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에게 영향을 끼친 늙은이, 노자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편》 2호 ‘인플루언서와 미디어’에 관한 글 읽기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미디어의 영향력에 관해 서양의 사상가들, 젊은 연구자들, 여성 작가들이 쓴 글을 편지로 보내드렸는데요. 글쓰기의 힘을 둘러싼 설왕설래들을 거쳐 오늘은 고요하고도 소박한 고전을 들고 왔어요. 바로 동양 최고의 인플루언서, 노자입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가 당부하는 말처럼 들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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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억지로 취해 다스리고자 하면
나는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을 볼 뿐이다.
세상은 ‘신기(神器)’라, 억지로 도모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 도모하는 자는 망치고, 애써 잡고자 하는 자는 놓친다.
사물은
앞서가는 것도 있고 뒤따라가는 것도 있으며
뜨거운 것도 있고 차가운 것도 있으며
강한 것도 있고 꺾이는 것도 있으며
길러 주는 것도 있고 무너뜨리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심함’, ‘지나침’, ‘사치함’을 버린다.
─ 『노자』 29장
해설 │ 백서본에 의하면 이 장은 본래 서로 다른 두 개의 장으로 분리된다. 하나는 인위와 억지로는 세상을 얻을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말하고, 다른 하나는 사물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니 극단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둘 다 직간접적으로 무위와 연관이 있으므로 후대의 편집자가 하나의 장으로 묶은 듯하다.
종종 사람들은 세상을 소유하려 한다. 정치인은 권력으로, 군인은 무력으로, 기업인은 돈으로, 문필가는 글로 세상을 소유하려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유’는 세상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려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나는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을 볼 뿐이다.” 어째서인가? 세상은 ‘신기(神器)’이기 때문이다.
‘신기’는 세상이 억지로 취하거나 인위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가 몸을 싣고 있는 우주 자체가 이미 ‘신기’다. 우리의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의 생김새는 볼록 렌즈와 같다고 한다. 직경이 10만 광년이고 두께의 중심부가 1만 5000광년이다. 이 은하계가 한 번 도는 데는 무려 2억 년이 걸린다고 한다.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사는 우리로서는 헤아려 보기도 힘든 시간과 규모다. 그러한 ‘신기’ 위의 인간 세상사 또한 신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오직 힘으로 세상을 얻고자 한 역사 속 독재자들은 천도를 거스르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에 역사의 수레바퀴에 무모하게 대항한 ‘당랑거철(螳螂拒轍)’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상공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천하의 주인이 되려 하고 인위로 백성을 다스리려 하나, 나는 그가 천도와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안다. 천도는 번잡하고 탁한 것을 싫어하며, 백성은 욕심 많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사물에 존재하는 양면성을 지적하면서 참된 지도자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말한다.
사물은 모두 양면성을 지닌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가 아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고, 이것이 나타나면 저것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한다. “사물은 앞서가는 것도 있고 뒤따라가는 것도 있으며, 뜨거운 것도 있고 차가운 것도 있으며, …… 그러므로 성인은 ‘심함’, ‘지나침’, ‘사치함’을 버린다.”
‘심함’, ‘지나침’, ‘사치함’은 모두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친 상태를 가리킨다. 노자는 이러한 극단을 제거하라고 충고한다. 극단은 너와 나를 가르는,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상대적인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통일된 전일(全一)의 세계 또는 절대의 세계에서는 극단이 있을 수 없다. 공자도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고 하여,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치는 상태를 경계했다. 이는 곧 사물은 모두 양면성을 지녔다는 것에 대한 인식으로, 이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해 소철은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다.
“음과 양은 서로 반응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큼과 작음은 서로 부리고, 혹 앞에서 이끌고, 혹 뒤에서 따른다. …… 모두 사물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좋은 것은 얻고자 애쓰고 나쁜 것은 버리고 피하고자 하니, 결국에는 화가 닥쳐 뒤집어지거나 꺾이고 만다. 오직 성인만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음을 인식하여 그것을 잘 순종하고 따른다. 그리하여 그 심함을 버리고 그 사치스러움을 버리며 그 지나침을 버려,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백성을 다치게 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니 세상에 근심이 사라진다.”
결국 노자가 말하는 ‘거심(去甚)’, ‘거대(去大)’, ‘거사(去奢)’는 모두 통치자의 지나치고 과도한 행위를 경계하는 말이다.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는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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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로 임금을 돕는 사람은 무력으로 세상을 제압하지 않는다.
무력 사용에는 대가가 돌아오는 법, 군대가 머문 자리엔 가시나무만 생겨난다.
용병을 잘하는 사람은 과감하게 행할 뿐, 군대에 의해 강함을 취하지 않는다.
과감하되 교만하지 말고, 과감하되 뻐기지 말며
과감하되 자랑하지 말고, 과감하되 부득이하게 하라.
이것을 가리켜 과감하되 강함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한다.
사물이 뻣뻣하면 늙게 되는 법, 이는 도에 합치하지 않는다.
도에 합치하지 않으면 일찍 끝장난다.
─ 『노자』 30장
해설 │ 이 장은 다음 장과 더불어 용병술에 관한 장으로 분류된다. 노자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싫어했으나 회피하지는 않았다. 부득이한 상황에서는 전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자가 살았던 시기가 전쟁이 빈번했던 춘추 전국 시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용병 문제를 도외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죽간본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장은 고층대의 『노자』 텍스트에 속한다.
역사상 수많은 전쟁 영웅들과 정복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들은 무력으로 세상을 제압하고 거대한 제국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룬 거대 제국은 잠시 잠깐 존재하다 허망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군대로, 힘으로 세상을 제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노자는 지도자들에게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들지 말라고 충고한다.
모든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선한 행위를 심으면 선한 결과가 따르고, 악한 행위를 심으면 악한 결과가 도래한다. 군대를 일으키고 전쟁을 벌이면 그에 상응하는 재앙이 발생할 뿐이다. 이식재(李息齋)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를 남겼다. “남의 아버지를 죽이면 남 또한 내 아버지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 또한 내 형을 죽인다. 이것을 ‘호환(好還)’이라 한다. 군대를 일으켜 승리하지 못하면 그 해로움이 한둘이 아니다. 요행히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 살기(殺氣)가 반응하니, 땅은 그곳을 생성할 수 없게 만들고 하늘은 그곳을 화합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군대가 머문 자리에는 가시가 생겨나고 군대가 떠난 후에는 기근이 발생하는 것이다.”
소박하고 안정된 평화로운 삶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노자에게 군대를 일으키고 전쟁을 벌이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집단 또는 국가 사이에 갈등이 전혀 없을 수 없고, 때로는 타국의 침략을 받을 때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노자도 전쟁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노자는 용병의 핵심은 과감함이라고 말한다. 적에게 맞서야 할 때는 과감하게 공격하라는 것이다. 과감하게 공격하여 속전속결로 끝내야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시에 노자는 전쟁에서 승리해도 자신의 강함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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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병기는 상서롭지 않은 물건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하니 도를 행하려 하는 자는 가까이 않는다.
군자는 평상시엔 왼쪽을 귀히 여기나, 전시(戰時)엔 오른쪽을 귀히 여긴다.
그러므로 말한다, “병기는 상서롭지 않은 물건이니,
어쩔 수 없이 사용할 때는 고요히 담담하게 행할 뿐 찬양하지 말라.”
병기를 찬양한다면 이는 살인을 즐기는 것이니
살인을 즐기면 세상에서 뜻을 이룰 수 없다.
이 때문에 좋은 일에는 왼쪽을 높이고, 나쁜 일에는 오른쪽을 높인다.
그러므로 부사령관은 왼쪽에, 총사령관 오른쪽에 자리하니,
이는 상례(喪禮)로 전쟁에 임한다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을 죽이면 슬픔으로 임하고, 전쟁에 이기면 상례로 처신하라.
─ 『노자』 31장
해설 │ 앞 장에 이어 이 장에서도 용병에 관해 말하고 있다. 병기는 상서롭지 않은 물건이니 가능한 사용하지 말 것이며, 부득이하게 병기를 사용하여 승리하더라도 그것을 찬양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한편 이 장은 유일하게 왕필주가 달려 있지 않다. 따라서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장 전체 혹은 일부가 『노자』의 경문이 아닐 거라고 의심해 왔다. 그래서 『도장집주(道藏集注)』본에서는 이 장의 말미에 왕필주를 인용하면서, “의심컨대 이 장은 노자의 작품이 아닌 것 같다.”라고 기술한다. 그러나 현재 백서본에 이 장이 고스란히 들어 있고, 죽간본에도 앞의 일부를 제외한 전문이 나와 있다.
무위자연의 삶을 지향하는 노자는 기본적으로 반전주의자다. 전쟁은 무위에 역행하는 인위적 행위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자에게 병기는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상서롭지 않는 물건이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무기를 싫어하고 꺼린다. 그러므로 도를 지닌 사람 혹은 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 ‘상서롭지 않은 물건’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무릇 병기는 상서롭지 않은 물건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니 도를 행하려 하는 자는 가까이 않는다.”
병기를 상서롭지 않은 물건으로 여기는 반전 의식은 오른쪽과 왼쪽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노자는 말한다. “군자는 평상시엔 왼쪽을 귀히 여기나, 전시(戰時)엔 오른쪽을 귀히 여긴다.”
영어 right는 ‘올바른’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방향으로는 ‘오른쪽’을 가리킨다. 이슬람교도들은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는 대변을 처리한다. 이는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오른쪽이 중시되고 왼쪽이 천시되었다는 점을 반영한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은 이와 다르다. 고대 동양에서는 오른쪽보다는 왼쪽을 더 높이고 숭상했다. 임금의 자리의 방향, 즉 남면(南面)한 상태에서 바라보면 동쪽은 왼쪽이고 서쪽은 오른쪽이다. 동쪽은 목(木)의 방향으로 생성과 성장을 상징했다. 반면에 서쪽은 금(金)의 자리로 죽음과 살상을 상징했다. 때문에 고대인들은 평소에는 왼쪽을 숭상하고 높였다. 조선 시대 관제에서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단 전시에는 적을 죽이고 물리치는 일이 중요하므로 비정상적으로 오른쪽을 높였을 것이다. 병기를 상서롭지 않은 물건으로 여기는 반전 의식은 오른쪽과 왼쪽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나는 셈이다.
노자의 반전주의는 전쟁에 승리하고 귀환하는 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노자에게 전쟁의 승리는 환영의 대상이 아니라 애도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한다. “전쟁에 이기면 상례로 처신하라.”
서양인들은 전쟁에 승리하면 그것을 기리기 위해 건축물을 세우곤 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개선문이다. 개선문은 이미 고대 로마 시대에도 있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티투스 개선문, 세베루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등을 볼 수 있다. 동양은 어떤가? 동양에서는 서양의 개선문과 같은 승전을 기념하는 건축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들과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는 있었지만 승전을 축하할 일로 여겨 크게 기념하는 건축물 같은 것은 세우지 않았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전쟁 자체를 흉한 일로 여기는 동양인 고유의 정서가 깔려 있다.
전쟁에서 승자의 기쁨은 패자의 고통과 슬픔을 의미한다. 이긴 자들은 축배를 들겠지만 진 자들은 절망과 굴욕에 괴로워할 것이다. 노자는 패한 자들의 슬픔에 마음을 더 두었다. 도의 자리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노자로서는 승리의 기쁨 이면에 패자의 슬픔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에 임하는 예로써 패배한 자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죽은 자들의 불행을 애도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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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의미를 남김없이 터득한 현명한 ‘늙은이’, 혹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융성했던 주나라의 수장실 관리. 바로 2500여 년 전의 사상가 노자(老子)의 상이다. ‘도(道)’, ‘자연(自然)’, ‘무위(無爲)’, ‘비움(虛)’, ‘고요함(靜)’이라는 말과 함께 노자는 우리의 정신을 주조한 아득한 옛적의 틀이자, 오늘날까지도 고갈됨 없이 늘 새롭게 읽히는 현대인을 위한 고전이다. 민음사의 『노자』는 노장 철학의 우뚝한 권위자 이석명의 30여 년의 연구를 통해 소박하고 조야한 옛 판본으로부터 정련된 주석가들의 저작까지 망라하여 노자로 가는 바른길을 연다.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 홀로 흐리멍덩할” 때 “흐릿하다가도 고요히 가라앉아 서서히 맑아지라” 이른 노자의 뜻 그대로,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스스로 노자에 다가갈 수 있다. 역주자 이석명은 경희대 영어영문과를 졸업하고 지곡(芝谷)서당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중국 베이징대에서 박사후과정을 이수했으며 전북대에서 HK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노자와 황로학』(학술원우수학술도서 선정), 『노자, 비움과 낮춤의 철학』, 『회남자: 한대지식의 집대성』(학술원 우수학술도서선정), 『장자, 나를 깨우다』 등을 썼고,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회남자』, 『문자』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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