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

흔들리는 꽃망울에게 보내는 정여울 작가의 따뜻한 인문학 편지, 정여울의 블루밍 레터입니다. 죽어가는 동안에도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 절절해요. 마음만 먹으면 서로에게서 한없이 멀어질 수 있는 이 세상에서, 편지로 마음이 닿게 된 것은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과 이 편지를 통해 마음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요. 정여울의 블루밍 레터, 마지막 편지입니다. 
 
사진  이승원
일 년에 딱 하루만 날 생각해 줘
세월이 흘러 어느덧 잭이 대학 졸업을 앞둘 무렵, 엄마는 말기 암 선고를 받는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엄마, 아들이 화를 낼까 봐 아들에게도 말을 걸지 못하는 엄마는 마침내 슬픔이 쌓이고 쌓인 채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것이다. 엄마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것을 알면서도, 잭은 빨리 학교로 돌아가 취업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아들의 본심을 눈치챈 엄마는 어서 학교로 돌아가라고 말하면서도 눈에는 슬픔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이 순간이 마지막임을 예감한 것이다. 평소에는 엄마를 생각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 년에 딱 하루, 중국인의 명절인 ‘청명절’에는 엄마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는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오직 아들 걱정뿐이다.
 
누구도 몰랐던 엄마의 어린 시절
피맺힌 슬픔을 안은 채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도, 잭은 오랫동안 슬픔에 무감각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청명절에 문득 엄마가 남긴 편지를 읽게 된다. 1957년 허베이 성 쓰구루에서 태어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편지로 들려주는 엄마. 대기근으로 무려 3000만 명이 사망했던 그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엄마는 어린 시절 자신의 엄마(잭의 할머니)가 몰래 흙을 먹는 모습을 봤을 정도로 비참한 가난 속에 살았다. 
 
딸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를 먹이고 자신은 몰래 흙을 집어먹던 어머니. 잭의 할머니는 신출귀몰한 종이접기 공예 솜씨를 딸에게 물려주었다. 쓰구르는 종이접기 공예로 유명한 곳이었다는 이야기, 정말로 종이새를 접어서 들판의 메뚜기를 몰아내기도 하고, 종이호랑이를 접어서 쥐를 쫓아내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음력설이 되면 빨간 종이로 하나하나 접은 용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전해주며 엄마는 얼마나 간절하게 아들과의 진정한 소통을 꿈꾸었을까.
하지만 가난보다 무서운 것은 문화대혁명이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절. 오직 홍콩에 남동생이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민의 적’이자 ‘스파이’로 몰린 할머니는 우물에 몸을 던지고, 할아버지마저 살해당한다. 문화혁명은 그렇게 아무 죄 없는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갔고, 엄마는 겨우 열 살에 고아가 되고 만다. 살 길을 찾아 무작정 집을 떠난 그녀는 결국 여자애들을 데려다 홍콩에 내다 파는 사람들에게 납치되고 만다. 열 살에 남의 집 가정부로 끌려간 그녀는 조금이라도 행동이 굼뜨면 매를 맞고, 영어를 배우려고 하다가 들켜도 매를 맞았다. 그렇게 6년 동안 노예처럼 일을 하다가 결혼중개업자의 눈에 띄어 ‘신붓감을 전시하는 카탈로그’에 사진을 올리게 된다.

아들이 언제 읽을지 모를 편지를 쓰며, 
엄마는 얼마나 간절하게 아들과의 진정한 소통을 꿈꾸었을까.
 
마침내 내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찾았다는 기쁨
아시아인 아내를 꿈꾸는 미국 남자들의 신부가 되는 것이 그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유언으로 전하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하지만 초라하고 고통스러울지언정 결코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던 엄마는 아들에게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낭만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것이 나의 이야기라고. 
 
아버지와 결혼하여 코네티컷주에서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간 엄마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토록 외로웠던 시절, 다행히 잭이 태어났고, 엄마는 잭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흔적’을 본다. 오래전 돌아가셨던 부모님의 얼굴이 아들 잭의 얼굴에서 보이자, 엄마는 비로소 잃어버린 그 모든 시간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가족도 고향도 친구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는, 아들의 얼굴 속에서 가족의 유전자를 발견하면서 ‘내가 경험한 그 모든 것이 결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침내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찾았다는 기쁨. 아들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치면, 한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작게나마 다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엄마. 아들이 그토록 싫어했던 중국어는 엄마와 잃어버린 고향땅을 연결해 주는 가느다란 실이었고,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종이동물 접기는 잃어버린 가족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찾는 간절한 매개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종이동물을 내팽개치고 스타워즈 장난감을 선택한 잭, 엄마의 중국어와 엄마의 새카만 머리카락과 조그마한 눈을 죽도록 싫어했던 잭은 이제 엄마의 마지막 희망을 빼앗아가버린 것이다.
 

그토록 외로웠던 시절, 다행히 잭이 태어났고, 
엄마는 잭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흔적’을 본다. 
 
너무 아파서 편지조차 쓸 수 없어
하지만 엄마는 그런 아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기쁨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이 함께 나누었던 기쁨. 아직 ‘백인의 문화’에 노출되지 않았던 시절, 엄마를 말갛게 좋아했던 아들이 처음으로 중국어로 말을 걸어주었을 때. 엄마가 접어준 종이동물을 보면서 잭이 까르르 웃었을 때. 세상 모든 걱정이 사라진 것 같았다고. 왜 엄마에게 말을 안 하려고 하냐고. 너무 아파서 더는 편지조차 쓸 수 없다고.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엄마의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그제야 잭은 자신이 엄마에게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주었는지를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난 엄마의 흔적을 이제 어린 시절 내팽개쳐두었던 종이동물들에게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늦었지만 엄마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의 모습은 애달프지만, 내 마음은 아직 어머니가 홀로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아픔’을 짊어진 채 세상을 떠난 그 장면에 머물러 있다. 그는 중국인들이 가장 슬퍼한다는 바로 그 아픔, 어버이께 잘 해드리고 싶지만 이제 잘 해 드릴 어버이가 세상에 계시지 않는 그 아픔의 당사자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처의 봉합이라 마음이 더욱 시리다. 아들에게는 매일매일 어머니의 아픔을 이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마저 있었는데. 엄마가 곧 세상을 떠나실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마지막 몇 시간이 아까워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어쩌면 그렇게 냉혹하게 엄마의 마지막 배웅을 뿌리칠 수 있을까.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엄마의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그제야 잭은 자신이 엄마에게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주었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계속 사랑할 작정이다
아들은 뒤늦게 엄마를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아주 조금이라도 뉘우치고, 새롭게 자기 인생을 시작할 기회가 있지만, 엄마에게는 어떤 기회가 남아 있을까. 엄마는 이미 슬픔과 외로움과 좌절감만을 가득 안고, 저세상으로 떠났는데.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는데. 다행히도 돌아가신 조상을 그리워하는 ‘청명절’이라는 명절과 뒤늦게 도착한 엄마의 편지는 아들에게 화해와 공감의 마지막 기회를 준다. 엄마를 가끔이라도 기억해달라는 그 작은 소원을, 아들은 마침내 들어준 것이다. 「종이 동물원」의 어머니는 아들에겐 사랑받지 못했지만, 우리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뒤늦게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해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을, 이렇게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사람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진정으로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문학은 어쩌면 단 한 번도 ‘이 세상의 무대’위에서 주인공인 적 없었던 사람들을 ‘알고 보면 진정으로 이 각박한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든든한 아틀라스’ 같은 영웅으로 그려낸다. 여성의 인권을 얻기 위해 투쟁한 전사도 아니고, 엄청난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슈퍼맘도 아니지만, 나는 「종이 동물원」의 엄마를 계속 사랑할 작정이다. 잭이 못다 한 사랑까지도, 나는 내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다 주고 싶어진다. 그녀는 미국 사회의 백인 우월주의가 만들어낸 가혹한 희생양에 그치지 않는다. 사랑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온 마음을 다해 마지막까지 오직 ‘완전한 사랑’으로 자신을 표현한 사람의 이야기, 나는 그렇게 이 작품을 기억하고 싶다.
 
 
ⓒ 정여울, 2021.
 끝.
지금까지 블루밍 레터를 구독해 주신 여러분께 깊고 따스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레터에 담지 못한 더욱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올가을의 신간에서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여러분의 ‘안전지대’가 되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 정여울 드림

민음사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6층 
02) 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