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을 같이 읽어요! 인문잡지 《한편》 3호 ‘환상’ 편 출간과 함께 올가을은 ‘환상과 현실 사이’를 주제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지난주 소개해드린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이어서 오늘은 『파우스트 박사』를 들고 왔어요. 불멸을 위해서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는 오래된 파우스트 전설을 토마스 만이 재해석한 작품이죠. 소설 속에서 천재 작곡가는 시골에 은둔 중인데, 어느 날 누군가가 찾아옵니다. 바로 거장을 가만히 놔둘 수 없는 천재 매니저! “당신의 인생에 참견해드립니다!”라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20세기의 ‘전지적 참견 시점’을 만나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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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선생께서 이처럼 적막한 거처에서 꼼짝 않고 있어야만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는 모든 걸 보았소이다. 언덕이며, 연못이며, 교회가 있는 마을이며, 게다가 품격 있는 이 집과 더불어 모성애가 넘치고 활달한 여주인까지 말입니다. 여기선 얼마나 사셨습니까? 십 년이라고요? 줄곧 여기서만 말이오? 굉장하군요! 아, 그렇지만 충분히 납득이 되고도 남습니다! 제가 선생을 데리러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선생을 유혹해서 내 외투 자락에 태운 다음, 허공을 가로질러 나르면서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보여 드리죠. 그것만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당신의 발치에 대령시킨다 이겁니다…….
상스러운 말씨를 용서하십시오! 아닌 게 아니라 과장과 익살이 심했나 봅니다. 특히 ‘영광’이라는 말이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게 빗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영광이라는 게 별 거 아니거든요. 그런 말을 하는 저는 소인배들의 자식이지요. 별 볼일 없는, 그렇다고 천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핏줄을 타고났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폴란드 동부 지방의 루블린 출신이죠. 부모님은 그저 그런 유대인이었지요. 저는 유대인이거든요. 아시다시피 피텔베르크라는 이름은 어느 모로 보나 초라한 폴란드계 독일 유대인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이름을 전위주의 문화의 그럴듯한 선구자의 이름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의 친구 이름으로 만들었단 말입니다. 이건 간단명료하고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죠. 까닭인즉, 전 젊은 시절부터 좀 더 고상하고 지적이고 유쾌한 것, 그중에도 특히 파문을 일으킬 만한 새로운 것을 위해 정진해 왔기 때문이랄 수 있지요.
저는 대로변에 있는, 특정인만 출입하는 코미디 공연 극장을 운영했죠. 좌석이 100개밖에 안 되는 작은 지하 극장이었답니다. 극장 이름이 ‘우아한 속임수의 극장’이었어요. 정말 멋진 이름이죠? 하지만 재정난으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버렸지요. 좌석이 몇 개 되지 않으니 입장료가 비쌀 수밖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모조리 초대권으로 좌석을 채웠습니다. 우린 정말 표나게 튀었지요. 그러면서도 지식인인 체하고 거드름을 피웠죠. 관객이라고는 제임스 조이스, 피카소, 에즈라 파운드, 클레르몽토네르 백작 부인 정도밖에 없었으니 먹고살 수가 있어야죠.…….
그 후 현대 음악 공연을 위한 협회를 조직하고 사무실을 열었을 때는, 극장 덕분에 맺었던 인간관계들이 도움이 되었고 더욱 다양해지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제가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흥행사지요. 체질적으로 타고났단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그건 곧 저의 기쁨이며 자부심이란 말입니다. 저는 스스로 만족과 희열을 찾은 것입니다. 관심을 끌 만한 사람들을 발굴하고, 그를 위해 나팔을 불어 주고, 사교 모임을 북돋우고, 정 안 되면 흥분시키기라도 하는 재능을,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한 겁니다. 결국 살롱에서 뭘 원하느냐가 중요하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함께 찾을 희망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저의 제안, 즉 저의 초대를 뒷받침하는 건전한 사고는 바로 이겁니다. 천재성을 세계만방에 드날리고 진취적인 음악의 첨단을 달리는 독일인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그런 예술가가 있다면 다시 청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선입견과 속물근성에 신랄하게 도전하는 좋은 귀감이 될 것입니다. 이런 예술가가 민족성, 즉 독일 정신을 덜 부인하면 할수록, ‘이거야말로 정말 독일적인걸! 전형적이야!’라고 외칠 수 있는 계기를 더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그만큼 더 신랄한 도전이 되는 거죠. 선생께서 바로 그런 역할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선생께서는 자신의 예술을 엄격한 테두리 안에서만 펼치고 계십니다. 비록 우아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재치 있고 대담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선생의 독일적인 천성을 강조하고 싶거든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사각형처럼 꽉 짜인 구조라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중후하고 확고부동하고, 옛날 독일식으로 웅장한 리듬 말입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바흐의 음악에서도 그런 효과가 눈에 띄지요. 제가 비판적으로 얘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확신하건대 선생은 정말 위대하십니다. 선생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제들은 거의 대부분 이분의 일이나 사분의 일, 혹은 팔분의 일처럼 짝수 음표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아닌 게 아니라 붙임표나 이음표를 활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종종 매끄럽지 않고 우아하지 않게 무슨 기계 작업이나 하듯이 퉁탕거리는 망치 소리를 연상하게 하는 점에서는 경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죠. 독일인의 그런 측면은 어느 정도는 매혹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점을 흉본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그런 면이 너무나 특이하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준비한 일련의 국제 음악 연주회에서 이런 음악이 없어서는 말이 안 된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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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저의 요술 외투를 펼칠 테니 어디 구경이나 한번 하시지요. 선생을 파리로, 브뤼셀로, 안트베르펜으로, 베네치아로, 코펜하겐으로 안내하지요. 선생은 진지한 관심과 환대를 받을 것입니다. 최고의 교향악단과 성악가를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선생의 「바다의 불빛」, 「사랑의 헛소동」에 나오는 곡들, 「우주의 경이」가 연주될 겁니다. 선생께서는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서 프랑스 시와 영국 시에 곡을 붙인 본인의 악보에 맞추어 반주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 세상 사람들이 열광할 겁니다. 어제의 적국이었던 독일 사람이 어떻게 이런 가사를 골라서 곡을 붙였으며, 그걸 세상에 발표할 정도로 아량이 넓을까 하고 말입니다. 아량과 변덕의 사해동포주의여! 아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프라노 목소리를 가진 크로아티아의 마담 마야 드 스트로치페치치조차도 이 노래들을 부르는 걸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키츠의 시에 곡을 붙인 송가를 반주할 악단으로는 제네바의 ‘플론찰레이’ 사중주단이나 브뤼셀의 ‘프로 아르테’ 사중주단을 택하겠습니다. 최고의 정상급들이지요. 이만하면 마음에 드십니까?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휘를 맡지 않으시겠다니요? 정말입니까? 피아노 연주도 싫단 말씀입니까? 반주를 거절하겠단 말씀이군요. 알 만합니다. 다 듣지 않아도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됩니다! 이미 끝난 작품을 오래 붙들고 있는 건 성에 안 찬다 이 말씀이군요. 선생께는 작품을 작곡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공연이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오선지에 옮기는 것과 동시에 손을 떼시니까 연주도 지휘도 사절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되면 작품은 금방 변화되고 변주되며 변용되고 발전해서 아마 못 쓰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군요. 그렇게 되면 연주회는 결국 개인적인 매력 면에서 큰 소실을 입겠군요. 아,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이 가능할 거예요. 세계적인 지휘자를 찾아야겠군요! 멀리 둘러볼 필요도 없습니다! 마담 마야 드 스트로치페치치의 상임 지휘자가 가곡의 반주를 맡아야겠군요. 그리고 선생께서 왕림해 주시기만 하면, 그저 연주회장에서 청중들한테 모습만 보이시면 손해 될 건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이득이 되죠.
물론 이것은 조건에 불과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불참한 채 저에게 작품 공연을 맡겨선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몸소 와 주셔야 합니다! 특히 파리 공연 때는 꼭 말입니다. 파리에선 서너 군데 살롱이 음악적 명성을 키우죠. 그저 몇 번쯤 ‘마담, 당신의 음악적인 판단이 틀림없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는 데 밑천이 드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런 밑천 없이도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단 말입니다. 사교상의 성과로 치자면, 제가 주선하는 일은 댜길레프 씨의 러시아 발레단을 빼놓고는 최고거든요. 그렇지만 그건 러시아 발레단이 유럽에 올 때의 이야기죠. 선생은 저녁마다 초대를 받을 겁니다. 파리의 일류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술가한테는 그것보다 쉬운 일이 또 없지요. 게다가 그 예술가가 최고의 명성을 날리고 있고, 대단한 파문을 일으키며 인구에 회자될 정도면 문제없습니다. 호기심은 어떤 장벽도 무너뜨리니까요. 아무리 배타적이어도 호기심은 견디지 못한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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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 이 세상에 대해 품은 혐오감이 얼마나 독일적인지 스스로도 모르실 겁니다.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다면,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말해 오만과 열등감, 경멸과 두려움이 하나로 뭉친 것이라 할 수 있죠. 세속적인 살롱에 대해 진지한 사람이 품는 울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 이름 ‘사울 피텔베르크’는 유대인식입니다. 제 핏줄에는 구약 성경의 전통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일 정신 못지 않게 심각한 사태죠. 독일 정신은 화려한 왈츠 같은 것에는 근본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외국에는 화려한 왈츠뿐이고 독일에는 진지함뿐이라는 미신 같은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건 그렇고,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대개 세상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독일 정신과 통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죠. 물론 그렇게 자기 좋을 대로만 사는 대가로 푸대접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죠. 독일적이라는 것, 그것은 원래 민중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보고 민중적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던가요? 민중적인 것은 믿지도 않을뿐더러, 만일 어떤 유대인이 민중 속에 파고들어 뭔가를 해 보려 했다가는 호되게 머리를 두들겨 맞는단 말입니다. 우리 유대인들은 독일적인 것은 무엇이든 두려워해야 합니다. 독일적인 것의 정수는 반유대 감정이니까요. 그것은 물론 우리가 세상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요. 우리는 대화나 평판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허둥거리거나 경망스럽게 군다는 뜻은 아니지요. 우리는 구노의 가극 「파우스트」와 괴테의 원작을 잘 구별할 줄 압니다. 비록 프랑스어로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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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한테 민족정신 따위는 박해를 부추기는 무모한 생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국제적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독일적인 것을 존중합니다. 세상에서 우리처럼 독일적인 민족은 없습니다. 지상에서 독일 정신과 유대 정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 비슷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얼마나 명쾌한 유추입니까! 우리 유대인은 독일인이 당하는 것과 비슷한 증오와 경멸과 따돌림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비슷한 처지의 이민족이 된 셈이지요. 사람들은 민족주의의 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실은 두 개의 민족주의가 있습니다. 독일인의 민족주의와 유대인의 민족주의 말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전부 유치한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나톨 프랑스 같은 작가의 고루한 프랑스 정신 따위는 독일인의 고독에 비하면 순전히 속물근성에 불과한 것이죠. 유대인이 자부하는 선민의식과 비교해도 그렇지요……. ‘프랑스’라니, 그런 이름은 사이비 민족주의의 허울일 뿐이죠. 독일의 문필가라면 ‘도이칠란트’라는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이름은 기껏해야 전함에나 어울리죠. ‘도이치’라는 이름 정도면 족하겠지요. 그런 이름은 또한 유대인 문필가의 이름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오, 룰룰루!
아니, 제가 정말 출입문 손잡이를 잡고 있군요. 벌써 밖으로 나가려는 참입니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지요. 독일인들은 유대인이 독일적인 것을 위해 하는 일을 유대인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주의, 자만심, 우월감, 다른 민족에 편입되거나 균등화되는 것에 대한 혐오, 세상과 섞이기를 거부하고 유대를 맺기를 거부함으로써 불행을 자초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유대인과 같은 불행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독일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그들과 사회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도록 허용해야 할 것입니다. 매니저, 흥행사란 독일 정신의 대리인 같은 것이죠. 그런 일에는 유대인이 안성맞춤이거든요. 유대인을 쫓아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유대인은 국제적이며, 독일 정신을 이어받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다 부질없는 소리죠. 정말 유감스럽군요! 제가 아직도 지껄이고 있나요? 진작에 떠났어야 하는데, 정말 황홀한 시간이었습니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감개무량합니다. 아듀, 아듀…….”
─ 토마스 만, 임홍배·박병덕 옮김, 『파우스트 박사 2』, 288~307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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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떠들다가 마지막까지 시끌벅적하게 퇴장하는 기획자, 진짜 웃기지 않아요? 왠지 《한편》 저자 미팅을 할 때 생각도 나고 말이에요. 음악 매니저 피텔베르크 씨는 ‘요술 외투’를 가지고도 모든 제안을 거절당한 셈인데, 그럼에도 본인의 의견을 거의 다 피력했고 기분 나빠하지도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작가와 기획자 또는 거장과 상인, 주인과 하인이라는 흥미진진한 한 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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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칭찬하고 북돋고 최고라 칭한다는 점에서는 역시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떠올라요. 마르가리타는 자기 애인인 소설가를 이름으로도 안 부르잖아요. 이야기 내내 그는 그냥 “거장”이고, 마르가리타는 거장을 위해 말 그대로 악마의 부탁을 들어 주는 고생을 감내하고.
한편 헌신적인 남성 숭배자와 꼬장꼬장한 여성 예술가의 조합도 있어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 이야기』에서 슌킨은 어릴 때 눈이 먼 후 음악에 정진하여 일본 전통 악기 샤미셴 연주의 명인이 되었는데, 그의 곁에는 꼬마 시절부터의 하인이자 제자인 사스케라는 남성이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성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나 일반적인 사랑의 개념과는 다르답니다. 사스케가 슌킨의 숭고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하여 선택한 길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두 권은 재밌으니까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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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토마스 만이 남긴 최후의 걸작. 토마스 만은 이 소설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았을 뿐만 아니라, 집필 과정에 관한 300쪽가량의 책을 따로 출간할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고독하고 오만한 천재 작곡가가 창작의 위기에서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악마와 거래를 하고, 결국 정신적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으로, 중세 파우스트 전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였다. 1943년에서 1947년까지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이 소설을 집필하면서 토마스 만은 파시즘에 열광하고 유대인 학살을 묵과한 독일의 실상을 투영하여 날카롭고 진중한 자기성찰을 보여 주었다. “내가 있는 곳에 독일 문화가 있다.”라고 한 그의 단언처럼, 가장 독일적인 면모를 보이는 전위적인 음악가의 생애를 통해 독일 정신의 본질과 독일의 역사, 사상, 문화와 예술을 총망라한 철학적인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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