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을 같이 읽어요! 지난주에 보내드린 1978년 베이징의 봄 이야기에 이어서 오늘은 대한제국의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8년 6월, 한 잡지의 창간호에 실린 한 편의 글이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호남학보》의 발행인이자 계몽운동가인 이기(李沂)가 조선의 낡은 폐단을 깨부수자고 주장한 논설인데요. 종이잡지라는 매체가 가장 영향력 있었던 시절, 60살의 이기가 구학문에 집착하는 동년배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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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국권 회복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학문과 교육을 말하니, 여러분은 이미 실컷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지루하고 모호하여, 듣는 사람이 반드시 몹시 놀라고 의심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는 오백 년 동안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니 언제 학문이 없었으며 언제 교육이 없었는가. 다만 갑오년(1894년) 이후 인재를 뽑지 않고 그저 뇌물만 받아먹었으므로 경전을 연구하며 책 읽는 선비가 대부분 산골짜기에서 늙어 죽은 결과 마침내 오늘날처럼 침체된 것이다. 더구나 신학문과 신교육 이야기가 나온 뒤로 조정에 서 있는 자는 군주를 버리고 나라를 팔아먹었으며, 외국에 유학한 자는 명성에 빙자하여 관직을 차지하고자 할 뿐이다. 이러한 학문과 이러한 교육은 그저 나라를 망하게 할 뿐, 나라를 일으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러고는 머리를 흔들고 손을 내저으며 뒤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린다. 여러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폐단이 있다. 내가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알려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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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학보》 제1호 표지. 본문은 주로 한문에 토를 단 국한문 혼용체로 쓰였는데, 여성 독자를 위한 내용은 한글로 편집하는 등 시대를 앞서간 잡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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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한 번 보라. 오늘날 조정에 서 있는 자는 대부분 구학문을 하던 때의 사람들이며, 공자가 말한 ‘마흔 살, 쉰 살이 되도록 알려지지 않은 자’이니 논할 것도 없다. 외국에 유학한 자 역시 모두 스무 살이 넘은 사람이니, 집안에서 보고 들은 것이 고루하고 시속의 습관이 그릇되어 이미 고질병이 들어 있다. 어찌 삼사오 년 동안의 학문과 교육으로 그 내장을 깨끗이 씻어 내고 그 사지를 확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 역시 여러분이 노성한 나이로 어린아이가 할 일을 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아들과 손자가 눈앞에 살아 있으니, 만약 신학문과 신교육으로 성취시키지 않아 다시 어리석은 아비와 할아비를 뒤따르게 된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아, 여러분 역시 구학문을 하던 시대의 사람이다. 장차 여생을 기꺼이 노예가 될 것이며 회복할 방법을 찾지 않을 것인가 물으면, 필시 “우리들은 재주와 힘이 미치지 못하니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재주와 힘 역시 나라를 망하기에 족할 뿐, 나라를 흥하게 하기에는 부족하다. 어찌 꼭 역적의 이름을 얻어야만 죄가 되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뜻이 있는 사람은 결국 일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뜻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재주와 힘이 없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뜻이 한결같으면 힘이 생기고, 힘을 집중하면 재주가 생기는 법. 이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여러분은 이 점을 거듭 생각하기 바란다.
사람 몸에 병이 있는데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으면 반드시 약을 바꿀 생각을 한다. 집이 기울어지는데 바로 세울 수 없으면 반드시 다시 지을 생각을 한다. 지금 나라가 병이 들어 이미 고칠 수 없고, 건물이 기울어져 바로 세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황제(黃帝)와 기백(岐伯)의 낡은 처방을 쓰고 조상이 살던 옛집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보이며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고 있으니, 이는 나라를 위하는 뜻이 제 몸과 제 집을 위하는 뜻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뜻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재주와 힘이 없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상황을 논하자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제 몸과 제 집을 위하는 마음만 못한 이유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여러 번 일어났다. 그러나 백성은 모두 새로운 정치에 복종하여야 여전히 처자식과 안락을 누릴 수 있었고, 학자와 군자들은 자취를 감추고 벼슬하지 않아야 오히려 후세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또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한 나라를 멸망하게 만드는 근래의 새로운 법은 그렇지 않다. 군주의 지위를 뒤엎지 않고 종묘사직을 바꾸지 않고서도 간사하고 불량한 무리를 등용하여 왕의 명령이라 핑계 대어 학정을 시행하고,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여 종족을 끊어지게 한 다음, 천천히 거두어 식민지로 삼는다. 부디 여러분은 파란(波蘭, 폴란드), 애급(埃及, 이집트), 인도(印度), 안남(安南, 베트남)의 역사를 읽어 보기 바란다. 그 비통한 마음과 참혹한 모습이 과연 어떠한가. 이것이 나라를 멸망하게 만드는 새로운 법이니,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자가 새로운 법을 사용한다면 나라를 수복하려는 자도 또한 새로운 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몹시 분명한 이치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날 신학문을 배척하는 것은 우두(牛痘)를 배척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근본과 말단을 알지 못하고 이익과 손해를 분별하지 않은 채 단지 익숙하게 보던 것이 아니면 곧장 배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우두 접종을 시행할 때, 예전 방식으로 천연두를 치료하던 의원이 몰래 헛소문을 지어내어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하며 “우두를 접종한 사람은 반드시 천연두에 다시 걸려 죽는다.”라고 하고 다녔다. 비록 칙령을 반포하고 관리가 독려해도 백성이 모두 두려워하며 회피하고, 심지어 그 자녀를 숨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지금 십수 년이 지났는데 우두를 접종한 사람이 다시 천연두에 걸려 죽은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이를 거울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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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은 반드시 시세가 사용하기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는 것이 요체이다. 내가 보기에 여러분의 학문은 대부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에게 전수받은 것이니, 참으로 좋고 아름답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고등 과정(대학 이상)에서는 시행할 수 있어도 보통 과정(중학교 이하)에서는 시행할 수 없다. 시세가 사용하기 합당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지금 신학문의 책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역시 도가 없고 의가 없는 것은 없다. 다만 여러분이 익숙하게 보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장 배척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또 “우선 네가 배운 것을 버리고 내 말을 따르라.”라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거부할 것이니,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억지로 우리를 따르라고 하겠는가. 여러분이 만약 가혹한 현실을 고민하고 위태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극점에 다다르면 필시 절로 후회할 것이니, 그때는 비록 우리를 따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행여 마음을 바꾸기를 내가 날마다 바란다.”라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답을 한다. 여러분이 만약 내 말을 거짓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구학문의 세 가지 폐단을 거론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사대주의의 폐단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지극히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 아니라면 필시 남에게 굴복하는 것을 달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남에게 굴복하는 것을 달게 여기는 이유는 세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은 단군과 기자(기자가 주나라의 봉작을 받았다는 설은 선대의 선비가 이미 밝혔다.) 이래로 또한 독립된 나라였다. 그 뒤 비록 한나라와 당나라의 정복을 당했으나 중국 내지의 주군(州郡)과는 달랐으므로 그저 정삭(正朔, 책력)을 받들고 공물을 바쳤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태조 고황제가 추대를 받아 조선을 세웠을 때 당시 민심이 복종하지 않았고 또 명나라 사람이 따질까 걱정하여 사신을 보내 신하로 칭하였으니, 실로 부득이해서였다. 또 이백 년이 지난 선조(宣祖) 임진년(1592년) 다행히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기에 백성이 오랫동안 잊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척화(斥和)를 주장한 삼학사(三學士)의 상소와 북벌(北伐)을 주장한 문정공(文定公) 송시열(宋時烈)의 논의에 항상 ‘대명(大明)’ 두 글자로 서두를 삼았으니, 반드시 이로써 민심을 격발시키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였으며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하여 사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옳고 청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그르다고 한다면 이 또한 “뺨을 맞을 바에는 은가락지 낀 손으로 맞겠다.”라는 속담과 비슷한 말이다. 사람은 뺨을 맞지 않으려 하지, 은가락지 낀 손으로 맞기를 바라지는 않는 법이다. 우리 선현의 뜻은 원래 따로 있었는데 후세 사람이 제멋대로 대명의리(大明義理)라는 말을 지어내어 당론으로 세워 자기 권세를 강화하려 하였으니, 이 또한 한심하다. 더구나 맹자는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태왕(太王)이 훈육(獯鬻)을 섬기고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섬긴 일을 증거로 삼았지만 나는 정말 태왕과 구천이 좋아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애석하다. 사대의 논의가 한번 나오자 조정과 재야를 막론하고 이를 주의로 삼아 남에게 굴복하는 것을 달게 여기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으니, 그 어리석고 못나기가 과연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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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한문 습관의 폐단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효성과 우애의 행실을 닦고 사물의 실상을 추구하는 것이니, 반드시 읽고 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한국은 불행히 중국과 가까워 예악과 제도를 모두 수입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어지지만 지금 오대양 육대주의 여러 나라 중에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 한국이 가장 많고 중국이 그다음이니 어째서인가. 천하에 지극히 배우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한문이다. 어려서부터 백발이 되도록 죽을힘을 다하더라도 명성을 이룬 자가 또한 드물다. 비록 중국은 한어(漢語)와 한문(漢文)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데도 이렇게 어렵거늘, 우리 한국의 국어(國語)와 한문(漢文)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 번역하여야 겨우 뜻이 통한다.
여러분도 보았을 것이다. 마을 서당에서 우리와 함께 배웠거나 우리의 아들 손자와 함께 배운 사람이 그 얼마나 많았는가.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가 되어 포기하고 떠나는 자가 절반을 넘고, 25~26세가 되어 그만두고 물러나는 자가 다시 절반을 넘는다. 그사이 10~20년 동안 공부한 양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끝내 이름자라도 기억하는 자는 백에 한둘도 안 되고, 장부나 편지를 쓸 수 있는 자는 백에 한둘도 안 되며, 시문을 지어 과거에 급제할 수 있는 자 또한 백에 한둘도 안 되니, 이것은 백만 명 중에 겨우 한둘을 얻는 것뿐이다. 설사 지극한 성취를 이루더라도 헛된 겉치레뿐 실속이 없는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일신의 사익을 도모하는 자는 있지만,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을 이롭게 하여 천하의 공익을 추구하는 자는 없다. 근세의 교육법은 그렇지 않아, 차라리 한 사람을 잃을지언정 백만 명을 잃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백만 명 중에 이 한 사람이 없더라도 단체가 되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반대이니 그것이 옳은가.
셋째는 문호를 차별하는 폐단이다. 사람이 처음 태어날 적에는 똑똑하고 어리석은 차이가 있을 뿐 귀천의 차별은 없는 법이니, 똑똑한 사람은 저절로 귀해지고, 어리석은 사람은 저절로 천해지는 법이다. 후세에 이르자 마침내 권세와 이익을 다투어 지금 문명국으로 불리는 서양의 여러 나라도 간혹 인종과 계급의 차별이 있지만, 우리 한국에서 말하는 것 같은 당파는 없다. 양반이니 상민이니, 문반이니 무반이니, 적자니 서자니,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북인이니 이렇게 하여 340개 고을에서 크든 작든 강하든 약하든 서로를 원수로 여기고, 심지어 서로 혼인하지 않고 사귀지도 않는다. 이러니 천리(天理)를 없애고 인륜을 끊는 정도가 과연 어떠한가.
지금 13도(道) 호구를 최근 조사한 표에 따르면 남자의 인구가 대략 600만이다. 이를 양반과 상민으로 나누면 한쪽이 겨우 300만이다. 다시 문반과 무반, 적자와 서자로 나누면 한쪽이 겨우 75만이다. 다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으로 나누면 한쪽이 겨우 18만 7500이다. 다시 340개 고을로 나누면 한쪽이 겨우 5466명이다. 그중에 늙은이, 어린이, 귀머거리, 장님, 절름발이, 병자를 제외하면 남는 사람이 또 얼마나 되겠는가. 더구나 당파 안에도 군자와 소인이 있고, 군자와 소인 안에도 또 당파가 생긴다. 장차 이것으로 열강의 억만이 넘는 단체의 대중과 대결하려 든다면, 이 또한 역량을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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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폐단은 그 유래가 이미 오백 년 동안 습속이 되었으며 사람들이 이를 편안하게 여기고 있어 다시 그 좋고 나쁜 것과 옳고 그른 것이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도 모든 분들과 함께 이 폐단의 술에 취해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그 술을 조금 마셨기에 조금 빨리 깨어났으니 어찌 흔들어 깨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 폐단을 다스리는 방법을 말하고자 하니 이는 곧 천하의 공정한 의논이요, 한 개인의 사사로운 견해가 아니다. 여러분은 편안한 마음과 느긋한 기운으로 재삼 상세히 살피기 바라고, 갑작스럽게 성내고 욕하지 말기 바란다.
첫째, 독립으로 사대주의의 폐단을 깨뜨려야 한다. 지금 여기 한 사람이 있어 귀와 눈이 있고 사지가 멀쩡한 데도 홀로 서지 못하고 남의 부축을 받고자 기다리면 이는 마비된 자이니,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도 이와 같다. 그 토지와 인민이 모두 있는데도 스스로 부강을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변방에 살면서 구속을 받으니, 황천에게 지각이 있다면 반드시 몹시 가엾게 여기고 몹시 분통해할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이 과연 독립 두 글자를 무대로 나설 깃발로 삼아 온 힘을 다해 함께 나아간다면, 지금 천하에 수나라나 당나라처럼 강한 나라가 있더라도 또한 감히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한걸음도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근심하기는 부족하다.
둘째, 국문으로 한문에 익숙해진 폐단을 깨트려야 한다. 아, 우리 세종 대왕은 참으로 기자 이후 걸출한 성군이다. 그 폐단이 반드시 이런 지경에 이를 줄 알고 마침내 국문(곧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의 풍속을 완전히 바꾸려 하였는데, 당시 사대부가 그 뜻을 받들지 못하고 인순고식(因循姑息)하여 지금껏 사백 년 동안 오직 여항(閭巷)의 부녀자들이 소설을 읽는 것 외에 쓰임이 거의 없었으니 애석함을 어찌하겠는가. 갑오개혁 이후로 국문과 한문을 함께 쓰는 안이 이미 관청에서 시행되고 있고 또 학계에서 시행될 것인데도 이를 모르는 자들이 오히려 비방을 그치지 않고 있으니 그 또한 심하다 하겠다.
─ 이기, 「도끼로 찍어 없애야 할 것(一斧劈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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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이기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전남 구례에 있는 황현을 찾아가 신학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황현은 쉰세 살인 자신은 신학문으로 바꾸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합니다. 이기는 황현처럼 주위의 눈치를 보며 옛날의 학문에서 벗어하지 못하는 사족들을 위해 글을 썼대요. 또 다른 선비가 그런 이기를 두고 ‘기이하구나’라고 비판하자 그는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기이하다는 것은 범상치 않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은 범상치 않은 때이니, 범상한 학문과 범상한 교육으로는 백성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니 그 문장이 기이한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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