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판타지 어린이문학의 특별함

 

 

어린이문학은 성인문학과 어떻게 다를까?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오늘은 《한편》 3호 ‘환상’에서 어려운 시대를 어린이문학과 함께 살아남는 법을 제안하는 김유진 선생님의 글 「판타지와 함께 살아남기」를 공개합니다. 어린이라는 작은 사람이 경험하는 세계는 어른이 경험하는 세계와 무엇이 같고 다를까요? 어린이 독자를 향하는 문학의 특별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전 세계가 신종 바이러스와 싸우는 유례없는 날들이다. 지구 어디든 오가던 통행의 자유는 사라지고, 모두 집에 틀어박혀 바이러스 감염자의 숫자가 줄기를 기다리고 있다. 바이러스를 둘러싼 반응들은 더욱 공포스럽다. 끊임없이 불거지는 혐오와 차별, 이기심과 무지는 인류에 대한 절망감을 깊이 새겨 놓는다.
현실은 늘 서사를 능가하고 비웃으며 저 멀리 앞서 달려간다. 예전의 서사 감각으로 현실을 재현하는 일이 결코 현실 그 자체만 못하는 때라면, 판타지 문학으로 눈을 돌려 고민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을 넘나드는 환상으로 축조된 판타지 문학은, 상상을 초월하고 미래를 비웃듯 배반하는 현실에서 앞으로 서사가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어린이문학에서 환상은 주요한 주제다. 18세기 후반 독일 낭만주의 시대에 탄생한 어린이문학은 환상성과 가까운 장르로, 환상성을 장르의 주요 특징으로 발전시키며 성장했다. “환상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법칙을 알고 있는 한 존재가 겉보기에 초자연적인 사건에 직면하여 경험하는 망설임”에 핵심이 있다고 할 때, 어린이가 머뭇거리며 경험하는 미지의 세계는 어른의 경우보다 훨씬 다양하고, 거대하며, 때로 공포스럽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판타지 어린이문학의 대표작들에 나타난 초자연적 세계를 소인(小人), 초인, 모험이라는 세 가지 모티브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이어 판타지 어린이문학과 함께하는 시간이 오늘날 살아가는 데 어떤 의미일지 작은 생각거리를 찾아보려 한다.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의 원작인 메리 노튼의 『마루 밑 바로우어즈』(1952)는 여러 권의 후속편으로 이어진 가장 유명한 소인 이야기책이다. 소인은 어른보다 몸도 권력도 작은 어린이가 동일시하기에 적절한 존재다. 소인 ‘바로우어즈(The Borrowers)’는 인간의 물건을 몰래 가져다 쓰며 생활을 꾸린다. 작품은 소인의 시선을 통해 인간 현실을 비판하는데, 메리 노튼은 책 머리말에서 창작 계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제가 다시 그 작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 건 1940년 전쟁 직전이었지요. 그 무렵에는 험난하고 비극적인 일로 내가 어린 시절 꾸며낸 그 작은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겨났지요. 우리 모두 그 작은 사람들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도요.”
『마루 밑 바로우어즈』에서 주인공 아리에티의 엄마 호밀리는 인간에게 들킬 위험을 알고도 남편에게 마루 위로 나가 생필품을 가져오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저택 바깥 생활을 두려워한다. 이는 여성 인물을 그리는 당시 성 인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생계를 불안해하고 안정을 갈망하는 당대 현실을 반영한다.
『워터십 다운』 역시 어린이가 동일시하기 쉬운 토끼라는 초식 동물을 주인공 삼아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는 인간을 비판한다. 토끼들이 서식지인 샌들포드 마을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택지로 개발됐기 때문이고 탈출한 몇 외에는 몰살당한다.
“동물은 인간과 달라. 물론 싸워야 할 때는 싸우고 죽여야 할 때는 죽이지.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굴려 가며 다른 동물의 삶을 망치고 상처를 주진 않아. 동물은 존엄성과 동물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야.”
『워터십 다운』은 다양한 캐릭터의 토끼들이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서로 존중하며 새 터전을 건설하는 과정을 그린다. 통찰력, 권위, 명민함, 용기, 재치 등 각자 다른 역량과 성향을 지닌 토끼들이 협력하는 모습은 공동체 속 존재인 인간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조우하는 상자 속에서 사육되는 토끼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자유를 통제하는 토끼 군집 등은 인간 사회의 다양한 제도를 암시한다.
토끼들 중 독보적인 존재는 민주적인 리더 헤이즐도, 전사 빅윅도 아닌 예언자 파이버다. 예지와 통찰력으로 매번 위험한 상황을 감지해 안전한 길을 찾으며 워터십 다운에 새 마을을 만들 수 있었다. 위험을 모른 채 눈앞의 풍요에만 심취한 다른 토끼들에게 “가야 해. 저 언덕 지대에 닿을 때까지.”라는 파이버의 외침은 판타지 문학이 환상을 통해 구축하고 지향하는 이상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이문학에서는 어른의 억압을 환상으로 돌파하는 어린이 주인공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1945년 출간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삐삐는 어른의 간섭을 받지 않고 홀로 제 돈과 괴력으로 살아가는 천방지축 말괄량이다. 이 캐릭터의 진가는 그가 ‘진정한 초인’이라는 데 있다. 즉 삐삐는 “본디 주인으로도 노예로도 살아가기를 거부하며, 자기 자신의 가치체계를 따르고, 자신의 힘을 주로 좋은 일에 사용하는, 다스릴 수 없는 충동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로알드 달의 『마틸다』(1988)에 이르면 어른의 학대와 방임에 적극 대항하는 어린이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마틸다는 뛰어난 지력으로 자신을 ‘이마에 난 부스럼 딱지보다 못하게 여기며’ 학대하고 방임하는 부모에게 크고 작은 복수를 벌인다. 이러한 행위가 가정을 넘어 학교로 나아가면서 개인적 복수 이상의 의미를 띤다. 학생들을 학대하는 트런치불 교장에게 대항하는 순간, 이는 마틸다 개인이 아닌 어린이 모두의 일이 된다. 마틸다는 염력으로 물건을 움직여서 교장의 악행을 밝히고, 어린 시절 법적 보호자였던 교장에게 학대당하고 아버지의 유산까지 뺏긴 하니 선생님의 권리를 되찾아 준다. 어린이가 나쁜 어른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고 대항하는 데서 나아가 다른 어린이들, 그리고 과거에 학대당한 어린이의 고통과 억울함까지 해소해 주는 것이다.
마틸다가 친부모를 떠나 하니 선생님과 살게 되는 결말은 어린이가 자신의 힘으로 보호자를 선택한 행위이며, 이는 환상으로 가능했다. 어른의 규율과 체제를 따라야 하는 존재인 어린이가 자신의 힘으로 세계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아무래도 현실이 아닌 환상에서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리스 샌닥의 그림책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장난을 치다 엄마에게 혼나고 방에 갇혀 있던 맥스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아가 일 년간 항해하다가 괴물 나라에 도착해 괴물들의 왕이 되어 맘껏 논다. 1963년 출간된 이 그림책은 토끼나 다람쥐가 예쁘게 나와 교훈을 전하던 당시 그림책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혹평과 보이콧이 쏟아지는 등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현실에서 억압된 어린이가 환상으로 탈출하는 구조는 이제 어린이문학에서 익숙한 서사로 자리 잡았다. 맥스는 놀다가 괴물 나라 왕을 그만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온 방에는 따듯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다. 모험(탈출)과 회귀의 서사는 어린이 독자에게 해방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건네준다. 이때 회귀는 원래 현실에의 안주가 아니라 환상을 품은 새로운 현실의 창조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그림책 『북극으로 가는 기차(The Polar Express)』(1985)에서도 모험과 회귀의 서사를 확인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나라를 여행한 주인공은 산타에게 썰매의 은방울을 선물받지만 곧 잃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트리 뒤에서 은방울을 다시 찾는데, 이는 환상이 결코 헛된 꿈이나 망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려주는 판타지 문학의 오래된 트릭이다. 환상이 진짜였다는 증거물은 독자를 서사 속으로 이끄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환상 체험 후 현실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강조한다. 
 

C. S. 루이스의 ‘나르니아 연대기 시리즈’(전 7권, 1950)는 널리 알려졌듯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작품이다. 주인공 사 남매를 ‘아담의 아들, 하와의 딸’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사자 아슬란의 죽음과 부활 사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군중을 먹였다는 예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하는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시리즈의 마지막 권 『최후의 대결』에 이르러서는 선악의 대결에서 나아가 종말과 구원에 관한 서사가 더욱 분명해진다. 선악의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하는 이상은 사실 대개 판타지 어린이문학의 공통분모다.
실라 이고프(Sheila Egoff)는 『내부의 세계(World Within)』에서 “판타지가 우리를,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어 있던 원초적 세계의 진실로 데려간다.”고 말한다. 나르니아 연대기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은 그러한 판타지 문학의 기반 위에 자리한다. 하얀 마녀에게 넘어가 배신을 행한 에드먼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고 부활하는 아슬란은 분명 예수의 상징인 동시에 선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상징이다. 아슬란이 돌아오자 끝없는 겨울은 만물의 생명이 피어오르는 봄으로 변한다. 환상 세계인 나르니아에도 악이 존재하고 선악이 대결하지만, 이는 더 완전한 선과 궁극의 조화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다른 판타지 어린이문학 작품에서 소인들이 인간 사회를 비판하고, 어린 초인들이 나쁜 어른에 맞서고, 모험과 회귀를 오가는 건 모두 나르니아와 같은 이상 세계를 추구하는 희망의 도정으로 볼 수 있다. 안전, 신뢰, 평등, 존중 등 너무나 당연하고 소중하지만 실은 얼마간 잊거나 포기하고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일. 아마도 어른의 문학과 달리 어린이문학이 가장 구분되게 강조하는 지점일 것이다. 
물론 현실 세계는 판타지 어린이문학의 결말과 다르다. 현실은 ‘크리스마스도 없이’ 계속되는 겨울이거나, 토끼 사육 농장에 가깝다. 마틸다처럼 학대받는 어린이가 외부 연대 없이 제힘만으로 탈출하는 일은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하다. 신종 바이러스 시대에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가장 잘 지키며 별다른 해악을 발생시키지 않아도, 유치원도 학교도 못 가고 가장 고통 받는 집단이 바로 어린이인 것처럼.

그럼에도 판타지 어린이문학은 이상을 향한 열망을 결코 잃지 않으며 이상을 작품 안에 선취해 놓는다. 문학 작품을 압도하는 혼란하고 암담한 현실에서 문학의 환상은 이고프가 말한 ‘원초적 진실의 세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상기시킨다. 현실을 때로 돌파하고, 때로 비판하는 환상. 인류가 여태 도달하지 못했고 어쩌면 결코 도달하지 못할 희망,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세계에의 열망이 판타지 어린이문학에는 있다. 

 
 
─ 김유진, 「판타지와 함께 살아남기」,
《한편》 3호에서
 
 

김유진 선생님의 글을 다시 읽으니 《한편》 3호 첫 번째 온라인 세미나에서 소개해 주신 그림책『헨리에타의 첫 겨울』이 생각나요. “헨리에타는 아직 아가예요. 헨리에타의 엄마는 봄에 하늘나라로 가셨어요.”라는 문장으로 이야기는 시작하는데요. 헨리에타가 겨울을 지나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추운 겨울이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어린이문학만의 방식으로 “이상을 선취”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어요. 그때 뿌듯한 행복감이 차오르고요. 

저도 그날 처음 헨리에타를 알게 되었는데요, 첫 문장의 충격은 잊을 수 없어요. 모든 좋은 어린이문학에는 슬픔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도 떠오르고요. 이 강연에서 여러 독자 분들이 많은 질문을 주셔서 풍성한 대화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종합 선물 세트같은 시간이었답니다! 여러 논쟁과 작품을 통해 형성된 어린이문학의 기본 개념들에 대해 거의 다 다룬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김유진 선생님의 감탄 어린 후기도 전합니다.  

김유진은 서강대와 인하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어린이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린이문학 연구와 아울러 평론과 창작까지 함께하며 여러 시선에서 어린이문학을 탐색하는 중이다. 동시집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그림책 『오늘아, 안녕』 시리즈 등 여러 권의 어린이책을 출간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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