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호랑이의 사랑

 

새로 사귄 여자친구가 알고 보니 호랑이었다?!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2021년 새해에는 ‘동물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보내드립니다. 「김현감호」 기억나시나요?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킨 이야기’는 한국 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 이야기라고 할 만한 텍스트죠.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을 적부터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이를 선사했던 동물인 호랑이가 옛이야기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함께 볼까요!

신라의 풍속에 매년 이월이면 여드레부터 보름날까지 서울의 남녀가 너도나도 흥륜사(興輪寺)에서 탑돌이를 하며 복을 빌곤 했다. 
 
원성왕(元聖王) 때 김현(金現)이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밤이 깊도록 쉬지 않고 혼자서 탑을 돌았다. 어떤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뒤따라 탑을 돌다가 마음이 맞아 눈길을 주고받다가 돌기를 마치고는 외딴곳으로 데려가서 정을 통했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갔다. 처녀가 거절했지만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서산(西山) 기슭에 이르자 처녀는 한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웬 노파가 처녀에게 물었다.
 
“데리고 온 사람은 누구냐?”
 
처녀가 사실대로 말하자 노파가 말했다.
 
“좋은 일이지만 차라리 없었던 것만 못하다. 그렇지만 이미 이루어진 일은 따질 수 없구나. 우선 은밀한 곳에 숨겨라.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렵구나.”
 
처녀는 김현을 데려가 마루 밑에 숨겼다. 잠시 후 범 세 마리가 울부짖으며 오더니 사람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서 비린내가 나는구나. 요깃거리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노파와 처녀가 꾸짖었다.
 
“너희들 코가 잘못되었구나.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많은 생명을 해쳤으니 한 놈을 죽여 악행을 징계하리라.”
 
범 세 마리는 이 소리를 듣고 모두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처녀가 말했다.
 
“세 오라버니가 멀리 도망해 반성한다면 제가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그러자 범 세 마리는 기뻐서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붙인 채 달아났다.
 

처녀가 김현에게 말했다.
 
“저는 처음에 당신이 우리 가족을 만날까 봐 부끄러워 오지 말라고 거절했습니다. 지금은 숨길 수 없으니 품은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 당신은 이류(異類)이지만 하룻밤의 기쁨을 누리고 부부의 의리를 맺었습니다. 세 오라버니의 악행을 하늘이 미워하니, 온 집안의 재앙을 제가 대신 당하고자 합니다. 모르는 사람의 손에 죽느니 당신의 칼에 죽어 당신의 덕에 보답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내일 저자에 들어가 사람들을 해칠 텐데, 도성 사람들은 저를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께서 필시 높은 벼슬을 걸고 저를 잡을 사람을 모집할 것입니다. 당신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도성 북쪽 숲으로 오십시오.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이 말했다.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것이 인륜의 도리이니, 이류와의 사귐은 상도(常道)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가까이 지냈으니 참으로 천행(天幸)이라 할 것입니다. 어찌 배필의 죽음을 팔아 속세의 벼슬을 바라겠습니까?”
 
처녀가 말했다.
 
“당신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죽는 것은 천명이자 제 소원이기도 합니다. 당신에게는 경사이고 제 가족에게는 복이며 도성 사람들에게는 기쁜 일입니다. 한번 죽으면 다섯 가지 이익을 얻으니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해 절을 짓고 불도(佛道)를 강론해 좋은 업보를 얻게 해 주신다면 당신의 은혜는 더없이 클 것입니다.”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이튿날 과연 사나운 범이 도성에 들어왔는데 몹시 잽싸서 막을 수가 없었다. 원성왕이 듣고서 명령을 내렸다.
 
“범을 잡는 자에게는 이급의 벼슬을 주겠다.”
 
김현이 대궐에 가서 아뢰었다.
 
“소신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먼저 벼슬을 주어 격려했다. 김현은 짧은 칼을 지니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범이 처녀로 변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젯밤 당신과 나의 다정했던 일을 당신은 잊지 마십시오. 오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절의 나발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다름 아닌 범이었다. 김현이 숲을 나와서 “이 범을 쉽게 잡았다.” 하고, 그 사연은 발설하지 않고 숨겼다. 범이 가르쳐 준 대로 치료하니 다친 사람이 모두 나았다. 지금 풍속에도 이 방법을 쓴다.
 
김현은 벼슬에 올라 서천(西川) 옆에 절을 짓고 호원사(虎願寺)라 하였다. 항상 『범망경(梵網經)』을 강론해 범을 저승으로 인도하고, 자신을 죽여 남을 살린 은혜를 보답했다. 김현이 임종을 앞두고 기이한 지난 일에 깊이 감동해 글을 지어 전했기에 세상 사람들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글을 「논호림(論虎林)」이라 했는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 「김현과 범 처녀의 사랑(金現感虎)」
일연 『삼국유사』 중에서
 
 

처녀로 변신한 범은 김현과 초파일 탑돌이에서 만나자마자 정을 통했다. 삼국 시대의 자유분방한 남녀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하룻밤의 우연한 만남으로 맺어진 관계였지만 두 사람은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한쪽은 인간, 한쪽은 동물이라는 사실도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지 못했다. 김현은 상도를 벗어난 이류와의 사랑을 천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현실은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았다. 범 처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 말한다.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헤어진 이유는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둘의 사랑은 범 처녀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다.
이 설화를 신분이 다른 남녀의 만남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신분의 격차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이 인간과 범의 사랑이라는 설화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역사 기록의 담담한 서술 방식으로 쓰였지만, 이 글에 묘사된 연인의 사랑은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 강렬하다.
─ 이종묵, 장유승 옮김, 『한국 산문선』 1권 중에서

‘동물’ 호의 첫 레터로 익숙한 호랑이 이야기를 만나 반가우면서도 호랑이 처녀의 죽음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아요. 두 사람의 용기와 사랑이 다시 봐도 대단하고, “이미 이루어진 일은 따질 수 없다”라며 선뜻 김현을 집에 들인 노파가 새삼 눈에 들어오네요.   

호랑이 처녀의 마지막 말이 슬퍼요. “어젯밤 당신과 나의 다정했던 일을 당신은 잊지 마십시오.” 아마도 잊을 것 같아서 한 말 같아요. 모습을 바꾸고 인간과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미래를 예언하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란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신과 같은 것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우리가 지금 읽는 대부분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참조하고 있는데요. 인간과 신과 동물이 서로 모습을 바꾸며 관계했던 시대와 우리 사는 지금 이때를 연결하는 경험도 새롭겠습니다.

볼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인데, 오늘은 마지막 부분의 ‘흥륜사 간장’ 비법이 눈에 들어오네요. 옛날 국어 시간에 배운 것처럼 해석해 보면, 신라 사람 김현에게 앞날을 양보하고 역사에서 퇴장한 ‘호랑이 토템 세력’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상상하게 돼요. 당시 사람들은 국난 앞에서 일연 스님이 엮은 『삼국유사』를 읽고 기분이 어땠으려나요? 인간이 동물에게 무슨 바람과 욕망을 의탁하는지는 독자 여러분을 곧 찾아갈 《한편》 4호와 함께 내내 생각할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고전 명문을 총망라한 『한국 산문선』(전 9권)의 첫째 권. 우리 고전의 부흥을 이끌고 있는 안대회, 이종묵, 정민, 이현일, 이홍식, 장유승 등 6인의 한문학자가 삼국 시대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문 산문 중 사유의 깊이와 폭이 드러나는 작품을 선별·번역한 역작이다. 1300년의 시간을 넘어 찬란히 빛나는 우리 옛글은 한 시대의 풍경과 사유를 그대로 펼쳐 보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 자산이 되어 준다.
1권은 신라에서 고려까지 우리나라 문학사가 전개되기 시작한 시기의 산문 80편을 수록했다. 최초로 본격적인 한문 문장을 남긴 원효와 우리 문장의 비조 설총·최치원의 글이 첫머리에 온다. 고려의 문장은 김부식·이규보로부터 화려한 문운이 전개되며, 세계 제국 원(元)의 통제기에는 최해·이제현·이색이 동인(東人)에 대한 자각을 보여 준다. 더불어 일연으로 이어지는 높은 수준의 불교 문자와 새로 유입된 성리학이 이룬 성황을 볼 수 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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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소현
    2021.1.13 5:19 오후

    비공개 댓글

    1. 막스
      2021.1.14 10:28 오전

      옛날 국어 수업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 3

  2. 파랑
    2021.1.6 10:40 오전

    매주 수요일을 기다리게 하는 한편의 편지! 「김현감호」가 동물편 첫 번째 편지라니, 반갑네요. 예전에 읽었을 때는 마냥 슬퍼했던 기억인데, 지금 다시 읽으니 새로워요. 한쪽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다니 대단하기도 하면서, 신분의 격차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에 대입하면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 특히 인간에게 ‘맹수’로 여겨지는 동물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1. 막스
      2021.1.6 12:03 오후

      파랑 님, 저는 이번에 다시 읽으니까 죽기 직전에 “기이한 지난 일”을 떠올리고 “깊이 감동”한 김현의 마음도 헤아리게 되더라구요. 「김현감호」와 새 서체인 ‘태-물감체’가 진정 어울리지 않나요 ㅠㅠ 말씀하신 맹수와 인간의 관계에 관해서는 《한편》 4호의 「옛사람의 호랑이 생각」에서도 고찰하고 있으니 함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첫 댓글을 남겨주셨으니 복 받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