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낡은 파나마모자에 허름하게 차려입고 다닌다고 해서 돼지 냄새 나는 평원과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여관을 번갈아 가며 돌아다닌다고 생각하진 마세요.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나의 요람은 저 먼 푸에르토 마리스칼리토랍니다. 그곳은 언제나 신비로운 해안이었어요. 내 땅의 소녀들이 말라리아를 치유하려고 찾아가는 곳이니까요.
내 부친은 6월 6일에 권력을 잡은 열아홉 포병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온건파가 복귀하면서 모든 정계 인사들과 더불어 행정부 대령에서 하급 집행관 신세가 되었지요. 대포를 휘두르던 손이 이젠 길쭉한 봉투와 밀봉된 꾸러미를 돌리는 일을 하게 된 겁니다. 물론 부친이 인지대를 라임, 치리모야, 파파야나 과일 몇 개로 받던 우편배달부는 아니었어요. 예전엔 경비원이자 농장 관리자로 일하는 원주민이 통신문을 받으면서 싸구려 물건을 주곤 했지요. 마스카레나스 씨, 그 애국주의 속에서 그를 보좌하던 초년병이 누군지 아십니까? 지금 당신에게 이 믿음직한 얘기를 하고 있는, 콧수염이 말려 올라간 내가 그 소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내 첫 번째 기억은 나뭇잎과 득실거리는 카이만의 그림자가 비치는 초록빛 물결 속에서 카누를 붙잡고 물속을 허우적대던 일이에요. 나는 물에 들어가길 거부했는데 카토같던 아버지가 두려움을 이겨 내라며 느닷없이 날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두 발 달린 배불뚝이가 ‘영원히’ 싸구려 물건을 좋아하며 오두막집에 사는 소탈한 사람이 될 팔자는 아니었지요. 나는 내 신발 밑창을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어린 여자애가 아니라 말하자면 ‘몬테비데오의 언덕’ 같은 걸 찾는 데 쓰고 싶었으니까요. 내 기억의 앨범에 강력한 빛깔의 엽서를 간직하려 안달이 난 나는 좋은 것을 찾아가듯 나를 찾아가는 ‘자발적 체포’를 감행했지요. 그렇게 내 나라이자 조국이며 내 아름다운 향수인 온화하고 짙푸른 평원, 열대의 초목, 얼룩덜룩한 방울새풀에 이별을 고했지요.
사십 일 밤낮을 그야말로 다채로운 풍경 속에서 물고기와 별들을 헤치며 바다를 횡단했습니다. 한 갑판원이 뱃멀미에 힘들어하며 내려와서 내게 들려준 그 엄청난 풍경을 잊을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낙원에도 끝이 있지요. 마침내 그날이 도래하여 말아 둔 카펫이 깔리듯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내려 담배 연기와 플라타너스 나뭇잎 사이로 들어갔지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낸 처음 몇 해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전전하고 다녔는지는 일일이 밝히지 않겠습니다. 하나씩 세다 보면 이 건물의 기와 숫자보다 많을 겁니다. 다만 내가 직원으로 일했던 메이농 이 시아라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만 간략히 얘기하지요.
벨그라노 대로 1300번지의 넓고 휑한 건물이었죠. 저급 담배를 수입하는 회사였는데 녹초가 되어 밤에 눈을 감으면 알토레돈도의 담배밭에서 담뱃잎을 따는 생각이 날 정도였습니다. 회사엔 고객을 응대할 책상이 하나 있었고 지하실은 창고로 썼어요. 힘겹던 그 시절에 나는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기에 파누코산 석유를 다 주는 한이 있어도 작은 탁자의 위치를 바꾸고 싶었지만 알레한드로 메이농 씨는 가구 배치를 바꾸는 걸 용납하지 않았지요. 그가 앞을 못 보는 탓에 기억에 의존해 집을 돌아다녔으니까요. 절대 나를 볼 수 없었던 그를 다시 떠올려 보면 두 개의 밤처럼 새까만 안경을 쓰고 목동 같은 수염에 피부는 부슬거렸는데 키가 상당히 컸지요. 난 그에게 늘 이렇게 말했어요. ‘알레한드로 씨, 무더운 날씨에 얼굴이 누렇게 떴어요.’ 그런데도 그는 우단으로 만든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죠.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썼어요. 그가 거울 같은 반지를 끼고 있어서 내가 그의 손가락에 대고 면도를 했던 게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나도 그렇지만 알레한드로 씨는 근래에 이주한 사람에 속했지요. 헤렌가세에서 맥주를 마셔 본 지 반세기 정도 됐으니까요. 그는 거실 겸 침실에 별의별 언어로 된 성서를 쌓아 뒀지요. 그는 성서를 미화하는 부차적인 연대기에 지질학적 지식을 맞춰 보려는 기획자들 단체에 속해 있었어요. 빈곤한 사람은 아니어서 그 미치광이 단체에 기부도 하고, 그 일을 황금 외투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손녀인 플로라에게 성서의 연대기에 대한 애착을 유산처럼 물려주려고 했지요.
손녀는 기껏해야 아홉 살 정도 먹은 소녀였어요. 먼 바다를 응시하는 것 같은 눈에 금발이었고 동틀 녘 프레시덴테 언덕의 목장과 벼랑에서 볼 수 있는 암소의 혀처럼 얌전하고 순한 아이였죠. 소녀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내가 짬짬이 탬버린을 들고 부르던 내 나라의 국가를 듣고 즐거워했지요. 하지만 원숭이가 늘 원숭이처럼 귀여운 것은 아닙니다. 내가 고객과 입씨름을 하거나 잠시 쉬려고 하면 플로라는 지하실에서 ‘지구 속 여행’을 하며 놀곤 했지요. 그 탐험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할아버지는 지하실이 위험하다고 나무랐습니다. 집 안 전체를 집배원처럼 돌아다니는 그의 입장에선 물건의 위치가 바뀌는 바람에 길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고만 해도 충분했지요. 솔직히 그런 불평은 지나친 헛소리였어요. 고양이 모뇨조차 그곳엔 켜켜이 쌓인 저질 담뱃잎과 알레한드로 씨 이전에 운영되던 EKT 잡화점의 잡동사니밖에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모뇨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 고양이도 지하실을 싫어했어요. 언젠가 100번째 계단을 내려가다가 악마를 보고 경악하듯 도망쳐 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고양이가 보여 준 사기 같은 돌발적인 행동이 쓸데없는 걱정을 자극했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난 늘 자석처럼 똑바로 행동했습니다. 물론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면 버새를 붙잡고 있는 게 나을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나중에서야 모든 걸 이해하게 됐어도 그땐 이미 늦은 데다 사기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큰 불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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