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어머, 팀장님, 오늘 너무 멋있으세요!”


가짜 친밀성으로 일터에 진입하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날 한국 여성의 일과 삶을 다룬 책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을 가져왔어요. 일터에서 혹시 업무 외에 마음에도 없는 칭찬, 시키지도 않은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피로를 느낀 적 있나요? 누군가는 일터와 시장을 뒤집을 90년생이 온다고도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사이다썰’보다는 오히려 번아웃에 시달리는 20~30대 여성들이 수두룩한 걸요. “우리는 너무 오래 내 옆에 있는 여성들을 ‘곁눈질’로 봐왔다.”는 표지 문구가 확 와닿는데요.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좀 더 적극적인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고 싶어요.
여성들의 ‘일’ 세계는 대규모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즉 불안하고 불안정한 노동자들을 양산했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2001년 70.9퍼센트에서 2018년 50.7퍼센트로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비율이 매우 높습니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고학력인 20대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이 35.4퍼센트로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안정한 고용 상황에서도 여성들의 능력주의 원칙은 너무나도 강고합니다. 왜냐하면 2018년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73.8퍼센트로 남성의 65.9퍼센트보다 7.9퍼센트나 높았습니다. 교육 성취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앞지르고 있는 것이죠. 게다가 이들은 어릴 때부터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세계에서 학습하고 놀이한 디지털 세대입니다. 콘텐츠를 다루는 능력과 청소년기부터 누적된 문화적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죠. 그래서 디자인, 게임 산업, 문화예술 창작, 저널리즘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 분야에서 기획자, PD, 작가 등으로 활발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대 수준과 현실의 괴리가 크다는 것입니다.

게임 회사를 예로 들어봅시다. 기획 분야에서 여성을 많이 뽑는데, 여성들이 선호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또 잘하죠. 기획, 즉 아이디어를 내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계획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 문화 콘텐츠 산업에서는 아이디어와 참신성, 감각이 특출한 여성들을 ‘기획 분야 계약직 1년’ 하는 식으로 뽑아 갑니다. 이 분야 여성들이 정규직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이를테면 게임 산업에 들어간 여성 노동자는 캐릭터부터 스토리텔링까지 다 기획합니다. 6개월 정도 밤새가며 일해서 뭔가 완성해내면, 다음 단계는 개발이겠죠. 한데 개발 단계에 들어서면 이 여성이 필요할까요? 기획 단계가 마무리되면 기업은 실질적으로 해고 수순에 들어갑니다. 그럼 개발은 누가 하나요? 주로 공대 출신의 정규직 개발자 남성에게 맡깁니다. 프로젝트성으로 고용된 이 여성은 결국 자신이 창출해낸 잉여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해고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여성들은 여러 사업장, 여러 분야를 계속 전전하게 됩니다. 다른 곳에서도 열정적으로 자기 능력을 다 바치곤 하지만, 또 보상받지 못한 채 다른 일터로 옮기길 반복합니다. 일의 공과(功課)로 생산된 대규모 잉여는 정규직 남성에게 돌아가는 반면, 여성의 아이디어나 참신한 문화적 기획력은 쉽게 사용되고 여성 노동자는 폐기 처분되는 시스템인 것이죠. 문제가 매우 심각합니다. 

이렇다 보니 여성들의 횡단적 하향 이동 경향이 높습니다. 이 기업에서 1년, 저 기업에서 1년, 이렇게 일하다 보면 경력이라는 개념이 사라져버리지요.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일수록 전문성을 인정받고 보상 체계 내에서 더 큰 보상과 의사 결정권을 가져야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전에는 여성들이 정규직으로 입사해서 어느 정도 일하다가 모성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갈아타며 경력에서 이탈했다면, 지금은 능력 있는 많은 여성들의 고용 형태 자체가 그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빼내고 폐기 처분하기 용이한 방식입니다. 스타트업들도 여성을 선호합니다. 다만 주로 ‘스타트’ 하는 단계에서만 고용해요. 수많은 여성들이 지속성 없는 분야에서 일하면서도 책임감은 또 얼마나 큰가요!

한편으로 성과주의가 너무 강합니다. 여성들의 능력주의 신화가 견고해지면, 여성이라서 못 할 것이 뭐가 있느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죠. 나아가 자신이 성차별이나 성희롱 등을 당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일로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과로하고 자기 스스로 일에 종속된 삶을 기꺼이 수행하다가 탈진하는 여성들이 늘어납니다. 
이 여성들이 기대는 건 ‘아무리 사회가 지저분하고 여성
차별을 해도 능력은 인정해줄 거야. 내가 능력을 발휘해서 회사에 공헌하면 인정받을 거야.’라는 믿음입니다. 남자들보다 능력주의 신화를 더 믿습니다. 남자들은 선배에게 잘 보이고 팀장에게 잘 보이면 연공서열로 올라갈 거라는 생각을 30, 40대까지는 할 수 있어요. 여성들은 20대 때부터 생존을 위해서 성적, 해외 봉사나 인턴 경력 등 가시적인 성취를 만드는 데 헌신합니다. 새벽 4시까지 기획안 쓰고 알아서 열심히 일하면서 능력이 있는 나를 해고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데, 사실 이는 능력을 얼마큼 발휘하는가와는 크게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나 말고도 똑똑하고 문화적 능력을 갖춘 수많은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 이미 준비되어 있거든요. 회사 입장에서는 굳이 나일 필요가 없는 셈입니다. 

이런 여건에서 횡단적 하향 이동을 자주 하다 보니 직장을 자주 옮깁니다. 그것도 능력을 발휘하느라 너무 지쳐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상태에서 자주 옮기게 되죠. 한편 쉬는 동안에는 여행 다녀오고 새로운 취미나 공부에 도전하고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면서 한층 더 똑똑해져요. 문화적 감각이 더욱 샘솟고 아이디어가 막 떠오릅니다. 그런데 갈 만한 직장이 없으니 많은 수가 프리랜서가 됩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정규직에게만 사수를 붙여주잖아요. 정규직이 아니면 사수가 없고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알아서 기어라, 눈치껏 하라는 메시지에 따라 일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지속적으로 만나는 동료나 선배는 없어지고요. 이런 일터 상황에서 여성들은 ‘쇼잉(showing)’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한 일을 주변 사람에게 알리고, 남성처럼 줄타기도 하면서 ‘나 여기 있다!’라는 것을 외치는 거죠. 

또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 명랑한 척, 활발한 척, 의욕적인 척, 친밀한 척하고, 팀원들의 식사 취향을 챙기는 등 사적인 관계에서만 기대되는 친밀성을 너무 익숙하게 수행합니다. 이는 젊은 여성들에게 기대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고요. 숙련도와 창의력에 더해 활기와 애교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 말입니다. 기업과 사회는 다들 하지 않는 감정노동의 결핍과 공동화를 20대 여성이 메워주길 기대합니다. 이처럼 낯선 환경에서 빠르게 동료들 안으로 들어가야 일을 할 수 있는 이 여성들은 가짜 친밀성(fake intimacy)을 매우 자주 연기합니다. 실제 마음과 달리 이런 대사를 하면서요. “어머, 오늘 우리 팀장님, 너무 멋있으세요.” “오늘 날씨 화창한데, 우리 그럼 또 옥상에서 티파티?”(웃음) 
그런데 여성들의 이런 퍼포먼스가 매우 잘못된 메시지로 읽힙니다. 여성이 처한 이 구조적인 조건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성들이 왜 그런 방식의 친절과 세련됨을 수행하고, 빠른 시간 내에 친밀함을 보여주고, 옷을 예쁘게 입고, 초창기에 명랑하고 빠릿빠릿한 척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 여성들은 노동 시장의 구조와 열악한 노동 조건 때문에 가짜 친밀성, 연출된 친밀성으로 빨리 회사에 진입해서 일하기를 택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수치적 평등에 도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만큼 일터가 여성에게 ‘정의롭지’ 못한 위치를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김현미 지음, 줌마네 기획,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에서



이번 레터를 읽어 내려오자니 몸과 마음이 좀 들먹들먹해요. ‘스타트’ 단계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던 반짝반짝한 여자 친구들, 횡단적 하향 이동을 예감하고 프리랜서로 고군분투 중인 뛰어난 여자 선배들이 떠올라요. 인턴으로 들어간 첫 일터에서 밝고 싹싹한 20대를 (울면서) 연기했던 제 과거도 스쳐 갔고요… 공정이 화두라는 요즘, 여성 노동자가 폐기 처분되지 않고, 약자에게도 정의로운 일터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능력에 대한 과도한 믿음과 확신은 역시 번아웃 증후군으로 가는 지름길인 듯하니 우리 피·땀·눈물이라는 이름은 피해 가도록 해요…!

(울면서) 싹싹하고 밝은 신입처럼 보이기 위해 마음 다잡던 날들, 저도 막 아련하게 떠오르고요.  ”번아웃 없이 오래 일할 수 있을까?” “여성 상사, 동료들과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까?” “소비하지 않아도 즐기고 친해질 수 있을까?” “자기 희생이 아닌 돌봄과 보살핌은 가능할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모든 질문이 마치 요즘 제 마음을 읽은 것 같아 놀라웠어요. 지금 이 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더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서로 통해야, 전 사회적 차원에서의 ‘일상의 재배열’이 점점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요.

최근 청년 여성들, 특히 20대 여성의 자살률 급등과 젊은 여성들의 고용 위기의 심각성, 그리고 그에 대한 침묵이 ‘조용한 학살’이라 일컬을 만하다는 진단이 크게 주목받았다. 한편 고용 통계를 보면, 지난 1월 실업자 수가 사상 최대를 기록한 가운데 전년 대비 여성 실업자의 증가 폭이 남성의 두 배를 기록했고, 여성 구직단념자 역시 사상 최다치를 찍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재난 앞에서 서비스업, 비정규직·시간제 등 불안정한 일자리에 많이 고용되어 있는 여성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이 같은 몇 가지 지표들은 재난의 불평등함뿐 아니라, 심각한 고용 불안정, 돌봄 부담, 사회적 고립감,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20, 30대 젊은 여성들의 현재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변화에 대한 열망은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촉발했고, 미투 운동과 혜화역 시위, 낙태죄 폐지, 탈코르셋 운동 등을 이끌었다. 하지만 최근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강조와 분리주의, 피해를 증명하고 경쟁하는 문화, 또는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 등의 논란과 과제에 부딪힌 상황이다.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은 현재 한국 여성들의 일, 삶, 관계를 둘러싼 복합적인 사회 구조적 조건을 분석하면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선택지들을 찾아가는 책이다. 현재 한국 청년 여성들이 처한 문제와 최근 페미니즘 논의의 한계 양쪽에 대한 분석과 대안을 담고 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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