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바다에서 제일 센 동물


신간 『인공지능과 흙』 읽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해마라는 동물을 아시나요? 해마는 바다에도, 우리 머릿속에도, 그리고 신화에도 있습니다. 3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 『인공지능과 흙』은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과 연결되어 있는지 주목합니다. 상반신은 말이고 하반신은 돌고래인 상상 속 동물로 여겨졌던 해마. 옛 이탈리아 사람의 해마 생각이 지금의 과학과 어떻게 닿아 있을지, 상상해 봐요!

뇌 속에는 우리의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가 있다. ‘해마’란 이름은 1564년 볼로냐 출신의 베네치아 해부학자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란티우스(1529~1589)에 의해 붙여졌다. 그는 뇌를 해부한 후에 측두엽에 붙어 있는 주름 잡힌 부위를 발견한다. 무엇이라 명명할지 한동안 망설였던 그는 처음에는 누에라고 했지만 맘에 들지 않았다. 그때 근사한 이름 ‘히포캄푸스(hippocampus)’가 떠올랐다. 신화 속에서 ‘히포캄푸스’는 앞다리 포함한 상반신은 말이고 하반신은 돌고래의 꼬리지느러미가 돋아 있었다. 그 뒤 뇌의 이 부위는 모든 이들에게 해마(seahorse)라 불리게 된다. 
약 100여 년이 지난 1671년에 해부학사에서 뇌의 또 다른 부위(calcar avis)를 지칭하는 용어로 ‘히포캄푸스’가 다시 한 번 쓰인 적이 있다. 이렇듯 르네상스 말기와 바로크 시대에 신화적 동물인 ‘히포캄푸스’가 인기를 끌었다. 14세기 중반 흑사병이 창궐한 이후 이탈리아 도시들은 전염병 예방과 공중보건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특히 대학들은 의학 교육 수준을 상당히 높였는데 볼로냐대학교와 파도바대학교에서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 특히 볼로냐대 의학생들은 약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 1세기 라틴어 백과사전인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및 그리스어 문헌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후계자인 테오프라스토스(기원전 372-287)와 약초를 분석한 디오스코리데스(1세기)의 저작들을 연구했다.  

또한 볼로냐대는 해부학 교육을 정식으로 도입볼로냐대는 해부학 교육을 정식으로 도입하여 갈레노스(129년경~201년경)의 작품을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윽고 볼로냐대 해부학과에서 최초 교수가 된 리우치의 몬디노(1270년경-1326)가 『해부학』(1316)이라는 교재를 저술하였으며, 이 책은 두 세기에 걸쳐 해부학 필독서로 전해졌다. 의학 교육 수준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뒤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도 750점을 비롯하여 해부학과 관련된 드로잉, 회화, 조각 작품이 다수 발표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아란티우스는 파도바대학교에 입학하여 볼로냐대 교수가 될 때까지 르네상스식 의학 교육을 받았다. 그가 활동한 베네치아는 이미 1316년부터 의과 전문대학을 설립했으며,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디나자레스섬(지금의 산세르볼로섬)에 최초의 격리 병원을 신설했을(1423년) 정도였다. 의학 이론과 실천을 겸비했던 아란티우스는 당시 파도바대 교수로 해부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가 죽던 해에 특정 부위에 ‘해마’란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히포캄푸스’는 그리스어로 ‘말’을 뜻하는 ‘히포(hippo)’와 ‘바다-괴물’이란 뜻의 ‘캄포스(kampos)’가 합쳐진 이름이다. 이런 신화적 모습은 트레비분수에 있는 조각상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조각상은 바로크 시대인 1732년 니콜라 살비(1697-1751)가 설계한 것으로 두 마리의 해마를 포세이돈의 조가비마차로 끌고가는 트리톤을 재현하고 있다. 
우선 이 조각상들이 설치된 트레비분수를 보면 높이가 25.9미터, 너비는 19.8미터로 로마에서 가장 큰 규모다. 3을 뜻하는 ‘트레(스)’와 ‘길’을 뜻하는 ‘비(아)’의 조합으로 우리말로는 ‘삼거리분수’ 정도 되는데, 세 방향에서 나온 수도관이 여기서 교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조각된 두 마리의 해마들 중에 한 마리는 거칠고 다른 한 마리는 유순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담수와 해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수가 광대한 지하수에 스며들되 소금 성분이 사라져 누구나 목을 축일 수 있는 물이 되길 염원한 것이라고 한다. 물 사정이 좋지 않은 로마는 해마 조각상을 통해 신선한 물의 공급을 소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트리톤 조각상은 소라고둥을 불면서 히포캄푸스를 끌고 가고 있다. 트리톤은 포세이돈의 아들로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물고기다. 한마디로 그는 인어왕자다. 예술 작품에서 트리톤이 소라고둥을 든 모습은 물고기와 돌고래 등과 어울려 놀 때이거나 성난 파도를 잠재울 때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윗세대인 거인족 기간테스와 전쟁할 때 트리톤은 제우스를 도와 소라고둥을 크게 불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전한다. 
트레비분수에 표현된 트리톤의 고둥나팔과 해마 두 마리의 질주 속에서 휘몰아치던 파도와 세대 간의 갈등이 모두 가라앉고 바닷물도 신선한 생수로 변하는 상상이 가능했다. 

트레비분수

그 밖에도 해마는 포세이돈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해마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한 신은 포세이돈이다. 제우스와 하데스, 포세이돈 삼형제는 권력을 배분하되 세계를 세 영역으로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바다를 관할하게 된 포세이돈은 해마를 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스트라보의 『지리학』에 보면 헬리콘산에 지진이 발생하여 도시가 물에 잠겼을 때 포세이돈이 해마를 타고 나타나 어부의 그물을 잡아 구원했다. 그 후 ‘포세이돈의 해마’가 목욕탕 모자이크 장식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 홍수 같은 자연재해에서 포세이돈이 해마를 통해 인간을 구원한다는 민간 신앙이 생긴 것이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뒤에도 그리스의 신들 대부분은 여전히 계승되었다. 포세이돈도 넵투누스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긴 턱수염에 삼지창을 들었으며 역시 바닷속 궁전에 살면서 해마를 타고 다닌다. 로마의 시인들도 넵투누스와 함께 히포캄푸스를 자주 등장시킨다.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도 “그가 달리기만 하면, 성난 파도도 뒤집힌 바다도 조용해지네, 승리만 있을 뿐이네.”라고 말하며 넵투누스가 해마를 탄 장면을 묘사한다. 나중에는 트레비분수 조각상에서 볼 수 있듯이 해마에 날개까지 달린다. 신화상의 해마는 수륙양용인 데다 여기선 하늘 위나 바닷속까지도 갈 수 있다. 지구의 거의 전 영역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 

월터 크레인(1845-1915)은 「넵투누스의 말들(Neptune’s Horses)」을 여러 번 그렸다. 그리스에 있었던 ‘포세이돈의 해마’에 대한 라틴 버전인 셈이다. 또는 포세이돈의 별칭 ‘포세이돈 히피오스(Poseidon Hippios)’, 즉 ‘말의 신 포세이돈’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말들은 하반신이 잘 나타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꼬리지느러미와 앞발로 파도를 타는 해마의 모습에 가깝다. 
그의 여러 작품 중 특히 1893년경 작품은 눈을 희미하게 뜨거나 멀리서 보면 말들이 파도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보인다. 그 파도를 집중하고 힘주어 볼 때에야 점점 또렷해지면서 말들의 형태가 들어온다. 이 그림의 해마와 포세이돈의 모습은 너무 흐릿하다. 파도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크레인은 밀려오는 파도를 볼 때마다 그 속에서 포세이돈과 해마가 역동적으로 질주하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때 파도 소리는 말발굽 소리와 수많은 말들의 히잉거리는 고함이었으리라. 

월터 크레인, 「넵투누스의 말들」(1893년경)
해부학자 아란티우스가 뇌의 특정 부위를 ‘해마’라고 이름붙인 이유는 아마도 이런 상상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7세에 시작하여 60세에 죽을 때까지 43년간 해부학을 놓지 못했던 그는 더 많이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며 더 많이 질주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은 ‘히포캄푸스’라고 할 때 54종을 포함하는 실고기목의 해마속을 가리키거나 기억을 연구하는 뇌과학의 단골 용어로 언급되지만, 적어도 해부학자 아란티우스가 이름을 붙일 당시는 상상의 동물을 더 많이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신화적 모습의 해마는 르네상스 이후 해상 활동과 관련된 지역, 특히 베네치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 해마 그림은 기원전 4000년으로 추정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동굴벽화다. 또한 크레타섬에서 기원전 1000년경의 돌 인장에도 실제 해마상 부조가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청동기 크레타 시대에 해마가 지중해 연안에 살고 있었으며 가끔 해변으로 밀려나온 것들이 발견되면서 신화적 동물로 상상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후 페니키아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석관에 나타난 해마는 상상적 요소가 많았다.

“바로크는 어떤 본질이라기보다는 작동 기능이며, 그 행위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주름들을 만들어낸다. (……) 그것은 주름들을 구부리고 또 구부려서, 주름 위에 주름을, 주름을 따라 주름을, 그것들을 끝없이 전진시킨다. 바로크의 특징, 그것은 무한을 향하는 주름이다.”
━ 질 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아란티우스가 죽은 이후에 바로크 시대가 열린다. 바로크 명칭은 ‘페롤라 바로카(perola barroca)’, 즉 ‘찌그러진 진주’에서 왔는데, 강조되는 것은 ‘진주’라기보다 ‘찌그러진(barroca)’ ‘주름’이었다. 아란티우스는 그 ‘주름’을 먼저 보았던 것이다. 아란티우스는 해부학을 통해 신체의 특징을 주름으로 파악한다. 일평생 해부를 통해 신체 장기들이 주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낀 그는 수없이 지켜봤던 주검들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신체가 주름으로 구성되어 접혔다 펼쳐지기 때문에 한없이 귀하다는 상상에 이르게 된다. 특히 뇌의 굴곡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면서, 바닷속 미물에 불과한 해마라도 거칠고 험한 파도를 즐길 줄 알고 해수를 생수로 바꾸며, 하늘 땅 바다 할 것 없이 맘대로 내달릴 수 있다는 고대인들의 상상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주름으로 인해 훨씬 더 크고 강하고 고귀하게 되는 ‘히포캄푸스’를 떠올렸다. 규범과 균형, 조화를 강조하는 르네상스식 교육 현장에서 ‘히포캄푸스’라는 신화적 상상은 아란티우스에게 바로크 시대를 먼저 살게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날개 달린 해마는 1933년에 설립된 이래 ‘에어프랑스’의 로고로 사용되었고, 2019년 2월에 발견된 해왕성의 위성은 또다시 ‘히포캄푸스’라 명명되었다. 
말을 해마라 한들 틀린 것일까? 지느러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아이에게 생선의 날개라 대답한들 틀린 것일까? 측두엽의 ‘S라인’은 바닷속 해마의 접히고 펼쳐지는 껍질이 아니라 원시부터 미래까지, 한 알의 모래알에서 우주까지 ‘주름’ 잡는 ‘히포캄푸스’였다. 정작 우리가 기억해둘 것은, 자연재해와 인간의 갈등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생수를 뿜어내는 것이 ‘주름’이라는 사실이다. 
신체의 한 주름에 ‘해마’라 이름 붙인 어떤 의사의 꿈은 권태롭고 힘겨웠을 매일의 노동을 넘어 영원에까지 펼쳐지는 값진 진주가 되었다. 그 상상의 일부는 또 하나의 발견을 위한 토대가 되어 지금의 뇌과학을 있게 했다. 그동안 잃어버린 우리의 해마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히포캄푸스를 찾기 위해 과감한 상상을 펼쳐 보자!



─ 김동훈, 『인공지능과 흙』 중에서


아아…… 해마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니. 서울 잠실에서도 만날 수 있는 트레비분수에 이런 신화가 반영되어 있었네요. “트리톤의 고둥나팔과 해마 두 마리의 질주 속에서 휘몰아치던 파도와 세대 간의 갈등이 모두 가라앉고 바닷물도 신선한 생수로 변하는 상상”이라니 문득 자유를 느껴요. 어릴 적 수족관에서 본 해마는 아주 작고 투명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장쾌한 물보라 속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해마의 주름이라는 선명한 심상과 함께라면 철학의 괴수에게도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해마를 실제로 본 적 있나요? 옛날 사람들은 해마를 용의 새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는데, 생김새를 보면 저도 그렇게 믿을 것 같아요. 해마의 번식 방법 역시 어린 시절 어린이를 위한 과학 도서에서 읽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암컷이 수컷의 몸에 알을 낳으면 수컷이 자신의 몸에서 새끼를 부화시키는, 매우 기묘해 보이는 역할 분담은 ‘자연스럽다.’라는 느낌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어요. 역시 상상의 동물이라 불릴 만합니다. 세상의 신기한 동물, 혹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동물의 신비함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사진들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빠져들게 되네요.

현대는 지나칠 정도로 물질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은 물질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만큼 다른 한편에 정신의 영역을 떼어다 놓고 그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돈에 집착하면서도 안 그런 척하며 교양과 정신의 각종 잡다한 보상재로 위선을 떠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괴상한 분열의 모습을 보인 환자로, 인문학이 지목되곤 했다.
―김동훈, 『인공지능과 흙』에서
21세기 AI 시대 인문학의 최신 경향은 물질과 감각에 주목한다. 좁게는 환경인문학, 사물인문학 등으로 시작되었으나,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면서 폭넓게 ‘물질인문학’으로 확대되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문학이 물질과 감각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르네상스인들은 흑사병과 전쟁으로 처참하게 무너진 현실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그들은 그리스·로마로부터 상상력의 보화를 캐내어 현실에 적합한 대안을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그 밑바탕에는 ‘몸’에 대한 강조가 돋보인다. 몸에 대한 관심은 이후 인간을 ‘물질’과 관련시키는 길을 열었다. 물질까지 끌어안는 인문학은, 특히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불안하고 지친 우리 삶에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힘을 공급해 줄 것이다.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신화적 상상이 인공지능과 같은 현실의 물질로 어떻게 변신해 가는지를 추적해 보자.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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