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이탈로 칼비노의『나무 위의 남작』을 들고 왔어요. 평생을 나무 위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저절로 ‘세상에 이런 일이’ 톤으로 읽게 되는데요. “1767년 6월 15일, 이날은 나의 형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가 마지막으로 우리들 사이에 앉아 있던 날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이야기입니다. 열두 살에 나무 위로 올라가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던 남작에게 세상은 그 전과 같을 수 없겠죠. 땅에 붙어 사는 우리와 나무 위의 남작 사이에서는 무엇이 오갈 수 있을까요?
올리브나무는 본래 비틀어져 있기 때문에 코지모 형에게 편리하고 가기 쉬운 길이 되어주었다. 비록 굵은 가지가 없고 형태도 그다지 다양하지 않았지만 거칠거칠한 껍질의 이 나무는 지탱하는 힘이 있고 이용하기 편리해서 그곳으로 지나가기에도 좋고 머무르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무화과나무 위에서는 가지가 버텨내는지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단 한번도 방향을 바꾸어 본 적이 없었다. 코지모 형이 천막처럼 드리워진 나뭇잎들 밑에 있다. 그는 잎맥의 한가운데를 뚫고 스며드는 태양과 조금씩 익어가는 초록의 열매를 바라보며 꽃자루로 흘러드는 유액의 냄새를 맡는다. 무화과나무는 그를 빨아들이려 하고 끈적끈적한 자신의 성질과 말벌들의 시끄러운 울음을 이용해 그에게 스며든다. 잠시 후 코지모 형은 자신이 무화과나무가 되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그러다가 불쾌한 기분이 들어 그 자리를 떠난다. 단단한 마가목이나 뽕나무 위에서는 편안함을 느낀다. 크고 오래된 호두나무도 있다. 그 나무를 나무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힘과 확실성이었고 무겁고 단단해지고자 하는 고집스러움, 나뭇잎 하나하나에까지 나타나 있는 그 고집스러움이었다.
코지모 형은 물결치는 것 같은 감탕나무 이파리 속에 있는 것을 좋아했고, 벗겨진 나무껍질을 아주 좋아해서 거기에 넋을 잃을 때면 손가락으로 나무껍질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것은 나무에 상처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주 길고 힘겹게 껍질을 벗는 나무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또 느릅나무처럼 나무의 옹이를 보고 부드러운 새싹과 톱니 모양의 무성한 이파리와 종이같이 생긴 종자를 머리로 그려볼 수 있는 나무를 사랑했다. 숲 속에서는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를 좋아했다.
이미 형의 눈에 비친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형의 세상은 이제 좁고 구불구불하게 허공에 놓인 다리들, 나무 마디나 껍질들, 이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유충들, 꽃자루를 흔드는 약한 바람에 떨리거나 나무 전체가 바람 앞의 돛처럼 휘어질 때 같이 흔들리는 울창하거나 성근 나뭇잎들, 그리고 그 나뭇잎의 초록색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햇빛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그 밑에 있는 우리들의 세상은 평평했으며 우리는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형이 나무 위에서 알게 된 것들과 나무가 몸통 내부에 나이테를 나타내는 원을 만들기 위해 세포 조직을 응축시키는 소리, 곰팡이가 산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함께 실려 온 먼지와 섞여 점점 커지는 소리, 둥지 안에서 잠자던 새들이 몸을 떨며 깃털이 제일 부드러운 날갯죽지에 머리를 쑤셔 넣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비 유충이 깨어나는 소리와 때까치 알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매일 밤을 보내는 형에 관해 우리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들판의 침묵 속에서 까악까악 우는 소리, 짐승의 긴 울음소리, 풀잎을 아주 재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 물속에 풍덩 떨어지는
소리, 땅과 돌멩이 사이로 비틀비틀 걷는 소리,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보다 훨씬 높이 있는 매미 우는 소리가 무수한 소음으로 귀에 들려오는 순간이 있다.
소음은 연이어 들리게 되고 청각은 마침내 그 소음 중에서 새로운 소리를 언제나 구별할 수 있게되는데, 그건 마치 양모 타래를 끄르던 손가락이 실타래마다 점점 가늘어져 제대로 만질 수도 없는 실들이 엉켜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과 같았다. . 하지만 바람이 불거나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모든 소리는 변했고 새로워졌다. 귀의 깊숙한 부분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소리는 음울한 포효 혹은 웅얼거림뿐이었다. 그건 바닷소리였다.
겨울이 왔고 코지모 형은 모피 윗도리를 해 입었다. 자기가 사냥한 여러 짐승, 그러니까 토끼, 여우, 담비와 흰 족제비의 가죽 조각을 직접 꿰매 만든 옷이었다. 머리에는 언제나 들고양이 모자를 쓰고 다녔고, 염소 가죽으로 직접 만든 바지를 입었다. 신발로 오소리 가죽으로 만든 슬리퍼였다.
밤을 보내기 위해 코지모 형은 천막이나 움막을 만드는 대신 털가죽 자루라는 수단을 찾아냈다. 안쪽에 털가죽을 댄 자루를 만들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자루 안에서 웅크리고 잠을 잤다. 이상한 소리가 밤을 가르면 자루 주둥이에서 고양이 모자와 총신이 나왔고 눈을 동그랗게 뜬 형이 나타났다. 아침이 되어 갈까마귀가 지저귈 때면 자루에서 팔이 쭉 올라오며 하품하는 형의 얼굴이 밖으로 나왔고 총과 쇠뿔로 만든 화약통을 멘 상반신, 휜 다리가 밖으로 나왔다.(항상 기어 다니거나 웅크리고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는 습관 때문에 형의 다리가 약간 휘어지기 시작했다.)
형은 아침이면 직접 고안하여 만든 공중 샘으로 갔다. 급경사 때문에 시냇물이 폭포처럼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가지를 높이 쳐든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코지모 형은 물받이 같은 것을 만들어 떨어지는 물을 떡갈나무로 끌어들여서 마실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게 만들었다. 어떤 때는 변덕이 생겨 빨래를 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형은 나무 위에서 필요한 일이면 모두 다 했다. 여전히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은 상태로 형은 사냥한 야생 짐승을 꼬챙이에 꿰어 구워 먹을 수 있는 방법도 찾아냈다. 화덕은 위험한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원하는 물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작은 폭포 근처의 떡갈나무 밑에 있었다. 형은 이렇게 사냥한 것의 일부는 먹고 일부는 농부들과 과일이나 채소로 물물 교환을 했다. 이제 집에서 형에게 아무것도 전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아주 잘 살게 되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바로 용변을 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세상이 넓기 때문에 여기저기 필요할 때 볼일을 봤다. 그러다가 그렇게 하는 게 별로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땅한 장소를 찾다가 메르단초 강둑에서 아주 적당한 지점에 서 있는 오리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메르단초 강은 갈대숲에 가려져 있는 데다 물살이 센 더러운 강이어서 이웃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구정물을 갖다버렸다. 형은 이웃과 자기 자신의 품위를 지키면서 문명화된 생활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냥꾼 생활을 할 때 정말 인간에게 필요한 보완물, 즉 개가 형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코지모 형은 거의 혼자 사냥을 다녔고 짐승을 거두기 위해 끈과 갈고리가 달린 낚시 도구 같은 것을 사용하곤 했다.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 노란 도요새가 떡갈나무 밑에서 시커멓게 개미 떼에 뒤덮이기도 했다. 토끼나 여우 뒤에서 사냥개들이 사납게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면 형은 그 짐승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그 짐승은 혼자 되는대로 우연히 사냥을 하는 사냥꾼인 우리 형의 몫이 아니었다.
하루는 초록색 풀 한가운데로 빨간 물결이 치더니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여우가 보였다. 여우는 풀밭을 가로질러 관목 숲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컹컹컹!” 하고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개들이 코로 땅 냄새를 맡으며 달려왔다. 두 번이나 코를 킁킁거렸으나 여우의 냄새를 맡지 못하자 직각으로 몸을 돌렸다.
그 개들이 이미 멀어졌을 때 낑낑거리는 소리와 함께 개 한 마리가 풀 속에서, 개라기보다는 물고기처럼, 그러니까 헤엄치는 돌고래처럼 튀어나왔다. 코가 아주 뾰족했고 귀는 사냥개보다도 더 축 처져 있었다. 뒤에서 보면 완전히 물고기였다. 지느러미를 꿈틀거리면서 헤엄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리 대신 아주 긴 물갈퀴가 달린 발을 움직여 헤엄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개가 밝은 곳으로 나왔다. 닥스훈트였다.
사냥개 무리에 섞여 있다가 뒤로 처진 게 분명했다. 젊은, 아니 아직은 거의 강아지라고 할 수 있었다. 사냥개 무리가 이제는 “왕!” 하고 짜증 난 듯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여우의 흔적을 놓쳐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닥스훈트는 코를 높이 들고 종종걸음으로 숨을 헐떡이며 분위기에 맞지 않게 의기양양해하며 그 개들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분위기에 맞지 않게 짖어댔다. “왕왕왕!”
코지모 형은 그 근방에서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닥스훈트를 따라갔다. 코를 부주의하게 흔들던 닥스훈트가 나무 위에 있는 소년을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코지모가 닥스훈트에게 말했다. “가봐! 가봐! 찾아봐!” 어린 개는 코를 킁킁거렸고 가끔씩 몸을 돌려 나무 위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가! 가!” 관목을 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멍멍멍! 왕왕왕!” 그 개가 여우를 일으켜 세웠다.
닥스훈트가 여우를 찾은 것을 보고 사냥개들과 사냥꾼들은 당황했다. “여봐요.”코지모가 말했다. “저 닥스훈트가 당신들 건가요?”사냥꾼이 소리쳤다. “네가 보기엔 우리가 닥스훈트를 데리고 사냥할 사람 같으냐?” “그렇다면 지금 일어난 저 여우에게 총을 쏠 사람은 나예요.”형은 총을 쏘아 여우를 잡았다.닥스훈트는 형의 개가 되었다.코지모 형은 그 개에게 오티모 마시모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나무 위에 소년의 모습이 나타나면 틀림없이 그 앞이나 옆쪽의 땅에 배를 대고 빠르게 걷고 있는 닥스훈트 오티모 마시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코지모 형은 그에게 먹이를 찾는 법, 멈춰 서는 법, 사냥물을 찾아오는 법 등 사냥개들이 하는 모든 일을 가르쳤다. 그래서 이제 그 둘은 숲 속에서 어떤 짐승이라도 찾아낼 수 있었다. 사냥한 짐승을 코지모 형에게 갖다 주기 위해 오티모 마시모는 자기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지까지 두 발로 기어 올라갔다. 코지모는 내려가서 개의 입에서 토끼와 꿩을 받아 들고 개를 쓰다듬어주었다. 이 모든 것이 그들 사이의 친밀감의 표시이자 의식이었다. 하지만 땅과 나뭇가지 위에 있는 둘 사이에서 계속 단음절의 소리와 혀를 차고 손가락으로 내는 소리를 통한 대화와 지혜가 오갔다. 개에게는 인간이, 인간에게는 개가 필요한 존재였고, 그들은 서로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과 개와 다르기는 했지만 행복한 인간과 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옮김, 『나무 위의 남작』, 121~135쪽 중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로 시작해서 ‘나는 자연인이다’를 거쳐 ‘개는 훌륭하다’로 끝나는 오늘의 편지, 어떠셨어요? 가는 여름이 참 아쉬운데, 남작처럼 나뭇가지 사이에 누워 푸른 바다를 느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남작의 다리가 휘어지기 시작했다는 부분에서는 나무 위에서 사는 일이 정말 모든 걸 바꿔 버린다는 실감이 나고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죠. 한편 그 어떤 개보다도 땅에 가까운 닥스훈트 개, 오티모 마시모(Ottimo Massimo)의 이름 뜻을 찾아보았는데요. 간단히 옮기자면 ‘최고 중의 최고’가 되겠네요.
제 프사↑에 있는 우리 개도 사냥감을 물어오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잘할 텐데, 현대인과 사느라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 읽어도 사랑스럽고 재미있는 칼비노의 소설 속 코지모는 거의 광인인데, 환상적인 현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무 아래의 현실을 비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 후반부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잖아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이 막 발표된 시기에 나무 위의 남작이 쓴 글 제목은! 「남자, 여자, 어린이, 가축과 새와 물고기와 곤충을 포함한 들짐승, 키 큰 나무, 야채, 잡초를 망라한 식물의 권리 선언이 들어 있는 공화정 도시를 위한 헌법 개요」…….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세계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대표작. 『나무 위의 남작』은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이 어떤 식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화로도 읽을 수 있다. 코지모는 원치 않는 요리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아버지에 반발해 나무 위로 올라가는데, 실상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다. 권위적이고 시대에 뒤진 아버지로 대표되는 귀족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 위에 올라간 후 코지모는 인간 사회의 갖가지 문제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그에 대한 나름의 비전과 해결책을 찾기 시작한다. 시인이자 탐험가, 발명가, 혁명가의 삶을 살면서 고집스럽고도 가혹한 의지로 자신의 완벽성을 실현시켜 나가는 코지모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으로 보인다. 칼비노는 그를 통해 일반적인 규범과 관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사회의 규범과 관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 가능함을 주장한다. 칼비노는 말한다. “세상의 현실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한 발 물러서는 것이 꼭 필요하다.”
나무 위에 살면서 땅을 사랑한다라. 역시 뭐든 좋아하는 것은 적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인지…
가까이 가면 불타버리는…왕왕왕!
반갑습니다 +_+ 실로 이번 ‘환상’ 편은 환상문학을 사랑하는 기현 편집자님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환상문학을 좋아하는 이유: 재미있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