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과학자가 화가에게 보내는 편지

한편을 같이 읽어요! 2020년, 양자물리학 전문가인 김상욱이 1920년대 초현실주의 대표 화가 르네 마그리트에게 편지 한 통을 썼습니다. 초현실주의 회화와 양자물리학의 공통된 특징이 보인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꿈과 무의식을 주제로 한 초현실주의 화화는 그림의 의미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쉽게 이해할 수 없기로는 양자물리학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어쩌면 양자물리학과 초현실주의가 1920년대 유럽에서 동시 탄생한 것도 우연은 아니겠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면, 그건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양자물리학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이유가 되는지 의아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작품이 양자역학의 중요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쓰는 것이죠.
 
사람들은 당신을 초현실주의 작가라고 합니다.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영향을 받아 주로 인간의 꿈과 무의식을 주제로 한 것이 특징이죠. 최초의 초현실주의 작가라 할 만한 조르조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를 보면 석고두상, 고무장갑, 공이 아무 이유나 맥락도 없이 한데 놓여 있습니다. 처음 보면 정말 이런 게 예술일까 하는 의문마저 드는 작품입니다
 
당신의 그림에도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괴상한 상황이 등장합니다. 「우상의 탄생」에서는 사방이 폭풍우로 뒤덮인 거실에 사람의 손을 가진 거대한 기둥 모양의 난간(bilboquet)이 서 있고, 「온당한 포로」에는 그림의 일부인지 풍경 그 자체인지 알 수 없는 그림이 불타는 트럼펫 옆에 서 있는가 하면, 「공동 발명」에서는 상반신이 물고기이고 하반신이 인간인 인어공주가 해변에 누워 있습니다.

 

당신은 그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나의 그림이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작품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사람들은 물건을 사용할 때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하지만그림을 볼 때는 의미는커녕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사람들이 상징이나 의미를 찾는 것은 곤경에서 벗어나길 원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 말입니다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감상이나 하라는 협박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192311­­초현실주의 회화라는 전시회가 파리에서 열렸고, 그 이듬해 초현실주의 제­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당신도 초현실주의 화가 모임에 동참하기 위해 브뤼셀을 떠나 파리로 이사했죠흥미롭게도 초현실주의운동이 정점에 다다르던 그 시기에 양자역학이 탄생했습니다
 
양자역학의 탄생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루이 드브로이 공작은 프랑스의 지체 높은 가문 사람이었습니다. 파리에 살았으며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을 겁니다
 
당신의 첫 번째 전시회가 브뤼셀에서 열렸던 1927년은 양자역학의 해석을 놓고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브뤼셀에 모여 논쟁을 벌인 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1920년대에 물리학자와 초현실주의 작가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접촉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양자역학에중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상태가 공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파리에 있으면서 동시에 브뤼셀에 있는 것이지요. 당신의 작품 「표절」을 보면 실내에 꽃병이 하나 있는데, 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건물 밖의 나무가 존재합니다. 「빛의 제국」에서는 하나의 장면 속에 낮과 밤이 공존하고 있죠. 저는 이런 그림이 양자 중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당신이 저의 이런 해석을 달가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양자역학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관측이 있습니다. 중첩 상태에 있는 대상을 관측하면 갑자기 하나의 상태로 선택이 일어납니다. 파리와 브뤼셀에 동시에 존재하는 당신을 내가 관측하면 당신은 파리나 브뤼셀 둘 중 하나의 장소에만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관측하기 전에 당신은 두 장소에 모두 존재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요? 당신 그림에 등장하는 기둥 모양의 난간은 관측자를 나타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떤 그림에는 난간에 아예 눈이 달려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당신이 관측자의 존재에 집착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환상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 관측자가 필요한 것인지요?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양자 중첩 상태를 경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관측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죠.
 

당신이 양자역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화내셔도 당신 잘못은 아닙니다. 양자해석의 창시자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에 문제가 있다고까지 말했으니까요. 중첩이나 관측이라는현상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런 현상을 제대로 기술할 언어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담뱃대가 아니다.”라고 담뱃대 밑에 써 놓은 당신의 그림 「이미지의 반역」이 떠오르네요. 당신은담뱃대라는 단어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고 했죠. 언어는 세상을 기술하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을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의 지속」에서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성이론과의 관계를 생각했지만 달리는 극구 부인했죠. 치즈가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얻은 영감이라고요. 오늘날은 예술이 과학에서 영감을 얻는 일이 흔하지만 당시는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합니다
 
사람들은 의식하지도 못하는 중에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1920년대 유럽이라는 시공간은 양자역학과 초현실주의를 동시에 탄생시켰습니다이런 흥미로운 사건이 2020년대 한반도라는 시공간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나길 기대하며 편지를 마칩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물리학자
김상욱 드림
 
오늘 전해 드린 글은 물리학자 김상욱과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의 글을 함께 엮어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를 보여 주는 책 『뉴턴의 아틀리에』의 네 번째 키워드, ‘편지’의 일부입니다. 과학과 예술, 서로 다른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만났습니다. 김상욱 교수는 틈만 나면 미술관을 찾는 과학자이며, 유지원 디자이너는 물리학회까지 참석하며 과학에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두 저자는 무엇보다도 “관계 맺고 소통하기”를 지향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찰과 사색, 수학적 사고와 창작의 세계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스러움, 복잡함, 감각, 가치, 상전이, 유머 등 모두 26개의 키워드를 놓고 과학자와 예술가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 다양한 생각들을 펼쳐 냅니다.