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편》 2호의 주제 ‘인플루언서와 미디어’에 관해, 지난주의 프랑스 철학에 이어 오늘은 오스트리아 철학자를 소개합니다. 바로 성별, 성적 지향, 인종, 민족을 둘러싼 혐오 문제에 관해 날카로운 비평을 펼치는 이졸데 카림인데요. 한국에서 차별금지법 발의를 둘러싼 논의가, 미국에서는 #BLACK_LIVES_MATTER 운동이 한창인 오늘날. 이졸데 카림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정치적 감정’의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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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에서 다원화에 대한 저항의 중심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우익 포퓰리즘이다.
우익 포퓰리즘 개념은 종종 명료하지 못한 의미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개념을 매우 정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원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 특별한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새롭고 고유한 개념이 필요하다. 이 개념을 좀 더 가깝게 규정하고 싶으면 다음 사항을 분명히 해야 한다. 포퓰리즘은 동질적인, 결코 다원적이지 않은 민족이라는 환상을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 전략이다. 또한 친구와 적이라는 상황을 생산하는 전략이다. 여기에서 적은 이중으로 구성된다. 위로는 ‘엘리트’가 적이며 아래로는 이민자, 망명자 그리고 난민이 적이다. 이와 같은 적의 규정은 필수적이지만 여전히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독일 출신의 정치학자 얀베르너 뮐러가 제시했듯이, 하나의 전략이 “도덕적으로 유일한 대표 요구”로 격상되었을 때 포퓰리즘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전략이란 “오직 우리만이 진정한 민족을 대표할 수 있다.”라는 전략이다. 이제 이러한 포퓰리즘 구조의 윤곽을 상세하게 관찰할 것이다. 제기되는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우파 포퓰리즘은 어떤 상황에서 개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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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포퓰리즘이 개입하는 상황은 ‘포퓰리즘적 국면’이다. 중언부언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이 상황 규정은 동어 반복이 아니다. 포퓰리즘적 국면은 포퓰리즘과 같은 게 아니라 그보다 앞서는 어떤 것이다. 포퓰리즘적 국면이란 포퓰리즘이 뻗어 갈 수 있는 상황으로, 특정한 사회 분열이 시작되는 역사적 국면을 말한다. 정치, 경제, 문화의 균형이 흔들릴 때, 사람들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통합이 더 이상 굳건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국면이다. 이때 전 국민은 “사회적 홈리스” 신세가 된다.
역사를 볼 때 이러한 포퓰리즘적 국면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포퓰리즘적 국면이 다원화된 사회와 만났다는 점이다. 특별하면서도 대단히 뜨거운 만남이다. 다원화가 단순히 포퓰리즘적 국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오늘날 사회적 변동에는 세계화에서 신자유주의를 거쳐 기술적 역동화에 이르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민의 다양화가 유일한 주요 요인으로 단순화되었고, 다원화는 이렇게 ‘가상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원화는 특별한 기능을 수행했다. 바로 포퓰리즘적 국면을 촉진하고 가속화했다. 이런 측면에서 다원화는 진짜 원인이기도 하다. 바로 가짜 원인과 가속화한 포퓰리즘 국면의 결합, 환상과 실제 사회 해체의 동시성이 지금 포퓰리즘 운동이 만연하는 이상적인 환경이다.
포퓰리즘적 국면, 사회 분열의 이 같은 주요 특징에, 기존 질서에 결합되어 있던 감정이 해체되는 지점에 포퓰리즘이 끼어든다. 다시 말해 포퓰리즘은 사회적 홈리스 상태가 또한 감정적 홈리스 상태임을 정확히 반영한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따라서 반다원주의는 본질적으로 감정을 통해 운반된다. 포퓰리즘, 즉 반다원주의는 언제나 빵빵하게 채워진 감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길거리에서, 현수막에서, 텔레비전에서, 소셜 미디어에서 혹은 개인적 만남에서, 어디에서 만나든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이 감정적 탈주를 종종 맨몸으로, 할 말을 잃은 채 관중으로서 대면한다.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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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에 찬 민주주의자들이 내놓는 영원히는 상투적이고 늘 반복되는 대답이 있다. 계몽! 우리에게는 더 많은 계몽, 더 많은 정보, 더 이성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계몽과 이성이 한편에, 무지와 비이성이 반대편에 자리 잡는다.
이 확신에 찬 민주주의자들의 판단력을 흐리는 것은 바로 그들의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 질서라는 그들의 상상. 사람들은 이성적인 논쟁을 나누고, 사안의 경중을 재며, 결국에는 영리한 타협책을 찾는다는 것. 이는 과장이 아니라, 계몽된 모습에 대한 상투적인 묘사다. 실재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것은 우리 머릿속을 떠돌고 있는 정치의 이상이자, 아마도 우리가 진짜 모습을 모르고 있는 이상이다. 정치적인 것에서 감정이 출현할 때, 그리고 감정이 질병으로 다루어질 때 언제나 분명해지는 이상.
그러나 이상적인 합리성의 관점에서 감정을 관찰하면 감정은 일탈로 변한다. 이때 느낌과 감정은 병리적 혼란이자 정치 과정을 방해하는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감정은 사회와 정치 질서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다음 이 비이성적 혼란을 치료하는 이성적 만병통치약으로서 바로 계몽이 호출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은 방법이 이론적으로도 틀렸고 전략적으로도 멍청하다는 데 있다. 무엇이 더 나쁜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정치적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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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모든 정치 주체들은 물론 느낌이 있다. 그리고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감정은 당연히 정치의 중요 요소로, 병리적 혼란이 아닐뿐더러 정치의 중심 원료다.
더하여 모든 종류의 감정이 원료에 속한다. ‘좋은’ 감정만 고를 것이 아니다. 정치 영역에서는 사적 영역과는 달리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감정이 없다. 감정들은 고정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진보적인 감정도, 퇴행적인 감정도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감정도 전체주의적인 감정도 없다. 비록 신뢰나 공감 같은 몇몇 감정에 민주주의적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려고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사랑이나 공감 같은 감정이 분노나 노여움보다 더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불의에 대한 분노는 좋다고 할 수 있더라도, 외국인을 향한 야만적인 분노는 부정적인 격정이다. 활동하게 하고 연결해 주며 참여하게 하는 긍정적인 감정도 없고, 늘 선동하거나 반대로 늘 움츠러들게 만드는 명백히 부정적인 감정도 없다. 감정은 본래 정치적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감정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것에서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았다. 감정은 어느 방향에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감정은 원료이자 위험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감정은 정치적인 삶에 사실상 근간이 된다. 민주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와 감정은 깊은 연관이 있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도, 아주 잘 기능하고 있는 곳에서도.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감정의 통로를 위한 정치적 거대 기획으로 발전해 왔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런 일이 국민 정당 및 대중 정당들의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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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민주주의와 감정에 대해 “분노 은행(Zornbank)”이라는 멋진 개념을 제시했다. 이 개념으로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라는 정치적 감정이 사회 변화를 위한 핵심 원료이자 동력임을 인식하게 했고, 동시에 분노라는 원료를 생산적으로 만드는 시도를 묘사했다. 분노 은행은 풍부한 의미를 담은 개념이다. 슬로터다이크에게 분노 은행이란 좌파 대중 정당에 적용되는 개념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들, 자신들의 분노를 좌파 정당에 맡겼고, ‘은행들’은 그들의 예금을 관리할 뿐 아니라 잘 활용하여 키우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분노 은행들은 믿고 맡긴 예금을 탕진했다.
실제로는 분노 은행 개념을 모든 방향으로 확장해야 한다. 좌파 정당만이 감정의 저장고가 아니라, 모든 정당이 감정 은행이다. 그리고 그곳에 분노와 격노만 저장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포, 희망, 아픔까지 더 많은 감정들이 저장된다. 감정은 채굴을 기다리는 지하자원처럼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또한 생산되고 재생산되며 갱신되거나 약화된다. 그러므로 감정의 집하와 유통만이 아니라 감정의 생산도 있다. 하나의 온전한 감정 경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정 경제는 위기에 처했다. 감정을 관리하는 모든 은행들이 예금을 탕진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전 국민 정당들이 그렇다. 국민 정당들은 감정의 부실 은행으로 전락했다.
그 효과를 우리는 이미 만났다. 사람들은 경청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고려받는 느낌도 없다. 분노 은행들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첫째 이유는 자신들의 대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오늘날 정치 욕구에 합당한 무언가를 더는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완전 참여를 제공하지 않는다. 셋째, 그들의 기능이 여전히 옛날식 집단 주체를 위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신 오늘날 우리는 분노 시민이다. 이 집단적 감정 상태, 즉 분노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스스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정치 기관이 분노를 더 이상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분노 시민은 정치적 감정의 재개인화다. 더 이상 신뢰할 만한 분노 은행이 없다는 그 지점에서 재개인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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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은행의 기능 정지는 당연히 엄청나게 큰 효과를 낳는다. 감정이 맺고 있던 결합이 해체되었다. 정치적 감정은 거대 조직, 거대 기획 안에서 통로를 갖고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여기에서 벗어나고 있다. 정치적 정체성들도 흔들리고 있다. 정당은 기껏해야 우리의 감정을 제한된 기간 동안만 결합하는, 생애 한 시기만 함께하는 집단이 되었다. 이 말은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감정들이 부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고정된 소속 없이, 고정된 결합 없이 확신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정당과 결합하지 않는 정치적 열정이 부유하고 있다. 강력한 정치적 결합은 약해졌고, 규제되던 정치적 정체성은 느슨해졌다. 요약하면 오늘날에는 우리의 정체성뿐 아니라 감정도 불안정 상태에 빠져 있다. 우리는 감정 영역에서도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포퓰리즘적 국면과 다원화가 만난다. 거대 단체들이 침식되고, 정체성을 제공하는 그 기능 또한 침식되는 포퓰리즘적 국면과 민족이 침식되는(민족이 규정적 인물 유형을 더는 갖지 못하는) 형태 없는 민주주의라는 다원화된 사회의 만남. 이렇게 포퓰리즘적 국면이 벌거벗은 민주주의를 만난다. 포퓰리즘적 국면이 하나의 사회를 만난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더 이상 공통된 이야기가 없고, ‘모두가 공유하는’ 세계관도 없는 사회다. 포퓰리즘적 국면이 또한 다원화된 주체를 만난다. 이들은 기존 방식으로는 재통합되지 않는다.
─ 이졸데 카림, 이승희 옮김, 『나와 타자들』 185~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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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이졸데 카림은 1959년 빈에서 태어나 빈과 베를린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빈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으며 2007년부터 브루노 크라이스키 포럼에서 과학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타츠》, 《비너 차이퉁》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2000년 오스트리아에서 중도 우파인 국민당과 극우 정당인 자유당의 연립 정부가 들어서자 ‘민주적 공세’를 조직해 파시스트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새 정부에 반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 가운데 카림이 이끈 빈의 헬덴 광장 집회에는 10만여 명이 참여했다. 저서로 『알튀세르 효과: 이데올로기 이론의 구상』(2002) 등이 있으며 슬라보예 지젝의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정신 분석과 독일 관념론 철학』(공역)을 번역하고 『디아스포라라는 삶의 모델』을 엮었다. 2006년 빈 시 저널리스트상을, 2018년 『나와 타자들』로 하노버 철학 연구재단에서 수여하는 철학도서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같은 해 ‘미래의 책 10선’(《프로추쿤프트》)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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