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냉커피보다 맑은 정신의 소유자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편》 3호 ‘환상’ 편에서 끊임없이 마주친 이름. 물론 보르헤스입니다. 재미있는 환상소설을 보면 꼭 ‘보르헤스가 이 작품을 좋아합니다’라고 좋아요가 붙어 있는데요. 오늘은 마침내 보르헤스를 읽어보려고 해요. 끊임없이 이상한 이야기만 하면서 정작 본인은 “냉커피보다 정신이 맑다”라고 주장하는 한 아저씨의 이야기. 막 출간된 신간인 보르헤스와 카사레스의 공동 집필 소설집 『죽음의 모범』 중 한편입니다. 

나는 고우베이아 식당 겸 호텔에 들어가 따뜻한 콤플레토를 주문했어요. 밤 근무자가 9시가 지났다며 시포나소 소다수 한 병을 내왔는데 날이 추워서 최악이었죠. 한 잔 두 잔 마실수록 걱정이 밀려오더군요. 그래서 야간 근무자한테 엠팔메 로보스로 가는 첫 기차 시간을 알아봤죠. 보통 그런 근무자들은 말이 없지만 한번 말을 시작하면 디오고 탈곡기보다 말이 많아지는 법이죠. 
 
이제 여덟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찬 바람이 몰아쳐 몸을 바짝 웅크렸지요. 배불뚝이 삼파요가 들어오면서 열린 문으로 바람이 새어 들었던 겁니다. 그 배불뚝이의 정체가 뭔지는 모릅니다. 삼파요는 서글서글한 성격도 아니고 별의별 쓰레기들과 어울리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추위에 떠는데 내가 있던 대리석 탁자에 붙어 앉더니 밤 근무자한테 바닐라 넣은 코코아와 진한 수프가 좋은지를 놓고 삼십 분을 얘기하더군요. 결국엔 코코아를 마셨고요. 밤 근무자가 시포나소 소다수를 제공하면서 제 나름대로 설득을 했던 겁니다. 그 겨울에 삼파요는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밀짚모자에 짧은 코트를 입었는데 문학적 호기심을 채울 적절한 길을 발견하고는 로우렌소 전화번호부 개정판에 실을 생각으로 양돈가, 돼지 종축장, 월동장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어요. 거추장스럽게 멋을 낸 글자로 엄청나게 긴 목록을 작성했더군요.
 
우리는 추위에 오들거리고 이가 달그락거리는데도 그 폐쇄적이고 어두운 곳의 타일 바닥, 철재 기둥, 커피 메이커가 있는 진열대 등을 둘러보면서 호시절을 추억했죠. 서로 손님을 뺏으려 싸우고 입 안에 흙이 씹히도록 산루이스의 흙먼짓길을 돌아다니다가 로사리오로 돌아가면 양탄자 빨래터의 배수관이 막히곤 했던 때를 말이지요. 어느 열대 국가 출신인지 모를 그 뚱뚱이가 수첩에 적은 자신의 역작을 읽어 주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사십오 분 정도 모른 척하고는 아발로스, 아바라테기스, 아바티마르코스, 아바그나토스, 아바탄투오노스가 나의 행동반경 안에 있는 회사라는 얘기를 했지요. 그런데 삼파요가 다짜고짜 그 회사들을 그 지역 북서부의 가축 사육사들이라면서 그 지역이 인구는 많지만 불행히도 경쟁에서는 무료한 반계몽주의 선전에 빠져 있다고 하더군요. 배불뚝이 삼파요를 몇 해 전부터 알긴 했지만 뒤룩뒤룩한 몸에 문필가의 기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죠. 약간 경탄하면서 학식 있는 그를 기민하게 이용해 대화를 이어 갔습니다. P. 카르보네가 황금 같은 청년기에 나를 부러워했다는 딴죽도 걸며 말이지요.
 
나는 그 쓸 만한 배불뚝이가 교리 문답의 집에 머리를 들이밀게 하려고 중차대한 삶의 문제로 주제를 돌렸지요. 나는 P. 파인버그 교본의 지침을 대충 요약하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기차처럼 여행하는 인간이 소년 복사도 아는 ‘빵과 물고기, 그리고 삼위일체’가 완전한 거짓에 광기라는 것을 어찌 알겠냐고 했지요. 룸베이라 씨, 나의 강력한 한 방에 삼파요가 백기를 들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면 놀라서 잠도 안 올 겁니다. 그가 냉커피보다 맑은 정신으로 말하길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미신과 무지의 슬픈 결과를 자기만큼 경험한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헛수고라면서 천한 물질주의라는 죽음의 길에서 그를 멈춰 세운 개인적 경험을 내 머릿속에 넣어 주겠다고 했지요. 룸베이라 씨, 내가 맹세하고 맹세하건대 나는 그 배불뚝이의 이야기를 안 들으려고 당구대 위에서 한숨 자야겠다고 했지만 강압적으로 나를 붙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지금 내가 먹는 버터와 빵 부스러기 정도의 과장은 있겠지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당신에게 얘기해 주지요. 내가 하품을 하며 드러내 보인 목젖에 눈을 고정하고는 이렇게 얘기했지요.
 

“내가 낡은 파나마모자에 허름하게 차려입고 다닌다고 해서 돼지 냄새 나는 평원과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여관을 번갈아 가며 돌아다닌다고 생각하진 마세요.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나의 요람은 저 먼 푸에르토 마리스칼리토랍니다. 그곳은 언제나 신비로운 해안이었어요. 내 땅의 소녀들이 말라리아를 치유하려고 찾아가는 곳이니까요. 
 
내 부친은 6월 6일에 권력을 잡은 열아홉 포병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온건파가 복귀하면서 모든 정계 인사들과 더불어 행정부 대령에서 하급 집행관 신세가 되었지요. 대포를 휘두르던 손이 이젠 길쭉한 봉투와 밀봉된 꾸러미를 돌리는 일을 하게 된 겁니다. 물론 부친이 인지대를 라임, 치리모야, 파파야나 과일 몇 개로 받던 우편배달부는 아니었어요. 예전엔 경비원이자 농장 관리자로 일하는 원주민이 통신문을 받으면서 싸구려 물건을 주곤 했지요. 마스카레나스 씨, 그 애국주의 속에서 그를 보좌하던 초년병이 누군지 아십니까? 지금 당신에게 이 믿음직한 얘기를 하고 있는, 콧수염이 말려 올라간 내가 그 소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내 첫 번째 기억은 나뭇잎과 득실거리는 카이만의 그림자가 비치는 초록빛 물결 속에서 카누를 붙잡고 물속을 허우적대던 일이에요. 나는 물에 들어가길 거부했는데 카토같던 아버지가 두려움을 이겨 내라며 느닷없이 날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두 발 달린 배불뚝이가 ‘영원히’ 싸구려 물건을 좋아하며 오두막집에 사는 소탈한 사람이 될 팔자는 아니었지요. 나는 내 신발 밑창을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어린 여자애가 아니라 말하자면 ‘몬테비데오의 언덕’ 같은 걸 찾는 데 쓰고 싶었으니까요. 내 기억의 앨범에 강력한 빛깔의 엽서를 간직하려 안달이 난 나는 좋은 것을 찾아가듯 나를 찾아가는 ‘자발적 체포’를 감행했지요. 그렇게 내 나라이자 조국이며 내 아름다운 향수인 온화하고 짙푸른 평원, 열대의 초목, 얼룩덜룩한 방울새풀에 이별을 고했지요.
 
사십 일 밤낮을 그야말로 다채로운 풍경 속에서 물고기와 별들을 헤치며 바다를 횡단했습니다. 한 갑판원이 뱃멀미에 힘들어하며 내려와서 내게 들려준 그 엄청난 풍경을 잊을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낙원에도 끝이 있지요. 마침내 그날이 도래하여 말아 둔 카펫이 깔리듯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내려 담배 연기와 플라타너스 나뭇잎 사이로 들어갔지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낸 처음 몇 해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전전하고 다녔는지는 일일이 밝히지 않겠습니다. 하나씩 세다 보면 이 건물의 기와 숫자보다 많을 겁니다. 다만 내가 직원으로 일했던 메이농 이 시아라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만 간략히 얘기하지요.
 
벨그라노 대로 1300번지의 넓고 휑한 건물이었죠. 저급 담배를 수입하는 회사였는데 녹초가 되어 밤에 눈을 감으면 알토레돈도의 담배밭에서 담뱃잎을 따는 생각이 날 정도였습니다. 회사엔 고객을 응대할 책상이 하나 있었고 지하실은 창고로 썼어요. 힘겹던 그 시절에 나는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기에 파누코산 석유를 다 주는 한이 있어도 작은 탁자의 위치를 바꾸고 싶었지만 알레한드로 메이농 씨는 가구 배치를 바꾸는 걸 용납하지 않았지요. 그가 앞을 못 보는 탓에 기억에 의존해 집을 돌아다녔으니까요. 절대 나를 볼 수 없었던 그를 다시 떠올려 보면 두 개의 밤처럼 새까만 안경을 쓰고 목동 같은 수염에 피부는 부슬거렸는데 키가 상당히 컸지요. 난 그에게 늘 이렇게 말했어요. ‘알레한드로 씨, 무더운 날씨에 얼굴이 누렇게 떴어요.’ 그런데도 그는 우단으로 만든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죠.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썼어요. 그가 거울 같은 반지를 끼고 있어서 내가 그의 손가락에 대고 면도를 했던 게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나도 그렇지만 알레한드로 씨는 근래에 이주한 사람에 속했지요. 헤렌가세에서 맥주를 마셔 본 지 반세기 정도 됐으니까요. 그는 거실 겸 침실에 별의별 언어로 된 성서를 쌓아 뒀지요. 그는 성서를 미화하는 부차적인 연대기에 지질학적 지식을 맞춰 보려는 기획자들 단체에 속해 있었어요. 빈곤한 사람은 아니어서 그 미치광이 단체에 기부도 하고, 그 일을 황금 외투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손녀인 플로라에게 성서의 연대기에 대한 애착을 유산처럼 물려주려고 했지요.
 
손녀는 기껏해야 아홉 살 정도 먹은 소녀였어요. 먼 바다를 응시하는 것 같은 눈에 금발이었고 동틀 녘 프레시덴테 언덕의 목장과 벼랑에서 볼 수 있는 암소의 혀처럼 얌전하고 순한 아이였죠. 소녀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내가 짬짬이 탬버린을 들고 부르던 내 나라의 국가를 듣고 즐거워했지요. 하지만 원숭이가 늘 원숭이처럼 귀여운 것은 아닙니다. 내가 고객과 입씨름을 하거나 잠시 쉬려고 하면 플로라는 지하실에서 ‘지구 속 여행’을 하며 놀곤 했지요. 그 탐험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할아버지는 지하실이 위험하다고 나무랐습니다. 집 안 전체를 집배원처럼 돌아다니는 그의 입장에선 물건의 위치가 바뀌는 바람에 길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고만 해도 충분했지요. 솔직히 그런 불평은 지나친 헛소리였어요. 고양이 모뇨조차 그곳엔 켜켜이 쌓인 저질 담뱃잎과 알레한드로 씨 이전에 운영되던 EKT 잡화점의 잡동사니밖에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모뇨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 고양이도 지하실을 싫어했어요. 언젠가 100번째 계단을 내려가다가 악마를 보고 경악하듯 도망쳐 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고양이가 보여 준 사기 같은 돌발적인 행동이 쓸데없는 걱정을 자극했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난 늘 자석처럼 똑바로 행동했습니다. 물론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면 버새를 붙잡고 있는 게 나을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나중에서야 모든 걸 이해하게 됐어도 그땐 이미 늦은 데다 사기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큰 불행이었습니다.
 

당신이 다른 얘기로 말을 돌릴 수도 있겠지만 이젠 내 얘기에서 벗어나기 힘들 겁니다. 이제 당신에게 시련의 시간이 왔습니다. 알레한드로 씨가 라플라타에 가려고 작은 가죽 가방에 짐을 챙겼어요. 신앙심이 넘쳐 보이는 누군가가 그를 보러 오더니 함께 다르도 로차 영화관에서 열리는 성서 연구 모임에 가는 걸 봤습니다. 현관을 나서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커피 끓는 신호음이 잘 들리는 주전자를 가져올 거라고,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사흘 정도 출장을 다녀와야 하니 손녀인 플로라를 천에 황금을 싸듯 잘 돌봐 달라고도 했지요. 그는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여기선 내가 새까만 거구로 보이겠지만 나의 주요 역할은 개처럼 소녀를 보호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어느 오후에 레체 아사다를 거의 준비해 두고 소를 치는 사람도 어쩌지 못할 잠에 살짝 빠졌는데, 플로라가 성가신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지하실에 들어가 놀았나 봅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소녀가 인형을 눕혀 두던 그때 나는 소녀가 열이 나고 몽환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알았지요. 오한이 심해지는 걸 보고 담요를 걸치게 하고 민트 차를 끓여 줬지요. 그날 밤엔 평온하게 쉴 수 있도록 침대 끝에 있는 종려나무로 만든 발판에서 그녀를 돌봐야 했습니다. 소녀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깼지만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어요. 열이 문제가 아니었죠. 열은 내렸는데 여전히 공포에 휩싸여 있었던 겁니다. 한참 후 커피로 기운을 북돋아 주고 무엇 때문에 그리 무서워하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전날 밤에 지하실에서 아주 이상한 걸 봤는데 수염이 있는 걸 빼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더군요. 나는 수염이라는 환상이 열의 원인이 아니라 노련한 사람이 징후라고 일컫는 그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원숭이들이 촌놈을 의회 의원으로 선출했다는 이야기로 기분을 풀어 줬지요. 이튿날 소녀는 온 집 안을 염소처럼 돌아다녔습니다. 나는 때때로 계단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이어서 소녀에게 지하실에 내려가서 잘 살펴보고 손상된 담뱃잎 하나를 가져오라고 시켰지요. 씩씩한 아이라는 걸 알았기에 딴청 부리지 말고 지체 없이 해 달라고 했어요. 카누에서 나를 물에 빠뜨린 아버지가 불현듯 떠올라 측은함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그랬지요. 나는 아이가 서러워할까 봐 계단이 시작하는 곳까지 같이 갔다가 아이가 표적지에 그려진 군인처럼 아주 굳세고 꿋꿋하게 내려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눈을 감고 내려간 뒤 담배 무더기 틈새를 뚫고 오른쪽으로 들어갔지요.
 
몸을 돌리려던 찰나에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강하진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아주 작은 거울 같던 그 비명은 소녀가 뭔가에 기겁했다는 걸 의미했지요. 실내화 바람으로 뛰다시피 내려가 봤더니 소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소녀가 물에 잠긴 선저를 찾듯 가느다란 두 팔로 날 안았고 나는 몇 번이고 (소녀가 나한테 붙여 준 별명인) 산베르나르도를 홀로 남겨 두지 말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숨을 거두고 말았지요.
 
내가 누구도 아닌 것 같고 그 일이 벌어진 순간까지의 내 모든 삶이 완전히 다른 삶처럼 느껴지더군요. 계단을 내려가던 순간에 나는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었던 겁니다. 나는 바닥에 앉아 있었어요. 내 손이 저절로 담배를 말고 있더군요. 눈도 초점 없이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지요.
 

그 순간 소녀가 공포를 느낀 원인, 즉 소녀의 죽음을 불러온 원인이 부드러이 흔들거리는 버드나무로 만든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걸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내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그 불행이 내게 보여 준 명쾌함이 날 미소 짓게 하더군요. 
 
당신은 아직 그걸 모르니 모든 걸 깨뜨리고 비상하듯 돌진해 보세요. 일시에 세 가지가 고요하게 뒤섞이며 흔들의자를 움직이는 걸 그려 보세요. 과학적으로 그 세 가지가 한 지점에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앞서거나 뒤서거나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지 않았어요. 처음 볼 때는 그 특별함에 눈이 약간 아프더군요. 성부를 봤습니다. 무성한 수염을 보고 알아봤지요. 성부는 몸에 상흔을 지닌 성자이자 기독교도의 몸집처럼 큰 비둘기로 나타난 성령이었어요. 얼마나 많은 눈이 날 감시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마다 지닌 두 개의 눈이 자세히 보면 하나의 눈이었고 동시에 여섯 면에 있었으니까요. 입과 부리에 대해선 말하지 마세요. 그건 자살행위니까요.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나오고 그것이 쉼 없이 순환하니 내가 소용돌이치는 물에 빨려 들어갈 듯 아찔한 현기증을 경험했다는 게 놀랄 일은 아닐 겁니다. 빛을 발하며 움직이다가 몇 개의 빛줄기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에 홀려 손을 내밀었다면 아마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을 겁니다. 그 속에서 난 산티아고델에스테로를 달리는 38번 전차 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지하실에서 흔들의자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자세히 살펴보니 웃음이 나더군요. 흔들의자는 움직이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흔들린다고 생각했던 건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존재였던 겁니다.
 
천상과 지상의 창조자이신 성스러운 삼위일체를 목도했는데 알레한드로 씨는 라플라타에 있다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생각만으로도 무력감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했지요. 하지만 그렇게 기꺼운 명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알레한드로 씨는 구시대적인 사람이라 소녀를 소홀히 한 데 대한 나의 설명을 호의적으로 들어 줄 리 없었으니까요.
 
소녀는 죽었지만 흔들의자 근처에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소녀를 들쳐 안아 침대에 누이고는 인형도 곁에 놔뒀습니다. 이마에 입맞춤하고 집을 나섰지만 너무나 공허하면서도 너무나 거주자가 많은 그 집에 소녀를 두고 떠나는 게 마음 아팠습니다. 알레한드로 씨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온세역에서 도시를 빠져나왔지요. 언젠가 벨그라노 대로의 그 집이 재개발로 철거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이경민·황수현 옮김, 『죽음의 모범』 중 「두 가지 놀라운 환상: 증인」에서
 
사실 저는 보르헤스를 이번에 처음 읽어봤는데요. 두껍고 미로 같은 『죽음의 모범』에서 이 글 「증인」을 처음 읽었을 때…… 어려웠어요.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이탈로 칼비노, 로베르토 볼라뇨와 같은 작가들이 왜 보르헤스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네요. 장황하고, 비유가 굉장하고, 책에 미쳐 있고 말이죠. 세 번째 읽었을 때는 기어코 자기 얘기를 주입하고 마는 배불뚝이 삼파요가 웃겼는데, 이제 뉴스레터 발송 직전에 네 번째로 읽어보니 진정 오싹해요. 위험을 알아챈 고양이 모뇨가 신묘하고, 소녀를 굳이 지하실로 떠다민 배불뚝이 삼파요가 슬퍼요.
 ’이게 무슨 말이야…….’ 쉼 없이 휙휙 바뀌는 이야기의 무대로 끌려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을 만나다보니 정신이 살짝 혼미해지는데요. 좌우로 왕복하는 흔들의자의 움직임을 느낀 것 같은 어지러운 감각이 새삼 환상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흔들린 건 글을 읽는 나의 존재일 뿐. 

조이스, 카프카와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논쟁을 촉발시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환상 소설의 대가이자 스페인어권 최고의 문학상인 세르반테스 문학상을 수상한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두 작가가 가명의 소설가인 ‘오노리노 부스토스 도메크’를 내세워 만들어 낸 공동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 바로 『죽음의 모범』이다. 보르헤스와 카사레스의 공동 창작은 당시로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문학 실험으로, 평단으로부터 “오랜 준비 기간을 거친 공동 작업의 결과이며, 이 가상 작가의 문체는 보르헤스는 물론 카사레스와도 닮지 않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보여 주었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풍자와 아이러니가 넘치고 추리 소설 기법으로 정황 묘사와 이야기를 전개하는 『죽음의 모범』은 서사적 속도감이 문체적 특징인 카사레스와 백과사전적 지식을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풀어 놓는 보르헤스의 형이상학적 문체가 한데 어우러져 독자들에게 신비로운 독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