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인선 보러 오세요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편》 3호 주제인 ‘환상’과 가장 가까운 이들은 누굴까요? 오늘은 여러 시인들이 남긴 환상적인 시를 보내 드립니다. 각 시마다 꿈꾸듯이 작은 소리로, 혹은 큰 소리로 외치며 직접 상상력에게 말 거는 모습이 보여요.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이야기 속의 삶, 환상으로만 가능한 불멸에 대한 시를 한편 한편 읽어 보세요.
긴 하루의 근심과, 아픔에서 아픔으로
세상 변하는 것에 지쳤을 때,
길을 잃어 절망에 빠지려 할 때,
그대의 다정한 음성이 나를 다시 부른다.
오, 나의 진실한 친구여,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그대가 그런 어조로 말할 수 있는 한!
그 없는 세상은 그토록 희망이 없다니.
그 안의 세상을 나는 두 배로 소중히 여긴다.
속임수, 증오, 의심, 그리고 차가운
의혹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세상.
그대와 내가, 그리고 자유가,
반박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는 곳.
무슨 문제가 되리, 사방에,
위험과 죄와 어둠이 있고,
그저 우리 가슴속에
밝고 고요한 하늘을 지녀,
겨울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태양의 수만 빛으로 따뜻하기만 하다면?
물론 이성은 자연의 슬픈 현실에
종종 불평하기도 하겠지.
그리고 아픈 가슴을 향해 말하기도 하겠지
소중한 꿈들은 늘 분명 헛되어져 버린다고.
그리고 진리는 이제 막 피어난 환상의 꽃들을
무례하게도 짓밟아 버릴 수도 있어.
그러나, 그대는 늘 그곳에 있어,
서성이는 환상을 되가져 오고,
엉망이 되어 버린 봄 너머 새로운 영광을 숨쉬며,
죽음에서 아름다운 생명을 불러,
성스러운 목소리로, 그대의 세상처럼 빛나는,
현실의 세상에 대해 속삭이지.
나는 그대의 유령 같은 축복을 믿지 않으나,
그러나 저녁 고요한 시간,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고마움으로
그대, 인자한 힘을 환영한다네.
인간 근심의 확실한 위무자,
희망이 절망일 때, 더 다정한 희망!
─ 에밀리 브론테, 「상상력에게」
『상상력에게』에서
우선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을
뭔가 간단한 것을
뭔가 아름다운 것을
뭔가 쓸모 있는 것을 그릴 것
그다음엔 그림을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걸어 놓을 것
나무 뒤에 숨을 것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여러 해가 걸려서
마음을 정하기도 한다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전혀 무관한 것
새가 날아올 때는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그리고 새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 문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우되
새의 깃털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러고는 새가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나무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싱싱한 바람과
햇빛의 가루를
여름의 뜨거운 공기 속 풀벌레 우는 소리 또한 그릴 것
그러고는 새가 마음먹고 노래하기를 기다릴 것
혹시라도 새가 노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림을 잘못 그렸다는 신호
그러나 새가 노래한다면 좋은 징조
당신이 사인을 해도 좋다는 신호
그러거든 당신은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를 뽑아서
그림 한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면 된다.
─ 자크 프레베르,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오직 한 발 두 발 — 그건 삶이 아니다,
한 걸음씩 내딛는 건 독일적이라 힘들다.
나는 바람에게 나를 들어 올리라 명했고,
나는 새들과 함께 나는 법을 익혔다.
나는 바다 위를 날아 남국에 왔다.
이성이라니! 끔찍한 짓거리다!
그건 곧장 목표만 생각하게 하지!
날면서 나는 바보가 되는 법을 익혔다,
벌써 새로운 삶, 새로운 놀이를 향한
용기와 피와 기운이 느껴진다……
고독하게 사유하는 것은 현명한 것,
하지만 고독하게 노래하는 건 멍청한 것!
그러니 너희를 칭송하는 노래를 들어라,
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앉아라,
너희 고약한 작은 새들아!
그리 젊고, 아무렇게나 제멋대로이니
너희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나와
함께 멋진 시간을 보내도록 생겨난 것 같다,
북쪽에서 — 주저하는 마음으로 고백건대 — 나는
한 여인을 사랑했다, 끔찍할 만큼 늙은 여자를.
‘진리’, 그것이 그 노파의 이름이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남국에서」
욕망은 영광보다 더 우리를 도취시킨다. 욕망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꽃피우지만, 일단 소유하게 되면 모든 게 시들해진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꿈꾸는 것이 현실에서의 삶보다 더 낫다. 되새김질하는 짐승의 우매하고 산만한 꿈처럼, 어둡고 무거워 신비감이나 명확성이 떨어질지라도 꿈은 좋은 것. 삶 자체가 어차피 꿈꾸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연극들은 무대에 올려질 때보다 서재에서 상상할 때 더욱 아름답다. 사랑스러운 불멸의 여인들을 창작해 낸 시인들은 흔히 여인숙의 평범한 하녀들만 알고 지냈을 뿐이며, 가장 인기 있는 바람둥이란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삶, 아니 차라리 그를 질질 끌고 가는 삶조차 이해할 줄 모르는 작자다.
그는 자기 꿈의 여왕을 실제로 볼 때면 언제나 실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의 풍부한 상상력은 눈앞에 없는 이 여인에게 영광을 되돌려 주며, 다시금 그녀를 만나기를 갈망했다. 매번 그녀에게 실망하게 된 우발적인 이유를 당시의 불완전한 상황 탓으로 돌리려 애썼다. 자신의 환상 속에서 고도로 완벽해진 애인을 실제로 만난다는 이런 최상의 순간 이후에, 그는 자신이 그토록 매달리던 절대성과 이런 현실의 불완전함 사이의 격차에 절망하여 창을 넘어 투신했던 것이다.
인생이란 상상 속의 애인과 같은 것. 우리는 그녀를 꿈꾸고, 그녀를 꿈꾸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그녀를 실제로 체험하려 애쓰지 말 것. 이는 이야기 속의 소년처럼 갑자기는 아니지만 어리석음 속으로 몸을 던지는 꼴인데,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은 눈치챌 수 없는 뉘앙스에 의해 서서히 망가지기 때문이다. 10년 후에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꿈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부인하고, 소처럼 그 순간 뜯어먹을 풀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과 결합해야만 비로소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불멸성이 생겨날 수 있음을 그 누가 알랴?
─ 마르셀 프루스트, 「꿈으로서의 삶」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옛날에, 페르시아가
이름 모를 어느 전쟁을 치를 적에,
도시 안이 외적의 침입으로 들끓고,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두 명의 기사(碁士)들이 체스를 두고 있었고
그들의 경기는 계속되었다.
(……)
상아로 된 왕이 위험에 처한 마당에,
자매들과 엄마들 그리고 아이들의
피와 살이 무슨 대수랴?
성(城)이 흰 여왕의 퇴각을
엄호해 주지 못하는데,
약탈 같은 건 대수롭지 않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손이 상대방 왕에게
‘체크’를 부르려는 순간에는,
저 멀리서 자식들이 죽어 가는 것도
별로 영혼을 짓누르지 못한다.
갑자기, 방어벽을 넘어,
침입한 전사의 성난 얼굴이 나타나고
곧 저기 피 속에 쓰러질 것임에도
엄숙한 체스 기사는,
그 순간 직전까지도
위대한 무심함으로
총애하는 경기에
몰두해 있다.
도시들이 무너지건, 민중들이 고통받건,
자유와 삶이 중지되건,
무사했던 선조들의 재산이야
불타고 뿌리째 뽑히라지
단, 경기가 전쟁에 중단된다면,
왕은 체크 상태가 아닐 것,
그리고 가장 멀리 나간 상아로 된 졸(卒)은
성(城)을 만회하기 직전일 것.
에피쿠로스를 사랑하지만,
그의 가르침보다는 우리 식대로
그를 더 잘 이해하는 나의 형제들아,
이 차분한 두 체스 기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배우자.
진지한 것들은 전부 우리와 별 상관이 없게,
심각한 것은 무겁지 않게.
본능들의 자연스러운 충동이
근사한 게임을 두고자 하는
(한가로운 나무 그림자 아래)
무용한 쾌감에 양보를 하게.
이 부질없는 인생에서 우리가 가져가는
무엇이든 마찬가지
영광, 명예, 사랑, 과학, 삶이든,
그래 봐야 기껏
잘 둔 체스 한 판의 기억
또, 나보다 잘 두는 기사를 이긴
한 번의 시합만 못하지.
영광은 풍성한 짐짝처럼 무게가 나가며,
명예는 열병 같고,
사랑은 진지하게 찾아다니기에 지치고
과학은 영영 발견할 수 없고,
삶은 그걸 알기에 지나가고 고통스럽다……
체스 놀이도
온 영혼을 붙들어 둔다, 단, 져도, 무겁지는
않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 원치도 않는데 우리를 사랑하는 그림자 아래,
와인이 담긴 잔을 옆에 두고서
이 부질없는 노고
체스 경기에 여념이 없네,
이 경기가 그저 꿈일 뿐이라도
그리고 상대방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 이 이야기 속 페르시아인들을 따라 하자,
그리고, 저 밖에서
혹은 가깝든 멀든 간에, 전쟁과 조국과 삶이
우리를 부를 때, 그들이
우리를 부르는 데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자, 우리 각자
정겨운 그림자 아래 꿈을 꾸면서,
서로 상대방을, 체스는
그 무심함을.
─ 페르난두 페소아, 「체스를 두는 사람들」
아아, “용기와 피와 기운이 느껴진다…….” 검토서를 읽다가 오랜만에 본 시들은 “자유가 반박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는 곳”이네요. “이성이라니! 끔찍한 짓거리다!” 가슴속의 양을 찢고 들판으로 뛰어나가고 싶네요. 뛰어나간 끝에 방랑에 병든 바쇼를 마지막에 둬서 무척 슬픈데, 이건 시들을 배치한 편집자의 마음을 반영한 것 같고 말이죠 이렇게 마음은 황무지에 있지만 몸은 사무실에 있을 때 제가 떠올리는 구절은 이래요. “안으로는 들여다보지 마라. 자꾸 밖으로만 보며, 살아 있는 동안, 그 삶을 꿈으로는 돌리지 말 일인 것이다. 결국 꿈인 것을, 한바탕 모진 꿈인 것을. 그 꿈이 깨기도 전에, 하필이면 꿈으로 돌려야 할 이유란 없는 것이다.”(박상륭)
거대하고 인자한 상상력의 시와 황무지를 방랑하는 편집자들……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더 데일리 휴먼 빙’으로서 힘을 내야 할 때 제가 읽는 시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아무도, 무엇도 깨지지 않는 밤이기를
우리가 대신 모르고,
우리가 대신 빨간 코를 달기로 하십시다
내팽개쳐진 모든 게 기적처럼 중력을 이기고
가장 가까운 이의 두툼한 손바닥에
적당히 그렇게, 그린 듯이 안착하기를
말실수하게 생긴 못난 입들은
누룽지 사탕이나 송곳니랑 같이 깨물기를
(……)
서로 용기를 내어 남기로 하십시다
모르는 채로, 그러므로 우리는 뒤돌아 걷고
아직 우리가 모르는 말로 작성된 감정을 마름질하며
그렇게 두툼하게 뭐든, 안 깨지는 밤을 가지십시다
50여 년 전인 1973년 시작된 민음사 세계시인선이 새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다. 대부분 번역이 일본어 중역이던 시절, 원문과 함께 제대로 된 원전 번역을 시작함으로써 세계시인선은 우리나라 번역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세계적 수준의 현대성을 지닌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로운 시를 우리나라 시문학 르네상스에 박차를 가했던 전통의 시리즈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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