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를 살리는 것은 기억

 

 

아픔도 사랑도 없는 세상이라면

안녕하세요? 흔들리는 꽃망울에게 보내는 정여울 작가의 따뜻한 인문학 편지, 정여울의 블루밍 레터입니다. 첫 번째 편지는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 의 만남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독특한 SF적 상상력이 질문을 남깁니다. 남과 다른 나로 인해 아파 본 적 있나요? 어떤 차이도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요? 
사진  이승원
 

어린 시절 ‘차별과 차이’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우리나라 나이로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고등학생이 되던 해였다. 어린 시절부터 마포에 살던 나는 ‘강남 아이들은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지 실제로 강남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입학하자마자 기가 죽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풀이 죽어 보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강남 아이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보다 부자임에 분명하고, 옷차림도 뭔가 멋스럽고 세련되며, 부모님이 승용차로 매일 학교에 데려다주는 그런 아이들.
 
또한 학교에는 강남 아이들만 타는 스쿨버스도 있었다. 난 학교가 집에서 가까우니 그냥 일반 시내버스를 타면 되었다. 나에게는 스쿨버스가 필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스쿨버스를 타는 아이들이 괜스레 부러웠다. 날씨가 춥거나 더울 때, 버스가 잘 오지 않는 날에는 더더욱.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밤 11시가 다 되어 들어오는 딸의 귀갓길이 걱정되어 매일 버스정류장에 나를 마중 나오는 엄마가 안쓰러워 보이는 날에는 더더욱.
 
우리집이 ‘부자가 아니다.’라는 감각을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날 괴롭히지 않았는데, 나는 괴로웠다. 세상이 둘로 쪼개져 있다는 생각, ‘강남에 사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로 나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내 머릿속에 지진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 날카로운 구분은 늦게 알수록 좋다. 아이들로 하여금 그런 안타까운 차별의식을 심어주지 않는, 평등한 세상이라면 더더욱 좋다.
 

어느 날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그날 따라 책가방을 늦게 챙긴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학교를 나섰다. 교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영어 선생님이 갑자기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울이구나, 오늘은 늦게 나가네. 스쿨버스 타기엔 늦지 않았니?”
“아니요. 스쿨버스는 원래 안 타요.”
“그래? 그럼 엄마가 데리러 오셨니?”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나가니, 엄마가 차를 가지고 데리러 온 것이로구나 짐작하셨나 보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학교에 날 데리러 오신 적이 없는데. 그럴 필요도 없고, 엄마가 따로 운전하는 승용차도 없었다. 갑자기 뭔가 서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왜 우리가 그냥 일반버스로 통학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하시는 걸까. 일반버스로 통학하는 아이들도 꽤 많았는데. 선생님의 머릿속에는 ‘스쿨버스 타는 아이들’과 ‘부모님이 픽업하러 오는 아이들’밖에는 없는 것일까.
 
외국어고등학교에 다니던 그 암울한 청소년 시기는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묘한 차별’과 ‘명문대에 가야 한다는 압박’으로 얼룩진 괴로운 시간이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을 보면 전교 30등 안에 드는 아이들의 이름이 떡 하니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그 리스트 안에 들어간 사람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도 불행했다. 30등 안에 들어도, 다음 시험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30등 안에 들지 못하면,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매일매일 살얼음판이었다. 아이들에게 이런 ‘차별’과 ‘차이’를 교육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럼 세상 모든 차별과 차이가 없어져버린다면 어떨까? 그것은 진정한 유토피아가 아닐까. 피부색의 차별도 없어지고, 남녀의 차별도 없어지고, 머리색의 차이도 사라지고, 뛰어난 존재에 대한 질투심도 사라지며, 심지어 온 세상이 흑백으로 뒤덮여버리는 세계.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는 그런 세상을 정말로 그려낸다.
 
주인공 조너스는 가장 친한 친구의 머리색도 알지 못한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그들의 눈에는 실제로 세상 전체가 흑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없어진다. 적어도 겉으로는. 국가가 관리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모든 감정들은 엄격하게 통제되기에, 통제되지 않는 감정에 빠져 사회를 교란하는 사람들은 ‘임무 해제’된다. 모두가 섬세한 유전자 조합의 기술로 ‘제조’된 아이들이다. 가족이 존재하긴 하지만, 진정으로 친밀한 공동체라기보다는 아이들을 키우는 일종의 양육기관으로서 의미가 있다.
 
아이들이 열두 살이 되면 인생의 모든 것이 국가의 힘으로 정해진다. 열두 살이 되는 순간 거대한 집합소에 모여 ‘미래의 직업’을 정해주는 집단적 의식이 거행된다. 그때 사람들은 정교하게 분석된 데이터를 통해 이 사람이 무엇에 쓰일 사람인지 결정 당하고, 아무도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에 살면 정말 행복할까. 차별과 차이가 일상이 되어버린 고등학교 생활도 행복하지 않았지만, 차별과 차이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오직 통제만이 존재하는 이런 세상도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다. 
 

로이스 로리, 장은수 옮김, 

『기억 전달자』 (비룡소, 2007)

 

조너스는 열두 살이 되는 순간 이 마을에서 딱 한 명만 선정되는 자리, 즉 ‘기억 보유자’(the Recieiver)의 역할을 배정받게 된다. 기억 보유자는 매우 특수한 자리다. 이 공동체에서는 누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기억 보유자만은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할 권리를 지닌다. 그에게는 모든 생계의 압박이 면제되며, 그는 오직 기존의 ‘기억 전달자’(the Giver)로부터 인류의 잃어버린 기억을 전달받는 역할만을 잘 해내면 된다.
 
그렇게 전수받은 인류의 기억은, 공동체가 위기에 빠질 때를 대비한 것이다. 기억 전달자는 일종의 살아 있는 타임캡슐이었던 것이다. 오직 기억 보유자만이 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세계 이전의 ‘원시적인’ 시대에 대한 기억을 보유할 수 있다. 색깔도 음악도 예술도 사랑도 전쟁도 갈등도 특별함도 열등함도 몰랐던 조너스는 과거의 기억 전달자로부터 그 모든 인류의 유산을 전달받으며 미칠 듯한 괴로움에 사로잡힌다. 인류가 이토록 복잡하고, 고통스러우며, 무시무시하게 창조적인가하면, 끔찍하게 사악한 존재였다니. 조너스는 전쟁과 살육의 기억을 전달받고 고통스러워하며, 문화와 예술의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배우자를 결정할 때도 당국의 심사를 받아 적절한 사람을 선택 당해야 하고, 직업은 물론 사는 곳까지 늘 통제 당하며, 스피커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은 거의 24시간 내내 지시를 받고 감시를 당한다. 세 번 이상 명령을 따르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면, ‘임무 해제’를 당하여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임무 해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눈앞에서 사라져 다른 곳에 격리되는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임무 해제가 된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공동체의 이상은 ‘늘 같은 상태(Sameness)’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차별이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차이’ 자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획일적인 세상은 얼마나 무서운 감시와 통제 속에서 유지되는 것인지. 
 

필립 노이스 감독, 영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The Giver)」 (2014)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모험이 없어 위험도 없는 세상은 과연 편안하고 즐거운 삶일까. 마을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조너스는 점점 이 조작된 세계의 기이한 불평등을 이해하게 된다. 이 마을을 ‘이런 모습으로 만든 사람들’은 인류에 대한 통제의 기술을 알고 있지만, 그런 시스템 안에 갇혀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통제를 당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폭력도 없고 가난도 없고 편견도 불의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소름끼치고 부자연스러우며 어떤 자유도 없는 세계. 심지어 밤에 꾸는 꿈을 검열 당하고, 머릿속에서 남몰래 하는 온갖 잡생각까지도 검열 당하는 사회. 이를 결코 진정한 유토피아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조너스는 결국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임무 해제’는 단순한 격리가 아니라 ‘사형’이라는 것을. 조너스는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힌다. 조너스의 가족에게 입양된 갓난아기 가브리엘이 ‘너무 많이 울어 댄다’는 이유로 ‘임무 해제’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너스의 아버지가 그 임무 해제 결정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아이가 울어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어른들, 아이가 이렇게 심하게 우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어른들,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어른들, 우는 아이와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어른들. 그런 어른들 속에서 오직 조너스만이 ‘이 아이를 살려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임무해제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도 조너스 뿐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갓난아기를 너무 많이 운다는 이유로 사형시키려 하는 ‘윗분들’의 결정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조너스는 마침내 아기를 데리고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감시와 통제가 없는 대신, 아무도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야생의 세계 속으로 모험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누구도 체험해본 적 없는 모험의 세계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조너스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생길까.
 
(다음 편지로 이어집니다.)
 
ⓒ 정여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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