상황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뉩니다. 만약 상대방이 머물고 당신이 떠난다면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해야 하고, 반대로 당신이 머물고 상대방이 떠난다면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자 학생 중 하나가 손을 들고 영어로 물었다.
 
“정확한 뜻이 뭐죠? 좀 길어 보이는데.”
 
나는 화이트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가가서 그 옆에 뜻을 적었다.

 

안녕하세요? Annyeonghaseyo? → Are you in peace?
안녕히 계세요. Annyeonghi Gyeseyo. → Stay in peace.
안녕히 가세요. Annyeonghi Gaseyo. → Go in peace.


뜻을 다 쓰기도 전에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과 함께 동요가 일었다. 몇몇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어는 더 꼬여 혀끝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얼굴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질문했던 학생이 말했다.


“그런 말을 일상에서 한다고요? 「스타워즈」에서 요다가 할 것 같은 말인데. ‘평안하냐?’”


반쯤 누운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아 유 인 피스?’라고 발음하자 나머지 학생들이 모두 웃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 학생들에게 내 번역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릴지를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틀린 건 아니었다. ‘안녕’을 달리 어떻게 번역할 수 있단 말인가?


“하이나 헬로처럼 단순한 건 없나요?”


다른 학생이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있지요 하고 답했다.


“안녕. Peace.”


학생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고, 내 얼굴은 마침내 완전히 빨개졌다.
 


― 문지혁, 『초급 한국어』,
25~33쪽
 
 

한국어를 처음 가르친 것은 2008년 5월이다. 당시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 중이었으며, 선배의 소개로 성공회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의 첫 학생들은 미얀마의 8888 민주항쟁 후에 한국으로 망명을 온 활동가들이었다. 이미 한국에서 오래 살았으므로 다들 유창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다만 글쓰기, 발음 등의 실수를 바로잡고 언론을 상대할 때 쓰일 만한 격식 있는 표현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늦은 오후, 네 학생과 함께 긴장하면서 진행한 첫 한국어 수업을 마쳤을 때, 수업을 듣던 네툰나잉 씨가 물었다.
“선생님, 한국어에는 주격 조사가 두 개 있잖아요. ‘학교가 커요.’ ‘집이 작아요.’의 ‘이’와 ‘가’처럼. 그런데 뜻도 역할도 똑같은 게 왜 두 개나 있나요?”
내가 한국어 선생으로서 받은 첫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발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집가 작아요.’ ‘학교이 커요.’처럼 말하면 자연스럽지 않으니까요.”
네툰나잉 씨가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선생님, 버마어에도 주격 조사가 있습니다. ‘카’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주어가 자음으로 끝나든 모음으로 끝나든 ‘카’를 붙여요. 버마 사람에게는 ‘집카 작아요.’라고 말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이날의 대화는 내게 두 가지 배움을 남겼다. 첫째로, 선생 입장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학생에게도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 상대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르치는 일의 시작이다. 둘째로, 외국인 학생들은 능통하게 모국어를 구사하며 그 틀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할 능력이 있다. 학생들이 이미 온전한 능력자라는 것을 잊었을 때 학생을 환자 또는 아이로 다루게 되는데, 전자의 경우는 각종 ‘클리닉’을 열어 학생을 ‘고치고’ 후자의 경우는 외국인 학생의 한국어 사용을 기특해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언어는 선생과 학생 모두에게 극히 익숙한 도구다. 선생은 숨 쉬는 법을 가르치듯이, 걷는 법을 가르치듯이 한국어를 가르친다. 자연히 선생은 자신의 숨과 걸음을 낯설게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구수한 선생님께!”라고 적힌 베트남 학생의 편지를 받는다. 무슨 뜻인지 묻자 학생은 당황하면서 ‘따뜻한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변명하듯 답한다. 한국어의 ‘따뜻하다’는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고, 그래서 사전을 뒤져 ‘구수하다’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학생은 모국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나는 익숙한 언어의 낯선 쓰임을 경험한다.
― 최수근,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한편》 5호 ‘일’, 196~199쪽 

 

62
시간을 묻고 답하는 법을 가르친다.
 
1. 두 사람씩 짝을 짓게 한다.
2. 순서를 정한다.
3. 화면에 시계 그림을 띄워 놓고 먼저 묻는 사람이 ‘지금 몇 시예요?’라고 묻는다.
4. 대답하는 사람은 시곗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시간을 말한다.
5. 시계 그림을 바꾸고, 역할을 바꾸어 3번과 4번을 진행한다.
 
문제는 한국어로 시간을 읽는 방법이 꽤 혼란스럽다는 사실이다.


가령 시간을 나타내는 큰 시간 ‘10’은 ‘열’이라는 고유어로 읽지만, 분을 나타내는 작은 시간 ‘10’은 ‘십’이라는 한자어로 읽는다. 30분을 뜻하는 ‘반’ 역시 한자어다. 시간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한국어의 숫자 체계를 알아야 하는데, 고유어와 한자어 체계가 공존하고 있어 구분이 쉽지 않다. 나이도 마찬가지다. 말할 때는 스물한 살이라고 하는 편이 자연스럽고 읽을 때는 숫자로 이십일이라고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스물한살과 이십일 세. 같은 표현인데 왜 두 가지로 나누어 쓰냐고 물으면 답하기가 어렵다. 한국어는 매크로 투 마이크로의 언어니까 중요한 것(시)에는 고유어를 쓰고 덜 중요한 것(분)에는 한자어를 쓴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도 일관성의 문제는 남는다.


짝을 바꾸고 순서를 교환한다. 남은 수업 내내 시간을 묻고 답하는 목소리들이 교실의 시간 속을 천천히 흘러간다.

 

63
한국어에서 시간은 ‘시간’이라는 단어 하나뿐이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세 가지 단어로 구분했다. 아이온(aion), 크로노스(chronos), 그리고 카이로스(kairos). 아이온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무한하고 신성하고 영원한 시간, 그러므로 신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양적이고 균질한 시간, 수동적이고 무관심하며 무의미한 시간,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이다. 마지막 카이로스(kairos)는 질적이고 특별한 시간, 구별되고 이질적이며 의미를 지닌 시간, 말하자면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는 아이온에 둘러싸인 채 크로노스 속을 살아가는 존재다. 무심하지만 규칙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시간 감옥의 죄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에는 가끔씩 카이로스가 찾아오는데, 이를테면 화살이 날아가거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전과 이후가 갈라지고, 한번 일어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따라서 시간을 묻는 방법은 두 가지여야만 한다.


1. 크로노스를 물을 때: 지금 몇 시예요?
2. 카이로스를 물을 때: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

64
나는 학생들에게, 두 번째 시간에 관해 묻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했던 건 아닐까? 그들에게 내 수업은 어떤 시간으로 기억될까?

 

 
― 문지혁, 『초급 한국어』
125~128쪽
 
 

한국어 선생이 직면하는 도전 중 하나는 바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학생의 스트레스 문제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닌데, 외국인 학생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문제를 해결할 때도 몇 배의 수고를 들여야 한다. 이들은 일상 속에서 종종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어떤 학생들은 자신이 사는 집에 문제가 생겨도 집주인에게 한국말로 자신의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집주인이 자기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다가 무력감에 빠지고 만다. 지하철에서 모국어로 친구와 대화하다가 갑자기 등짝을 맞으며 한국에서 꺼지라는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한국어를 잘하게 될수록 외국인을 미워하는 댓글이나 말의 내용을 더 많이 알아듣게 된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학생이 겪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깊고, 학생의 학습 경험은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라는 단순한 말로 다 정리되지 않는다. 한국어 선생은 이런 학생들을 교실에서 마주하게 된다.
물론 학생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 본업은 아니지만, 학생에게 학습 동기를 부여하여 적절한 마음 상태로 학습에 임하도록 하는 것은 선생의 일이다. 종종 한국어 선생은 외국인 학생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 된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보람과 기쁨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작은 친절이 외국인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경험은 한국어 선생의 일을 지속하게 하는 주요한 원동력이다. 동시에 내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수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과 한국어의 뛰어남을 홍보하는 일도 아니다. 교육 현장에서 선생과 학생은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의 커다란 보상이 된다. 정서적 만족감이라는 심리적 보상이다. 
― 최수근,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202~204쪽

86
종강 후 Q 선생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아야와 늘 만나던 카페 자이트에서였다. 버스를 타고 맨해튼으로 향하면서 나는 아마 좋지 않은 일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별일 아닐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좋은 소식은 아니다. 만약 기쁜 소식(예를 들면 풀타임 계약서를 쓰자는 등)이었다면 통화할 때 벌써 알려 주었을 것이다. 어려운 말을 하려고 들면 자꾸만 신중해지고 길어지는 법이니까. 그러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그렇지 않을 1퍼센트의 확률에 기대고 싶어졌다. 버스가 터널을 지나 맨해튼으로 들어섰다. 12월 들어 한두 번 흩날리듯 내린 눈이 빌딩 끝마다 크림프로스팅처럼 조금씩 묻어 있었다.


“미안하게 됐어요.”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도 전에 Q 선생이 말했다. 그녀는 캐모마일티를, 나는 아메리카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음료가 나와 각자 들고 빈 테이블로 걸어가며 내가 말했다.


“잘 안됐나 보네요.”


Q 선생은 자리에 앉아 플라스틱 뚜껑에 티백을 꺼내 올려 두었다. 김이 확 올라오면서 그녀의 안경이 뿌옇게 흐려졌다.


“커미티를 통과하지 못했어요.”


그녀는 안경을 벗어 옷 끝으로 닦으며 말했다. 순간 나는 오래전 문예창작과 워크숍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또다시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 지혁 씨는 그게 탈이에요. 이번에 내가 탈이 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문 선생님이 뭐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혹시 오해할까 봐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만…….”


나는 종이컵의 뚜껑을 열었다.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베이지색 크레마가 커피를 얇게 덮고 있었다.


“자세히 얘기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크레마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강사를 채용하는 커미티는 학과장과 보직 교수, 각 외국어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중 한국인은 Q 선생뿐이었다. 역시 영주권 때문이었을까? 영주권이 없는 사람을 뽑게 되면 학과로서는 몇 만 달러의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내 결격 사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박사도 아니고, 강의 경력이 오래된 것도 아니며, 한국어 강사로서의 능력이 증명되었거나 출중한 것도 아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커미티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Q 선생의 입에서 그 이유를 듣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그 자리에 어떻게 적절하지 않은지, 무엇이 부족한지, 아니, 그냥 왜 아닌지.


“오늘은 유난히 커피가 맛있네요.”


나는 마침내 크레마가 사라진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87
처음이자 마지막 학기를 끝으로 나는 한국어 강사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단지 대학만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고용 상태가 유지되지 않으면 합법적인 체류도 계속할 수 없다. 날짜를 따져 보니 계약서에 적혀 있는 계약 종료일은 학교의 가을 학기 공식 종강일이었고, 그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날짜 — 12월 16일 — 였다. 일주일 안에 모든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면 말로만 듣던 불법 체류자가 되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눈을 감고 이 버스가 광화문으로 가는 150번 버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문지혁, 『초급 한국어』,
161~164쪽


어떤 직업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직업을 둘러싼 돈의 흐름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에는 성장이나 보람만이 아니라 직업적 안정성과 금전적 보상도 적절하게 뒤따라야 한다. 
이 점에 있어 한국어 교육 현장의 현실은 형편없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는 수습 기간을 마치면 시급 2만 7000원을 받게 되는데, 현재 선생들은 한 학기에 약 120시간, 1년에 4학기니 한 해 480시간 강의를 하는 셈이다. 계산하면 한 해 연봉이 1300만 원 정도로 2020년 최저임금의 60퍼센트 수준이다. 현재까지 15만 명 정도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워 왔고 등록금이 약 170만 원으로 제법 비싼 편인 점을 생각하면, 돈의 흐름이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경력이 쌓이면 상황이 더 나아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수습 기간이 한참 지나 경력이 10년이 되면 같은 계산식에 따라 한 해 연봉이 1550만 원 정도다. 10년을 버텨도 생활임금은 물론이고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 결국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불가능하다. 정부 주도로 2020년 초에 ‘한류협력위원회’가 출범되고 문체부 내에 ‘한류협력지원과’가 설치되었다는 소식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있다.
나는 현재 한국어 강사 노조의 첫 지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의 첫 작업은 부당하게 강화된 인사평가 기준을 원상 회복하고 강사들의 무기계약직 지위를 확인하여 부당 해고를 막는 것이었다. 나와 노조는 언론 인터뷰와 한글날 기자회견 등을 통해 대외적으로 한국어 교육 현장의 노동 현실을 알린다. 또한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전국의 수많은 한국어 선생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일을 한다. 현재 목표는 단체 교섭을 통해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다. 이 직업을 통해 생계 유지가 가능하도록 고용과 임금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현재 한국어 교육계 최초로 학교 측과 단체교섭을 하고 있는 만큼 모범적인 선례를 남겨야 한다. 이런 작업은 한국어 교육과 함께 다문화 교육에까지도 확장될 것이다.
나는 노조 활동을 하며 한국어 수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상도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때로 충격적이기도, 감동적이기도 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훈련하여 능력을 쌓아 온 사람들이 그에 합당한 인정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할 때, 당당하고 즐겁게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노조 활동의 시작이다. 투쟁은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세상에 알리는 데서 출발한다.
나의 일은 곧 나 자신을 둘러싼 비대칭성을 해소하고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익숙했던 세계를 낯설게 보는 눈을 갖게 했고, 비대칭성을 알아보고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외국인 학생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엿한 일원으로 성장하는 모습, 그리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모든 이가 어엿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는 모습 또한 보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일을 통해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 최수근,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207~209쪽

소설과 인문학의 두 이야기가 이처럼 나란히 포개지다니, 책과 퇴근이 좋은 편집자 님의 귀신같은 편집이네요! 마침내 한 사람은 눈을 감고, 한 사람은 입을 열면서 두 이야기가 끝나는데요. 일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그만두면 그만’이라고 체념하다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는 일은 없다고 암담해하는 저의 매일매일에 겹쳐져요. 두 서사가 각자 완결되어 보이는 만큼 그 무의식을 좀더 파고들고 싶다는 충동이 문득 일어나네요. 

편집을 하다 보면 문장이 자연스럽게 읽히는지, 조사와 접속사의 사용이 의미상 자연스러운지를 곱씹게 되는데요. 단어 하나하나를 파고드는 일을 하다 보니, 조금 멀리서 한국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낯설게 보는 경험에서 나 자신과 일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고, 거기에서 또 새로운 길이 만들어진다는 점도 재미있었고요. 이미 벌어진 문제에서 완전히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암담한데요. 레터를 다시 읽다 보니 이어지는 것이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위로가 되기도 해요.

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문지혁의 네 번째 장편소설 『초급 한국어』는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 자전적 소설이다. 이민 작가를 꿈꾸며 뉴욕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초급 한국어』의 주인공 ‘문지혁’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강사이자 번역가, 소설가인 현실의 문지혁이 떠오른다. 소설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가? 작가에 따르면 모든 소설은 “수정된 자서전”이다. 소설가의 삶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한 결과로 생겨난 소설은 허구인 동시에 그만의 방식으로 진짜다. 문지혁이 보여 주는 또 다른 진실인 『초급 한국어』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한국어를 바라보게 하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의 삶을 한 발짝 거리 둔 채 돌아보도록 한다. ‘초급 한국어’ 수업에서 출발한 9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소설은 100점일 수 없는 인생의 이야기, 모든 게 정답처럼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