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춘기,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나이

흔들리는 꽃망울에게 보내는 정여울 작가의 따뜻한 인문학 편지, 정여울의 블루밍 레터입니다. 사춘기가 오면 가족보다 또래가 좋아진다고 하죠. 어쩌면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성장의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멀어지는 동안,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친밀감과 사랑은 그럼 어디로 가는 걸까요? 
 
사진  이승원

조카의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이모만 보면 부리나케 달려와 귀여운 곰인형처럼 품에 쏙 안기던 녀석이, 이제 이모를 봐도 심드렁하다. 누굴 봐도 심드렁하다. 우리 가족들 앞에서는 좀처럼 웃지 않고 휴대폰을 보면서는 키득키득 웃고 잇길래 뭘 하나 슬쩍 봤더니 친구와 카톡 대화 중이다. 무슨 이야기가 그토록 재미있을까. 내 가족이 아닌 사람, 가족과 멀리 있는 사람을 향한 호기심이 폭발하는 시기다. ‘우리들의 귀염둥이 천사’였던 조카가 ‘머나먼 저 세상의 청소년’으로 멀어지는 것이 사춘기의 특징일까. 가족과는 멀어지고 가족 아닌 타인들을 향한 친밀감의 열망이 커지는 것이 사춘기의 본질인가 보다.
 
가족보다 또래의 인정이 중요해지는 시기. 부모님과 외출하기는 귀찮고, 친구들과 놀기는 무조건 좋아지는 그런 시기. 그런데 가족이라는 자신의 뿌리로부터 멀어졌다가도 어른이 되면 가족을 향한 거리와 타인을 향한 거리가 어느 정도 조정이 된다. 가족을 향한 애정과 실망, 타인을 향한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면서, 가족도 타인도 좀 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어른스러워진 마음으로 가족을 아끼는 마음,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켄 리우, 장성주 옮김, 『종이 동물원』
 

가족을 향한 지나친 사랑도, 타인을 향한 지나친 기대도 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어른이 된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만이 해법은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과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가족을 바라보는 더욱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하지만 가족을 계속 멀리하는 상태에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 나아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사랑 자체가 식어버리게 된다.
 
켄 리우의 단편 소설 「종이 동물원」에는 그렇게 한 번 가족에게서 멀어진 뒤 영원히 가족으로는 돌아오지 않기로 작정해버린 소년이 등장한다. ‘나’는 중국어를 하는 엄마와 영어를 하는 아빠 사이에서 자란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나’를 향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똘똘 뭉친 천사의 모습, 그 자체다. 울고 있는 아들을 위해 신출귀몰한 솜씨로 종이를 접어 호랑이를 만들어주는 엄마는 아들에게 무적의 마술사와 같은 존재였다. 언제든 종이접기라는 마술로 아들의 울음을 그치게 해주는 엄마, 엄마의 손끝에서 피어날 기적 같은 종이 동물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아들. 이 얼마나 완벽한 가족의 이상형인가.
 

어린 시절 엄마는 나를 향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똘똘 뭉친 천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엄마의 손끝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에 아들은 언제나 매혹되었다.
이 얼마나 완벽한 가족의 이상형인가.
 

엄마의 종이접기(“저자오저즈”)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엄마가 ‘후’하고 숨을 불어넣으면, 종이는 엄마의 숨을 나누어 받아 팔딱팔딱 뛰기 시작하고, 엄마의 생명을 받아서 움직이고, 소리치고, 뛰어다니는 종이 동물은 아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어준다. 
 
그런데 아이는 커가면서 부모님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빠가 엄마를 카탈로그에서 골랐다는 사실이다. 연애나 소개팅, 중매가 아니라 ‘여성들을 소개하는 카탈로그’에서 엄마를 선택한 아빠라니. 아이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아빠에게 자세한 사정을 듣게 된다. 아빠는 1973년 봄에 결혼 중개 회사에 가입했고, 회사로부터 신부들을 소개하는 카탈로그를 받아 엄마의 사진을 고른 것이었다. 홍콩 출신이고 영어를 잘한다는 ‘카탈로그의 홍보글’에 속아서 엄마를 선택했지만, ‘헬로’와 ‘굿바이’ 말고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엄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사랑했다.
 
엄마가 홍콩 출신도 아니고 영어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아빠는 결혼 중개회사에 쳐들어가서 돈을 돌려달라고 따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에게 돈을 주고 통역을 부탁한다. 사려 깊은 아빠의 차분한 행동 덕분에, 엄마와 아빠는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반쯤은 겁을 먹고, 반쯤은 희망에 찬 눈으로 낯선 남자를 바라보는 그 해맑은 눈빛. 아빠는 엄마의 그 순진함과 사랑스러움에 반했고, 둘은 마침내 결혼하여 코네티컷주에 정착하여 호랑이해에 ‘나’를 낳은 것이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엄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사랑했다.

엄마의 종이접기로 마법처럼 태어난 동물들은 거실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나’의 어린 시절을 빛내 주었다. 염소, 사슴, 물소, 그리고 호랑이. “라오후”라는 이름의 호랑이는 단연코 주인공으로 군림하며 자신보다 약한 동물들을 붙잡으러 다니는 장난을 친다. 라오후에게 짓밟혀 납작해진 종이 동물들에 엄마가 다시 숨을 불어넣으면 죽은 동물들도 다시 살아나 거실 바닥 위를 뛰어다닌다. 
 
엄마가 만들어준 종이 동물만 있으면 심심함도 슬픔도 서러움도 몰랐던 시절. ‘나’와 엄마 사이에는 영어가 없어도 분명히 통하던 따스한 친밀감이 존재했다. 저녁 식탁에 놓인 간장 종지에 뛰어드는 바람에 간장으로 물든 다리를 절게 된 종이 물소에게 엄마는 랩을 씌워 응급처치해 주기도 한다. 살아 있는 참새 떼가 라오후의 귀를 찢어 놓자, 엄마는 테이프로 라오후의 귀를 붙여준다. 엄마가 만들어준 종이 상어로 물놀이를 하다 상어가 물에 젖어 축 늘어지자, 엄마는 은박지로 종이 상어를 만들어 ‘나’를 기쁘게 해준다. 엄마는 ‘나’의 결핍을 마음과 정성으로 해결해 주었다.

엄마는 나의 결핍을 마음과 정성으로 해결해 주었다.
 

이런 천진난만한 아이와 엄마의 놀이 속에서는 영어가 굳이 필요 없다. 엄마의 피부색도 중요하지 않다. 아이가 눈이 작고 찢어졌다는 백인 아이들의 놀림을 받기 전에는, 너희 엄마는 영어도 못하냐는 놀림에 아이가 주눅 들기 전까지는. 엄마가 마법처럼 매일 만들어내는 종이 동물원의 천국에서, 둘은 마냥 행복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성공한 백인 남자와 영어를 못하는 중국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나’, 잭은 ‘백인들의 세계’에 안착하기 위해 엄마와 점점 멀어지게 되어버린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나’는 엄마를 경멸한다. 신부로 팔려 가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상품처럼 카탈로그에 싣다니. 경외감에 차서 엄마를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나’는 사라지고, 이제 ‘카탈로그에 사진을 실어 자신을 상품처럼 판 엄마’를 무시하게 되어버린 잭이 있다. 변함없이 영어를 못하지만 아이를 더욱 사랑하는 엄마는 영문도 모른 채 아들의 경멸을 견디며 괴로워한다.

 

 
 
 
ⓒ 정여울, 2021. 
 
 
 다음 편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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